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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화문덕 Mar 22. 2019

#54. 내 영혼의 위로

[신동진의 와인에 빠지다] 13화. 와인과 탱고

실처럼 가느다란 음이 뽑혀 나온다. '탱고의 영혼'이라 불리는 작은 손풍금, '반도네온'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리다.

반도네온(bandoneon) : 아코디언 종류로 아르헨티나 탱고의 대표적 악기

서두르지 않는다. 한 음 한 음. 구슬프게 절규하듯 내 가슴 속 깊이 파고든다. 사랑의 아픔과 삶의 애환으로 인한 슬픔을 함께하자고 호소하는 듯이.


그러다 따뜻함이 느껴진다. 슬픔 뒤에 오는 위로가 이런 것일까. 날카롭게 파고들던 음은 작아지고, 분위기가 고조되며 악기들의 합주가 이어진다. 위로하듯 부드러운 선율이 내 마음을 감싼다.


위로, 안도감. 삶의 힘든 외로움과 고통을 잊어버리라는 듯.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내게 말하는 것 같다.


다시 소리가 작아진다. 애잔함이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미세하게 떨려오는 음들이 내 마음속 깊은 상처를 스치며 슬픔이 밀려온다. 비극 영화를 본 것 같은 마음의 동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다.


요즘 외롭거나 슬퍼질 때면 아르헨티나 말벡 와인과 함께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zolla)의 '망각(Oblivion)'을 듣곤 한다.


좀 과격하게 말하면 요즘 아르헨티나, 탱고에 미쳐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탱고는 춤으로서가 아닌 음악·예술로서의 탱고에 심취해 있다. 탱고의 역사와 아르헨티나 관련 책은 닥치는 대로 읽어보려고 할 정도다.


사실 우리는 탱고 하면 외설적이고 퇴폐적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기 쉽다. 탱고를 출 때 입는 복장과 춤사위에서 느껴지는 이미지가 있어서다. 하지만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탱고의 기원은 사실 삶의 외로움과 고단함과 관련이 깊다.

탱고는 19세기 아르헨티나의 항구도시 라 보카(la boca)로 모여든 가난한 이민자들의 타국에서의 힘겨움과 삶의 애환을 달래주는 음악이었다. 그들은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며, 힘든 육체적 노동을 한 뒤 고단함을 달래려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하면 채워질 수 없는 외로움에 탱고를 췄다고 한다. 처음 탱고춤을 춘 건 남자끼리였다는 설도 있다.


내 삶 깊은 곳에는 삶의 고단함과 애환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일지도 모르겠다. 탱고를 들으면 위로를 받는다는 느낌을 받으니 말이다.


그리고 탱고하면 빠지면 안되는 곡이 바로 '오블리비언(Oblivion)', 우리나라말로 번역하면 '망각'이다. 망각(忘却)은 사전적 의미로는 '잊혀짐'이다.


이 곡은 1984년에 처음 만들어진 곡으로, '리베르탱고(Libertango)'와 함께 반도네온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탱고를 예술음악의 경지로 승화시킨 인물로 불리는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zolla)의 대표곡이다.

아스토르 피아졸라는 망각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고 전해진다.


'모든 인간의 행위에는 망각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살아 숨 쉬는 유기체의 생명에는 망각이 필요하다.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 기억 속에 묻혀 잊히는 것뿐이다. 나를 기억에 묻고 너를 그 위에 다시 묻는다'


이제 탱고 음악에 대해 맛을 봤으니, 탱고 음악을 들을 때 빠져서는 안 되는 말벡 와인에 대해서 살펴보자.


말벡이란 포도품종의 원산지는 프랑스지만, 지금은 아르헨티나의 대표 포도품종으로 꼽히고 있다. 여기에도 숨겨진 역사적 배경이 있다.


때는 15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말벡은 프랑스에서 그야말로 왕족과 귀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프랑스 르네상스를 이끈 프랑수아(Francois) 1세를 포함한 프랑스의 왕족과 귀족들이 살던 시대에 말이다.


오르막길이 있다면 반드시 내리막길이 있는 법. 말벡에게도 수난 시대가 찾아온다. 보르도 지역 와이너리들의 견제와 유럽에서 발생한 전쟁들, 그리고 19세기 말 유럽 전역을 휩쓴 ‘필록세라(포도 뿌리를 병들게 하여 포도뿌리혹벌레라 불린다)’ 피해, 여기에 1956년대 발생한 이상기온에 따른 '된서리' 등으로 프랑스에서 말벡은 거의 멸종될 위기에 처하게 됐다. 병충해에 이상기온이 겹친 19세기 말 당시 말벡 포도나무 75%가 썩거나, 말라 죽었다고 전해질 정도다.

이는 말벡이란 포도품종의 특정과 관련이 깊다. 말벡은 수확기가 상대적으로 늦다. 자칫 수확기에 비나 우박 등이 내리게 되면 피해가 막심해지는 위험이 늘 감수해야 하는 셈이다. 게다가 말벡은 병충해에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단점도 있다.


이후 말벡은 프랑스를 떠나 미국, 칠레 등 신대륙 몇 나라를 떠돌다 아르헨티나로 유입됐고, 아르헨티나의 높은 해발고도와 안데스 산맥의 쾌적한 환경에서 무럭무럭 잘 자랐다고 한다. 마치 아르헨티나가 자신의 원래 터전인 양.

오늘날 아르헨티나는 전 세계 모든 에이커 중 75 % 이상의 말벡 포도를 생산한다. 아르헨티나에서 수출하는 와인의 60%가 말벡일 정도라고 한다.


현재 말벡은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품종이자,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포도품종이 됐다.


그럼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프랑스 말벡과 아르헨티나 말벡은 차이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차이가 있다. 와인은 흔히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이 합쳐져 만들어 낸 작품이라고 말한다. 토양과 기후 등 재배조건과 생산자의 재배 철학이 다르니 맛과 향, 컬러에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일반적으로 아르헨티나에서는 중서부에 위치한 멘도사(Mendoza)가 말벡의 대표산지로 분류되며, 프랑스에서는 남부에 롯(Lot)강을 끼고 있는 까오르(Cahors) 지방이 대표산지로 꼽힌다.

아르헨티나 말벡은 프랑스 말벡과 비교해 포도 껍질이 얇다. 포도 껍질은 타닌 함유량과 연결된다. 아르헨티나 말벡으로 만든 와인이 프랑스 말벡으로 만든 와인보다 좀 더 부드럽고 과일 맛이 강하다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컬러는 아르헨티나 말벡 와인이 프랑스 말벡 와인보다 진하다.


말벡과 탱고는 내게 특별하다. 와인을 시작하게 된 것도 깊은 인상을 준 말벡 덕택이었고, 예술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열정을 품게 해준 것은 탱고였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요즘 내 영혼을 위로해주는 중요한 매개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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