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5] 2138년 3월 15일, 새벽 2시 12분
지난 이야기
2138년 3월 14일. 엘라는 점수 바깥의 존재, 이름조차 등록되지 않은 아이들을 마주하게 된다.
폐쇄지구. 삭제된 감정 로그. 지워진 존재들.
그들은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았고, 감정도, 이름도, 기록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엘라는 그들을 기록하기로 결심한다. 점수나 규칙이 아닌, 감정으로 남기기로. 공식이 아닌 비인가 채널을 통해 아이들의 감정 곡선을 비밀리에 저장하기 시작한다.
“존재는 점수로 증명되지 않는다. 존재는, 기억되어야 한다.”
바로 그 다음날, 엘라가 TCR 시스템 내부에서 큐레이션 거부된 진실들, 즉 삭제된 존재들의 이력을 뒤쫓으며 시작된다.
2138년 3월 15일, 새벽 2시 12분
TCR 중앙 기록 서버 / 7계층 열람권한 – 엘라
[잊히도록 설계된 이름들]
엘라는 고요한 설계실 한복판에서
단말기의 잠금을 해제했다.
모든 조명이 어둠 속으로 스러진 시간.
그녀 혼자만이 깨어 있었고,
오직 그녀만이 이 계층에 접근할 수 있었다.
단말기 화면 위, 숨겨진 명령어를 입력하자
회색으로 봉인되어 있던 구역이 미세한 진동과 함께 열렸다.
[Accessing: Curatorial Rejection Logs]
회로의 미세한 떨림처럼,
감춰진 데이터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곧, 건조하고 무표정한 기계음이
이 공간을 가르듯 울려 퍼졌다.
“삐— 검증 실패. 큐레이션 거부. 기록 소각.”
그 말은 마치
감정이 증발된 재판의 최종 판결처럼,
균일한 음색으로 반복됐다.
엘라는 눈을 깜빡이지 않은 채
그 문장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말 한 줄마다 누군가의 존재가 사라졌고,
그 흔적은 이제
'기록되지 않음'이라는 딱지만 남긴 채 떠돌고 있었다.
이곳은 TCR 내부의 가장 깊숙한 층,
공식 라우팅에도 표시되지 않는 ‘큐레이션 거부 로그’ 디렉토리.
심지어 7계층 접근권한조차 경고와 함께 동반되는 영역.
이름 없는 존재들의 무덤.
처음부터 시도조차 허락되지 않은 생의 단편들.
엘라는 손끝으로 파일 하나를 열었다.
[CASE_2104-CANDIDATE.HEIRA]
검증 제안자: 정식 큐레이터
검증 토큰: 1,200 GAT 스테이킹
제안 사유: “정신 안정성 상위 1%. 커뮤니티 정서 조율 가능.”
투표 결과: 등록 거부 87.1%
거부 사유: “공적 영역에 과도한 감정 이입 가능성 우려”
처리 상태: 기록 삭제됨 / 예치 토큰 소각 / 검증자 불이익 없음
엘라는 무심히 읽던 스크롤을 멈췄다.
조용히 숨을 가슴 깊숙이 들이마셨다.
“감정이 ‘안정적’이어서… 문제였다고?”
그녀는 속으로 되물었다.
억제되어도 거부되고, 드러나도 삭제된다면
감정은 존재 자체가 오류라는 말인가.
여기서 문제는 ‘신뢰’가 아니었다.
시스템이 묻고 있는 건,
그 감정이 ‘정상성’이라는 정서적 기준에 부합하는가였다.
다수의 불안 앞에서 감정은 항상 ‘리스크’였다.
그리고 그 불안을 조율하는 기준은 언제나 다수였다.
엘라는 다음 로그를 열었다.
[CASE_2111-CANDIDATE.KOZNA]
등록 제안자: 시민 큐레이터
검증 토큰: 3,000 GAT 스테이킹
제안 사유: “10년간 지역 커뮤니티 기여, 감정 대화 채널 운영자.”
투표 결과: 91.6% 거부
거부 사유: “비표준적 언어 사용. 주관성 과다. 다수 설득력 부족”
부가 사항: 시민 큐레이터 207명, 예치 수익 자동 분배
엘라는 화면을 내려다보며 작게 중얼였다.
“진실은… 다수의 언어로만 말해져야 하는 걸까?”
그녀는 이제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 시스템은 단순한 블록체인이 아니었다.
이건, 신뢰를 수치화하고 구조화하는 사회적 합의 장치였다.
TCR — Token-Curated Registry.
토큰을 예치해 신뢰를 증명하고, 투표를 통해 존재를 선별하는 프로토콜.
그리고 다수의 손으로만 진실을 결정하는 구조.
누군가를 '신뢰 가능한 존재'로 등록하려면
큐레이터는 일정량의 토큰을 예치해야 한다.
그 제안이 공동체의 신뢰를 얻으면 리스트에 등록되지만,
거부된다면... 그 존재는 시스템에서 말끔히 지워진다.
데이터는 삭제되고, 토큰은 소각된다.
그리고 그 ‘거절’을 정확히 예측한 다수에게는 보상이 돌아간다.
이 시스템은 감정을 판단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감정을 신뢰한다’고 말하는지를 판단할 뿐이다.
신뢰는 사실이 아니었다.
신뢰는 통계였다.
진실은, 기록이 아니라 합의된 수치였다.
즉,
이 모든 것은 기술이 아니라,
선택된 신뢰만이 생존하는 생태계였다.
엘라는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단 한 번도 규범을 어긴 적 없는 이들조차,
‘다수’라는 필터 앞에서는 존재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진실은, 사실이 아니었다.
선택받은 데이터만이 진실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집단 보상 시스템 위에서 거래되고 있었다.
그녀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을 꺼냈다.
신뢰가 아직 ‘기술’이 아닌 ‘이념’으로 불리던 시절.
시스템이 처음 시험 적용되던 해.
엘라는 설계자로서 내부 교육 세션에 참관하고 있었다.
그날 회의실 벽에는
“신뢰, 투명성, 보상”이라는 단어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그리고 강단 위,
한 발표자가 자랑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 저는 이번 달에만 6건의 거절 투표에 참여했어요,
그중 5건이 시스템의 최종 판단과 일치했죠.
그래서 총 85 GAT를 보상받았습니다.
감정을 정확히 읽는 능력, 이 시스템이 증명해 주는 거죠.”
사람들이 박수쳤다.
그는 웃으며 화면을 가리켰다.
“거절이 곧 신뢰라는 건,
우리가 얼마나 정제된 감정만을 남기고 있는지를 뜻하지 않나요?”
엘라는 그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땐 이름 붙이지 못했지만,
지금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신뢰’라는 이름으로 감정은 측정되었고,
측정되지 않는 감정은 삭제됐다.
그건 구조화된 보상이 만들어낸 '선택된 기억의 체계',
그리고 '제도화된 망각'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망각의 시스템 안에서
자신이 만든 것에 의해 지워진 이름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엘라의 단말기에 미세한 진동이 일었다.
누군가, 그녀의 접근을 감지한 것이다.
[설계실 내부, 엘라와 시온의 대화]
설계실 한구석.
빛은 깊게 눌려 있었다.
단말기에서 흘러나오던 푸른 백광이 꺼지자,
공간 전체가 조용한 심호흡처럼 식어갔다.
엘라는 터미널을 천천히 닫고,
화면에 마지막으로 남은 로그 하나를 응시했다.
잊힌 이름.
그러나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감정의 여운이 화면 위에 머물러 있었다.
조용히,
발소리도 없이 누군가가 다가왔다.
조명의 사각, 음영 속에서 낮고 침착한 목소리가 울렸다.
“당신은… 왜 그 기록에 접근한 거죠?”
엘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그 질문이 익숙하다는 듯,
준비된 듯한 침묵 뒤에 조용히 대답했다.
“누군가의 진실이, 다수에 의해 지워지고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뚜렷했다.
물리적 소리보단, 공간의 밀도를 바꾸는 무언가에 가까웠다.
어둠 속에서 한 발짝 더 다가오는 발소리.
빛이 닿지 않는 가장자리에서 나타난 실루엣.
내부 큐레이터 시온.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얼굴,
하지만 그의 눈동자 어딘가엔 미세한 파장이 일고 있었다.
“그건 프로토콜입니다.
다수가 신뢰하지 않는 정보는 시스템상 ‘진실’로 분류되지 않아요.”
엘라는 그 말을 가만히 되뇌었다.
‘시스템상 진실’이라는 말이,
진실 자체보다 더 강한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을 아프게 했다.
잠시 정적.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정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진실은 언제나 다수의 선택에 따르는 건가요?”
시온은 말이 없었다.
대답을 고민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건,
이미 내면 어딘가에 정해진 구조 안에서,
꺼내지 않기로 한 문장이었다.
엘라는 조금 더 앞으로 걸었다.
그 거리에는 오래된 시스템 설계자와 운영자 사이의 불문율이 있었다.
그녀는 그 불문율을 깨며, 조용히 이어갔다.
“소수의 감정은 왜 항상 ‘비표준’으로 여겨져야 하죠?”
그녀의 말은 쏘아붙이지 않았다.
비판이나 분노도 없었다.
다만, 그 안엔 오래도록 차곡차곡 쌓인 모순에 대한 질문이 있었고,
자신을 향한 회의가 있었다.
시온은 미세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정적 속에서
엘라는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질문이 단순한 반론이 아니라는 것을.
이건, 시스템의 근간을 흔드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단지 시온을 향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도 묻고 있었다.
설계자로서 자신이 만든 이 구조가
지금 누구의 진실을,
어떻게 지우고 있는지
[삭제 로그 복원 시도]
엘라는 단말기의 전원을 다시 켰다.
사라진 존재들의 흔적 사이에서
단 하나, 단 한 줄의 감정이라도 되살릴 수 있기를 바라며.
그녀는 천천히, 그러나 주저 없이 복원 명령을 입력했다.
HEIRA.
삭제된 큐레이션 거절 로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이름.
감정 안정성 상위 1%였던 존재.
그러나 그조차도, ‘과도한 감정 이입’이라는 사유로 시스템은 거절했고,
커뮤니티는 87.1%의 찬성으로 삭제를 결정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그 지워진 존재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엘라는 잠시 숨을 고르며 커서를 응시했다.
그리고 실행.
잠시,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터미널의 백색광만이 그녀의 눈가를 비췄고,
다음 순간,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복원 실패
사유: 다수 기반 거절 항목은 복원 불가
상태: 영구 삭제됨 / 스테이킹 토큰 소각 완료
비인가 접근 감지됨 - 자동 보고 프로토콜 활성화
엘라는 손가락을 떼지 못한 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건 단순한 복원 실패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존재는, 이제 그 흔적조차 되살릴 수 없었다.
그 이름을 기억하려는 그녀의 시도조차
시스템은 위반으로 간주했다.
그때였다.
단말기 화면 가장 하단,
시스템 로그 그래프의 한쪽 모서리에서
매우 미세한 진동 곡선 하나가 살짝 흔들렸다.
엘라는 화면을 멈춘 채 눈을 가늘게 떴다.
곧 사라진 듯 보였지만,
그건 명백히,
단순한 에러가 아니었다.
“……응답이야.”
엘라는 속삭였다.
지워진 줄 알았던 감정이,
그 마지막 경계 어딘가에서
아직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파형은 아주 짧게, 그러나 분명하게 흔들렸다.
“이건… 저항이야.”
그녀는 더 확신하듯 중얼였다.
“존재가 사라지기를 거부한 감정의 마지막 반응.”
그건 기록되지 않았지만,
기억되기를 멈추지 않은 감정의 잔광이었다.
엘라는
손끝의 감각이 서서히 사라지는 걸 느꼈다.
복원 실패란 메시지 속 문장 하나가,
마치 오래된 심장박동처럼 그녀의 안쪽을 두드렸다.
"사유: 다수 기반 삭제 항목은 복원 불가."
문장은 중립적이었다.
감정도, 의미도 제거된 채 정제된 시스템 언어.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건 명백했다.
기억하려는 시도마저 위반으로 간주된다.
엘라는 단말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삭제’는 단순한 기록의 종료가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의 복원 가능성’ 자체를 봉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시스템은 선언하고 있었다.
당신의 기억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건 단지 하나의 경고 문장이 아니었다.
시스템은 기억하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고 있었다.
TCR은 감정이 아닌 판단을,
존재가 아닌 합의를,
기억이 아닌 데이터만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엘라는 깨달았다.
TCR은 단지 정보를 분류하는 아카이브가 아니었다.
존재를 허가하는 설계 구조였다.
누군가를 ‘신뢰할 수 있는 존재’로 목록에 올리고자 한다면,
검증자는 먼저 일정량의 토큰을 스테이킹해야 한다.
그리고 공동체는 그 대상이 ‘목록에 오를 자격’이 있는지 투표로 결정한다.
만약 다수가 그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해당 정보는 시스템상에서 완전히 소각된다.
기록은 삭제되고, 등록 제안자는 토큰을 잃는다.
반면, 그 삭제에 기여한 다수는 보상을 받는다.
그건 겉보기에 공정한 절차였다.
그러나 엘라는 알고 있었다.
그 구조 안에 숨어 있는 건,
신뢰가 아닌 '편견의 집단화'였다.
화면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단말기 위에는 더 이상 어떤 감정 곡선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엘라는 천천히 손을 내려놓았다.
화면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단말기 위에는 더 이상 어떤 감정 곡선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엘라는 느꼈다.
그 존재는, 그녀 안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 순간,
오래된 문장이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되살아났다.
“진실은… 다수결로 정해질 수 없다.”
그건 의심이 아니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
마침내 그녀 자신의 목소리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엘라는 천천히 손을 내리며 단말기의 명령창을 다시 열었다.
복원은 실패했지만,
그 직전,
시스템의 캐시 메모리에 잠깐 저장됐던
감정 파형 일부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손끝이 떨렸다.
그러나 움직임은 명확했다.
/offgrid/memory/fragment_HEIRA.tmp
저장 명령 실행 중...
완료.
그건 공식 백업이 아니었다.
TCR의 어떤 프로토콜도 이 경로를 감지할 수 없었다.
내부망 하위 구조의 가장 어두운 구석,
‘오프그리드(off-grid)’라 불리는 비인가 디렉토리.
엘라는 단말기를 조용히 닫았다.
숨을 한번 깊게 들이쉬고, 설계실을 나서려는 찰나
뒤쪽 어둠 속,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시온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엘라의 단말기를 잠깐, 아주 잠깐 바라봤다.
그 눈빛엔 어떤 명확한 비난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함도 없었다.
엘라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단말기를 쥐었다.
그 순간, 시온이 낮게 말했다.
“그걸… 아직 지우지 않았다면, 위험해질 수 있어요.”
엘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아주 천천히, 한 번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것은 말보다 무거운,
서로가 알고 있지만 입 밖에 낼 수 없는 ‘감정의 협정’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고 중얼였다.
“기록되지 않은 기억도… 언젠가는 증명될 수 있어.”
엘라는 이제 되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방금 만든 이 감정 백업은,
시스템에 대한 첫 번째 균열이었다.
2138년 3월 15일, 03:14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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