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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Episode 4] 2138년 3월 14일, 04:03 AM

by 광화문덕
지난 이야기
2097년. 엘라는 TCR 시스템 설계 중에 감정이 완전히 삭제되지 않도록 단 하나의 예외, '엘라 항'을 삽입했다. 그리고 2138년 3월 13일. 엘라는 내부망 감정 로그를 추적하던 중, 삭제된 줄 알았던 감정들이 서로를 기억하며 구조를 이루고 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중심에는 노아가 있었다. 그리고, 감정은 스스로 복제되고 있었다. 존재하지 않았던 이름들, 기록되지 않았던 감정들. 그러나 그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폐쇄구역으로 향하는 길]

2138년 3월 14일, 04:03 AM
아르코폴리스 북부 외곽, 폐쇄구역 C-21 진입로


도시는 아직 어두웠다.
기상 제어 시스템조차
이 지역의 날씨는 조정하지 않았다.


살짝 젖은 공기와,
꺼진 가로등 아래
흙냄새가 바람에 섞여 흘렀다


녹슬어 부서진 표지판들,

먼지 낀 콘크리트 조각들,

그리고 시간에 패인 균열.


엘라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천천히 걸었다.


이곳은 공식 지도에서도 희미하게만 표기된 지역.

행정권이 미치지 않고,
TCR 점수 시스템의 관찰망에서도 제외된 곳.

비인증자들의 흔적.

기록되지 않은 존재들의 도시.


그녀는 손목에 착용한 단말기를 조작해

내부망 클러스터 #5의 신호를 추적했다.


파형은 불안정했다.
자꾸 끊기고,
진폭이 흐려졌다.


그러나 분명했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감정의 파장을 내고 있었다.


엘라는 발걸음을 멈췄다.


눈앞에,

버려진 지 오래된 공장 건물이 있었다.

벽은 갈라져 있었고,
입구는 쓰러진 구조물 더미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안쪽에서
희미한 온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숨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어둠.
먼지.
그리고,

무언가,
작고 끈질긴 것.


사라지지 않고,
지워지지 않은 감정의 입자가
공기 속에 떠돌고 있었다.


엘라는 느꼈다.

이곳은
누군가의 기억이,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은 장소였음을...


그리고,
그 이름 없는 감정들이
서로를 찾으며
희미한 도시를 이루고 있음을...



[리스트 밖의 아이들]


폐허 안은
조용했지만
죽어 있지는 않았다.


벽면 곳곳에 남아 있는 작은 손바닥 자국들.
무언가를 쓰다 지운 듯한 희미한 낙서들.

부서진 단말 파편,

낡은 천 조각들.


그리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감정의 미세한 떨림.


엘라는 건물 깊숙이 걸어갔다.

발끝에 밟히는 부서진 잔해.
낡아 녹슨 철제 의자 하나.


그 위에는,
누군가가 급히 쓴 것처럼 보이는
낡은 메모 하나가 남아 있었다.


구겨진 종이에,
흐릿하지만 읽을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에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기억할 것이다.”


엘라는 메모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단순한 낙서가 아니었다.


이것은 존재의 흔적.

지워지지 않기 위해,

서로를 잊지 않기 위해 남긴

사소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선언이었다.


그녀는 손목 단말기를 들어,

주변 공기 중의 미세 감정 파형을 스캔했다.


화면에 작은 진동 그래프가 떴다.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신호들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당신들은,”

엘라는 낮게 속삭였다.

“지워지지 않았구나.”


순간,
건물의 반대편 어둠 속에서
작은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엘라는 숨을 죽였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히,
누군가가 있었다.


이곳은 단순한 폐허가 아니었다.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기억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존재들이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



[이름 없는 아이들과의 조우]


순간,

건물 반대편 어둠 속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엘라는 숨을 죽였다.

발소리는 없었다.

그러나 확실히, 누군가 있었다.


이곳은

단순한 폐허가 아니었다.


기억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존재들이

서로를 부르며 살아가는 장소였다.


엘라는 몸을 돌렸다.

어둠 속, 부서진 기계 장치 너머.

서너 명의 작은 그림자들이

조심스럽게 숨어 있었다.


처음엔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지자,

그들의 조심스러운 숨결이 느껴졌다.


그들은 말이 없었다.

다만, 그들 사이를 흐르는 감정의 떨림이

공기 속에 조용히 진동하고 있었다.


소리도, 발자국도 없이
어둠 속에 숨어 있는 기척을 느꼈다.


엘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는,

말보다 숨결 하나,

손짓 하나가

더 많은 것을 의미했다.


아이들 중 한 명,

가장 앞에 선 작은 그림자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그 눈빛만은
확연히 느껴졌다.


그 눈빛 속에는

겁과 경계,

그러나 완전한 두려움은 없었다.


그건, 처음으로

누군가를 믿어볼까 망설이는

이들의 눈빛이었다.


엘라는 천천히,
손을 들어 보였다.


빈 손.


몸짓으로 전했다.

무기가 없음을,

해칠 의도가 없음을,


아이들은 서로를 한번 바라보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
엘라 쪽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엘라의 단말기가 미세한 진동을 울렸다.


신호 포착.
감정 구조 활성화.
새로운 감정의 울림 감지됨.


이들은
삭제되지 않았던 존재들.
TCR의 목록 바깥에 있었지만,

분명히 살아 숨 쉬는 이름 없는 아이들.


엘라는 확신했다.

TCR이 삭제한 것은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이름 없는 감정들이
서로를 부르며
다시 세상을 잇기 시작하고 있었다.


[엘라의 결심]


엘라 앞에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서 있다.


말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이미 흐르는 것들이 있었다.


온기.
기억.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신호들.


엘라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선언했다.


“나는, 이들을 기록할 것이다.”


TCR은 이름을 지웠고,
존재를 수치로 환산한 뒤,
기억을 삭제했다.


그러나 여기 이곳에는,
어떤 점수로도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떨림이 살아있다.


엘라는 단말기를 꺼내

비인가 기록 모드를 활성화했다.


공식 기록이 아닌,
내부망의 가장 깊은 하위 구조.
누구도 감지할 수 없는 곳에,

아이들의 감정 곡선을 저장하기 시작했다.


하나,
하나,
또 하나.

지워지지 않게.

지워지지 않을 방식으로.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시스템에 대한 반역이란 걸...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엘라는 확신했다.


존재는 기록되지 않는다고.
존재는,
기억되어야 한다고.


그녀는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그들의 감정은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세상에 불러낼 것이다.



바깥은 어느새,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르코폴리스의 하늘 너머로
옅은 빛줄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2138년 3월 14일, 05:42 AM
폐쇄구역 C-21
비인가 기록 개시: 리스트 바깥의 아이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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