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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NDWANA Aug 01. 2019

테크놀로지의 그림자

[미래쇼크] 엘빈 토플러



어렸을때 학교에서 미술시간이나 글짓기 시간에 서기 2000년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써보는 시간이 있었다. 아이들은 우주로 날아가는 로케트나 해저도시, 수많은 빌딩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모습을 그리곤 했다. 비슷한 시기에 나름 전문가들의 미래에 대한 예측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티비로 모든것을 주문한다거나 가정용 로봇이 집안일을 다하고 달나라 정도는 쉽게 왔다갔다 할 수 있는 세상을 예측했다. 대부분 미래사회는 모든 것이 편리해지는 밝은 것이라는데 동의했다. 물론 미래를 암울하게 예측하는 사람도 있긴했다. 1999년에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부터 많은 예언가들이 2000년을 기점으로 인류에 중대한 고비가 찾아올 것으로 전망했고, 미야자키하야오는 1978년 발표한 미래소년코난의 프롤로그에서 2008년에 세계적인 핵전쟁이 벌어질거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지금은 서기 2000년하고도 12년이 더 지난 상태이고 수십년전의 사람들이 예측한 내용들이 어느 정도는 이루어지고 또 어느 정도는 현실화되기 직전에 있다.  



본서는 1970년에 토플러가 예언한 미래이다. 그 시절의 많은 사람들처럼 토플러도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필연적인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실현될 테크놀로지에 의한 장밋빛 전망을 내놓은데 반해 토플러는 테크놀로지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급속한 기술발전은 반드시 거기에 따라가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아노미상태에 빠지게 할것이란 것이다. 특히 토플러는 바이오산업에 주목했다. 예를들어 인공장기나 자궁외 임신이 그렇다. 인공장기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장기를 하나씩 인공의 것으로 바꾸어가다가 급기야 뇌까지 교체가 가능한 시기가 왔을때가 되면 사이보그로 영원히 사는것과 같은 상황이 오게된다. 과연 그 사이보그를 생물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인지, 인격체로 인정해도 괜찮을 것인지에 대한 혼란에 빠질 것이다. 또 아이를 원하는 불임녀가 남의 난자를 빌어서 제3의 자궁에서 착상을 시켰을때 그 아이의 친권은 어디가 되어야 하는것인지 같은 문제도 생길 것이다. 



현재에도 인간의 배아를 이용한 실험은 윤리적인 이유를 들어 많은 국가에서 금지를 하고 있지만 획기적인 기술하나면 돈방석에 올라앉는 자본주의 하에서 법률적인 구속이 얼마나 효력이 있을지 의문이다. 황우석 사태가 났을때 많은 사람들이 '이대로는 줄기세포를 이용한 생명공학은 다른 경쟁국가들에 비해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인공 뇌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나머지 장기들은 이미 많은 부분이 대체가능하다. 이제 사람들은 거기서 더 나아가서 인간의 배아를 조작해서 특정장기를 배양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취된다면 많은 불치병환자에겐 희소식이 될것이다. 하지만 생명윤리의 벽에 가로막힐 것이 분명하다. 그런식으로 배양되는 장기들을 인간생명의 한 종류로 보아야하느냐의 문제가 있다. 거기까진 괜찮지 않냐고 누군가 이야기한다면, 배양의 효율성을 위해 하나의 배아세포로 부터 심장, 간, 폐, 척추를 동시에 배양한다면 어떤가? 토플러는 이같은 과학기술의 발달로인한 윤리적인 문제에 주목했다. 핵탄두를 개발할때 많은 과학자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정치적인 압력으로 인해 기어코 일은 성사되었고 심지어 히로시마에 실제로 투척까지 되었다. 생명공학이라고 핵탄두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자본의 압력으로 인해 공장에서 인간 비슷한 것(?)을 양산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같은 변화는 미래에 우리의 생활을 둘러싼 모든 분야에서 진행될 것이다. 지금의 노인들이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문화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앞으로 다가올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 충격에서 소외될 날이 올것이다. 문제는 기술발전의 가속도가 굉장히 빠르게 증가한다는 것이다. 인류역사를 6000년으로 가정하고 평균수명을 64세로 했을때 대략 역사이후 800세대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중에 전기를 경험한 세대는 3세대에 불과하고 현재 누리가 누리고 있는 과학기술의 대부분은 마지막세대에 와서야 이루어진 것들이다. 앞으로 가속도의 기울기는 더 가팔라질 것이고 앞으로 몇십년후의 우리는 마치 조선시대의 인물을 현재에 갖다놓은것 정도의 기술에 대한 위화감을 느낄 수도 있을것이다. 



토플러는 책의 말미에 인간에게는 매우 잔인한 면과 더불어 자신의 환경을 조화롭게 꾸미는 면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토플러는 부디 후자가 인간의 미래에 더 영향을 미치기를 바란다는 희망사항을 피력한다. 책의 대체적인 내용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이야기한 것이라 마지막에라도 좀 희망적인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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