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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NDWANA Jul 30. 2019

20세기 보에티우스

[바보들의 결탁] 존 케네디 툴



오블로모프를 연상시키는 약간 정신나간 코쿤족의 모험기(?)이다. 평생동안 뉴올리언즈를 단 한번 밖에 벗어나 본적이 없는 주인공 이그네이셔스는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구제불능의 미친놈이다. 서른살이 되도록 변변한 직업도 없이 집안에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쓸데없는 글나부랭이나 쓰고 있으면서 어머니의 속을 썩인다. 어머니의 성화에 직업을 구하지만 직장에서도 그는 제멋대로에 사고뭉치다. 도저히 정상적으로 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의 위인이라 누구나(심지어 독자까지도) 그를 정신병원에 보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그네이셔스가 세상과 불협화음을 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는 중세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보에티우스의 '철학의위안'을 성전처럼 떠받들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뉴올리언즈를 떠나지 않고 살아온것하며, 섹스에 대해 병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이그네이셔스는 중세 수도사 같은 편협한 지식과 완고함으로 똘똘 뭉쳐있는 것이다.


툴은 보에티우스를 타임머신을 태워서 소련과의 체제경쟁이 한참이던 1960년대의 미국에 떨궈놓았다. 5세기의 보에티우스는 모함을 당해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에 중세철학서중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되는 '철학의위안'을 썼다. 부귀영화를 뒤로 하고 차디찬 감옥안에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허무함을 느꼈음직했지만 철학적 명상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종교철학적 차원에서 받아들였다. 20세기의 보에티우스도 나름대로의 '철학의위안'을 써내려가기는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지는 비극적 운명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며 명상과 사색대신 근거없는 자신감과 무례함으로 무장하고 있다.


5세기의 보에티우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사형장의 이슬이 되지만 20세기의 보에티우스는 자신이 벌인 일들로 인해 스스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을 직감하고 그토록 두려워하던 뉴올리언즈 엑소더스를 감행한다. 이 책이 국내에 처음 번역되었을때의 제목은 '천재는 죽고 바보는 떠나고'였다. 물론 바보는 이그네이셔스를 지칭하는 것일 것이다. 천재는 보에티우스를 지칭하는 것 같은데 확실한 것은 아니다. 소설속에서 죽는 사람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역자도 보에티우스와 이그네이셔스를 서로 대비시켜 제목을 그렇게 지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번역이라는 틀을 한 번 거치게 되는데다 60년대의 미국사회가 가진 정서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책이 당시 미국사회를 얼마나 적나라하게 풍자를 했는지 한국사람들은 알길이 없다. 퓰리처상까지 받은걸 보면 사회적 부조리를 굉장히 사실적으로 풍자해냈겠구나 라고 우리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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