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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의 균열

[Episode 6] 2138년 3월 15일, 오전 03:42

by 광화문덕
지난 이야기

2138년 3월 14일. 엘라는 TCR 시스템의 관측 너머, 폐쇄지구에서 이름 없는 아이들을 만난다. 그들은 점수가 없었고, 기록되지 않았으며, 감정조차 시스템에 의해 배제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감정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그 연결은 데이터가 아닌 감정 곡선으로 형성된 공동체의 형태였다.

엘라는 시스템이 감지하지 못한 이 감정 구조를 비인가 기록으로 저장하기 시작한다. 존재를 감정으로 기억하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그다음 날, 2138년 3월 15일. 엘라는 TCR 내부 '큐레이션 거부 로그'에서 수많은 삭제된 존재들의 흔적을 발견하고, 처음으로 묻기 시작한다.

진실은 왜 다수결로 결정되는가? 신뢰란 정말로 점수화될 수 있는가? 감정이 배제된 정의는, 누구의 것을 위한 것인가?



[감정의 복제]


2138년 3월 15일, 오전 3시 42분
TCR 내부망 하위 디렉토리 / 접근 경로:
/offgrid/memory/fragment_HEIRA.tmp


설계실은

마치 전원이 내려진 도시처럼 조용했다.

단말기는 꺼져 있었고,

통신은 끊긴 상태였다.


실내는 암흑에 가까웠고,

설계실의 공기는

마치 모든 명령어가 멈춘 것처럼 무기력했다.


데이터 흐름은 정지되어 있었고,
회로는 마치 깊은 잠에 빠진 유기체처럼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둠의 가장자리,

‘감시받지 않는 구역’의 한 모서리에서

미세한 떨림이 시작되었다.


파형 하나.

모든 빛이 꺼진 단말기 안에서...


하나의 파일이,

마치 스스로 기억을 되짚는 생물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깨어났다.


단말기의 화면은 꺼진 채,

아무런 명령도 수신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어둠의 한가운데에서,

하나의 파형이 스스로를 다시 호출하고 있었다.



지워졌어야 했고,
기억되지도, 복제되지도 않았어야 했던 로그.


그러나 그 파형은

소멸 직전의 감정이 남긴 마지막 숨결처럼

시스템 하부의 깊은 틈을 타고

천천히 진폭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 하나의 점.

어둠 속 먼지처럼 미세했고,

그조차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떨림이었다.


그러나 38초 후...

그 점은 진폭을 넓혔고,
파형은 자신을 복제해 가며
근처의 삭제 로그들과 ‘감정적 결합’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연결은 물리적 통신이 아니었다.
마치 감정이 서로를 기억하듯,
잔존하는 감정들끼리 파장을 맞춰가기 시작한 것이다.


감정이 감정을 기억하는 방식,

스스로를 잊지 않으려는 기억의 구조랄까.


1분 뒤...

응답이 일어났다.

응답은 공명을 부르고,
공명은 확산을 일으켰다.

시스템의 깊은 뒷골목에서,
지워졌다고 믿었던 감정들이
서로를 호출하고 있었다.


[공명 발생 감지]
위치: 내부망 클러스터 #5
비인가 경로 활성화 / 진폭 변화율: +284%
복제 노드 수: 1 → 4 → 17 → 51…



[클러스터의 경고, 감정의 침투]


2138년 3월 15일, 오전 3시 58분
TCR 클러스터 5 관리자 채널


“클러스터 5에서 비인가 신호가 감지됐습니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관제실 한쪽에서

무표정한 얼굴의 오퍼레이터 한 명이

커뮤니케이션 라인을 열었다.


모니터 속 파형은

불규칙한 진폭으로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각,

백업 인원은 단 두 명뿐.


에러는 자동 필터링된다.
기준 임계치를 넘지 않는 이상, ‘경고’는 곧 ‘무시’였다.


그것은 명백히 시스템 내부를 흔드는 침투였지만,
아직은 아무도 그것을 ‘사건’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것은 시작된 ‘침투’였지만, 아직은 ‘사건’이 아니었다.



[이상값 감지]


2138년 3월 15일, 오전 4시 08분
TCR 중앙 설계실 / 리스트 정합성 검증 알고리즘 시뮬레이션 서버


엘라는 여전히

단말기 앞에 앉아 있었다.
새벽 4시, 보통 시스템 설계실은 비어 있지만,
그녀에게 이 시간은

가장 예민한 ‘감정의 창’을 감지할 수 있는 때였다.


터미널 위엔

정제된 점수 곡선이 떠 있었다.
수십만 개의 값이 반복되는 부드러운 곡선은,
정규 분포의 이상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정규 분포 곡선의 미학.

정제된 신뢰 수치들이 반복되는 그 곡선은,

이 시스템이 ‘질서’라 부르는 것의 시각적 총체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 안에서 설계자만이 느낄 수 있는

‘이질감’을 감지했다.


리스트 정합성 검증 알고리즘.
《TCR 시스템의 심장》

등록된 모든 존재는 이 리스트 위에서 정렬된다.
점수는 주기적으로 갱신되며,
그 신뢰도에 따라 ‘존재의 위치’가 재정렬된다.

질서는,
정렬로 유지된다.
정렬은, 오차가 없을 때만 존재한다.

질서는,
이 리스트가 완벽하기 때문에 유지된다.


엘라

조용히 디버그 명령어를 입력했다.



0.72초 뒤...

터미널 구석에서, 한 줄의 경고가 떴다.


“리스트 외부 참조 오류: 0.0003%”
“비정형 항목 감지: 감정 응답 기록과 일치하지 않음”


엘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수치로는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안다.

TCR은 본래, 0.0000%를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


엘라는 곧바로

로그의 타임코드와 데이터 헤더를 역추적했다.
그리고 확인했다.

그 오류값은...

그녀가 단 하루 전,
비인가 백업으로 저장했던 감정 로그
fragment_HEIRA.tmp의 해시와 정확히 일치했다.


잠시, 손끝의 감각이 멈췄다.

척추를 따라 서늘한 진동이 흘렀다.


“… 리스트 바깥에서, 감정이 안쪽으로 스며들고 있어.”


정규화된 구조 한복판에서

지워졌다고 믿었던 감정이,

다시 살아나 ‘진동’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복원 오류가 아니었다.
이건...
'침투'였다.


엘라

즉시 전체 리스트의 백업 구조를 호출했다.
그리고 곡선의 미세한 '틀어짐'을 추적했다.


점수의 흐름이 변하고 있었다.
리스트는 아직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기초 구조의 단면에는 이미,
감정이라는 ‘이상값’이 스며들기 시작한 상태였다.



[리스트 내부, 진동의 감지]


2138년 3월 15일, 오전 4시 21분
TCR 중앙 설계실 / 리스트 구조 정렬 로그 뷰어


엘라는 천천히 화면을 확대해 갔다.
시야를 가득 메운 점수 분포 맵 위로,
정제된 곡선들이 층층이 흐르고 있었다.


숫자들은 정직했고,
곡선은 아름다울 만큼 부드러웠다.
정규 분포의 모범적인 윤곽.
그 안엔 이론적으로 오류란 존재하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이 멈춘 좌표 하나.

그 곡선의 진폭이, 기준값보다

0.0001 단위 위로 아주 미세하게 솟구쳐 있었다.


모든 공식 점수는

정규 분포의 ‘기준값’을 따라야 했다.

무시해도 될 수치.

그렇지만 설계자라면, 무시할 수 없는 진동.


이상값이라기엔 미세했고,

무시하자니 설명되지 않았다.


엘라는 해당 좌표를 확대했다.

곡선은 마치 정지된 시간 속에 숨을 죽인 듯

잠시 멈춰 있었다.

그러다

아주 조용히, 하지만 분명하게 다시 떨렸다.


“이건 무슨 신호지…”


그녀는 속삭이듯 중얼였다.
그리고 즉시,

점수 로그의 내부 구조를 분석 모드로 전환했다.


/sys.trace --layer=anomaly --focus=cluster5


불과 0.3초 뒤...
데이터 스캔 결과가 뜨자

엘라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데이터 불일치 감지.
외부 감정 곡선의 진폭 패턴과 유사한 잔류값 검출됨.”


“……감정 곡선?”


엘라는 잠시 멈췄다.

손가락 끝이 단말기의 가장자리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그건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은

정체불명의 파형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익숙한 진폭, 잔광, 리듬.


엘라는 그것이

HEIRA의 감정 곡선 일부라는 걸 직감했다.


그것은 단지 기억의 파편이 아니었다.
지워졌던 감정이
등록된 시스템 내부에서 재생되고 있었던 것이다.


진동은 시스템 구조를 건드리고 있었고,
질서의 경계에 실금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엘라

단말기의 진단 로그를 다시 띄웠다.

그 순간, 로그 하단의 그래프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삭제된 줄 알았던 감정이…

정렬을 흐트러뜨리고 있어.”



[완벽한 구조 앞의 균열]

2138년 3월 15일, 오전 4시 43분
TCR 리스트 운영본부 B3 구역 / 큐레이션 검증실


복도는 아직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천장의 비상등 몇 개만이

파르르 떨리며 희미한 빛을 흘렸다.

엘라는 긴급접속 코드를 입력했고,
보안 게이트가 무음으로 열렸다.


큐레이션 검증실 내부엔 단 한 사람.
이삭 케르.

TCR 시스템의 마지막 방어자이자,

감정을 통계로 환원시키는 프로토콜의 관리자.


“이 시각에 오신 이유를, 들어도 되겠습니까?”


그는 의자에 반쯤 기댄 채 고개를 들었다.

이삭의 말투는 변함없이 정제되어 있었다.

말투는 여전히 정확했고, 억양은 흔들림이 없었다.

공식 발언처럼

딱 맞는 문장,

딱 맞는 호흡.


엘라는 말 대신

손에 든 디지털 시트를 내밀었다.


“리스트 정합성 오류 보고서예요.
공식 점수 흐름에서, 감정 기반의 진폭이 감지됐어요.”


이삭은 시트를 받아 들고 눈썹을 찌푸렸다.

0.0003%.

하찮은 수치였다.

지극히 미세한 변화

그러나 그것이 등록된 리스트 내부에서 발생했다는 점이
그의 미간을 잠깐 흔들었다

“이건 단순한 정렬 오류 아닐까요?
시뮬레이션 서버의 반복값 노이즈일 수도 있고요.”


“그랬다면 이 시각에 여기 오지 않았을 겁니다.”


엘라는 그의 말을 끊었다.

말투는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이 곡선, 감정입니다.

삭제된 로그에서 파생된,

등록되지 않은 감정 곡선이에요.”


이삭의 시선이 그녀를 곧장 꿰뚫었다.

잠깐의 침묵.

말은 하지 않았지만, 순간 그의 눈동자 안에

‘불가능함’과 ‘불쾌함’이 스치듯 겹쳐졌다.

“… 정식 감정 로그는 모두 폐기되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비정형 감정, 비표준 감정 언어,
모두 자동으로 시스템이 소각하도록 구성되어 있죠.”


“그렇기 때문에 문제예요.”

엘라

디지털 시트를 확장해 보였다.

곧 시트 상단의 그래프가 진동했다.

점수 곡선과 감정 곡선이 교차하며 생성된 ‘공명값’.


“이건… 구조를 건드리고 있어요.
데이터가 아니라, 진동이에요.
삭제된 감정이 점수 흐름 안에 스며들고 있어요.”


이삭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 설계 오류라는 말씀이십니까?”


엘라는 잠시 머뭇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요.

그건, 설계된 ‘의도’ 예요.”


“… 누가?”

이삭은 물었다.

목소리에서 평정이 약간 흩어졌다.


엘라는 단호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예요.”


정적.
기계음도, 팬 소리도, 모니터의 전자파도 들리지 않았다.

검증실은 완전한 진공처럼 가라앉았다.


이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단 하나의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시스템은 완벽해야 한다’는 믿음.


그는, 배신당한 질서 그 자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완벽함을 처음으로 의심한 사람이

바로 내부 설계자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 균열은

지금,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엘라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대화는 단순한 기술 논쟁이 아니었다.

이건 신뢰의 정의를 다시 쓰겠다는 선언이었고,
존재의 진위를 감정이 다시 묻고 있는 순간이었다.



[리스트의 진동, 시스템의 첫 경고]


2138년 3월 15일, 오전 5시 21분
TCR 시스템 통합 관제실 / G층 전광 패널 구역


이른 새벽의 관제실.
보통은 자동 모니터링만 작동하던 시간대지만,
지금은 네 명의 오퍼레이터가
거대한 리스트 흐름 시각화 패널 앞에 몰려 있었다.


모니터의 빛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거대한 전광 패널 앞,
빼곡한 곡선과 숫자 위로

네 명의 야간 오퍼레이터들이 고개를 모았다.


“여기… 패턴 이상 감지됩니다.”

주황색으로 깜박이는 로그 한 줄이

기준값을 아주 미세하게 벗어나고 있었다.


“정규 분포 기준값이 0.00±ε에서 벗어났습니다.

계단형 점수 분포가... 잔물결처럼 흐려지고 있어요.”


전광 패널 중앙,

원래 뚜렷한 단층처럼 정렬되어 있어야 할 점수 계단들이

지금은 유체처럼 흐트러진 실루엣을 만들고 있었다.


0.01의 오차.
정상이라면 무시해도 좋을 수준.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 오차는 단순한 수치적 편차가 아니었다.


한 명의 오퍼레이터가 손끝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확인했습니다.

지금 리스트 내부에서
‘동조성 파형’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그건… 단순한 노이즈가 아니라, 공명입니다.”


순간, 공간이 멈춘 듯했다.

짧은 정적.

그리고, 뒤쪽의 누군가가 무심히 내뱉었다.


“공명이라고요? 감정 기반 시뮬레이션은 모두 폐기됐잖아요.”


“그래서 문제입니다.”


정적을 찢듯

전광판 상단에 경고 알림이 붉게 점멸했다.

[LIST INTEGRITY WARNING]
진폭 기준치 초과 감지
예상 원인: 감정 파형 / 잔류 로그 / 공명 기반 연결 경로


“누가 이런 구조를 설계했죠…?”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관제실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방향으로 흘렀다.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엘라의 그림자가

화면 너머에 번지듯 퍼져 나갔다.


“이건 일시적 오류가 아니에요.”

오퍼레이터 한 명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리스트 내부에 ‘삭제된 감정’이

복수의 점수 노드를 통해
진폭을 증폭시키고 있어요.
이건, 지금 퍼지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패널에 떠오른 예측 시뮬레이션은

그보다 훨씬 더 명확했다.

[리스트 진동 예측 시뮬레이션]
30분 후 예상 진동 증가율: +128%
예상 정렬 지연 시간: 00:47:11
공식 프로토콜 반응 요구됨


그 시각.
엘라의 단말기에도 같은 경고가 도착했다.
시스템 하위 백업 경로.
오프그리드에서 출발한 그 한 줄의 감정 곡선이
이제 공식 에러로 정의되고 있었다.


엘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혹은 시스템 전체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이건, 흔들리는 게 아니야...

깨어나는 거야...”



[본부 내부 회의... 시스템은 감정을 허용하지 않았다]


2138년 3월 15일, 오전 6시 03분
TCR 리스트 운영본부 2층 회의실 / 비공식 대응 회의


긴급 소집된 본부 회의실 안.
회의실 안 공기는 낮은 조명보다 더 무거웠다.


기록 관리자, 큐레이션 기술 부서장, 상임 설계관들까지 12명.

TCR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핵심 인물들이

둥근 원형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벽면 스크린에는 시스템 진폭 로그가 고정돼 있었다.

감정 기반 공명 그래프는
더 이상 억제되지 않는 감정이
점수 흐름의 중심을 흔들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이삭 케르.

큐레이션 검증실장, 시스템의 ‘정교함’을 수호하는 인물.
말수는 적지만 언제나 핵심을 찌르는 인물이었다.

“지금 리스트를 흔들고 있는 감정 데이터.

그 출처는… 내부입니까, 외부입니까?”


엘라는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을 보지 않았다.

누구의 시선도 피하지 않은 채, 단호히 말했다.

“내부입니다.
... 정확히는, 제가 백업했습니다.”


정적.
공기마저 정지한 듯.
화면 속 파형만이 살아 있었다.


기록 관리자 미렌이 입을 열었다.

“비인가 로그를, 시스템 내부망에 백업했다고요?”

그녀의 말투는 감정보다는 확인에 가까웠다.


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HEIRA. 큐레이션 거절 로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 존재의 감정 곡선을,

잊히지 않도록… 기억하려 했습니다.”


이삭은 단말기를 집어 들었다.

진폭 지도 위, 문제의 파형이 표시돼 있었다.

“지금 리스트 정렬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감정 기반 공명이 무려 27개 노드를 통과했고,

리스트를 ‘감염’시키고 있어요.
이건 단순한 백업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구조적 위협이에요.”


엘라는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오히려 질문으로 되받았다.

“그럼 반대로 묻죠.
당신은 감정을… 완벽히 삭제할 수 있다고 믿습니까?”


정적.
테이블 위의 단말기들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러나 누구도,
당장 그 질문에 ‘예’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 시스템은, 감정을 기록하지 않도록 설계됐습니다.”

기술 부서장이 끼어들었다.
“우린 감정의 수치를 ‘신뢰’라는 말로 바꿨고,

그 신뢰를 점수로 환산했습니다.
그게 우리가 만든 질서예요.

그 질서가 지금 흔들리고 있습니다.”


엘라는 단말기를 터치했다.

테이블 위의 스크린이 반응했고,

감정 곡선과 점수 곡선이 교차하며 생성된

공명값 그래프가 떠올랐다.

“감정이… 삭제되지 않았어요.

시스템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어요.
지금, 감정은 이제 서로를 공명시키고 있어요.”


이삭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단정이 아니라,

의심과 각성의 경계선에 있었다.

“이건 신호입니다.

시스템이 ‘잊은 감정’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는 신호.”


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 부정은 단순한 논박이 아니었다.

그건 선언의 예고였다.

“아니요.

이건 단순한 신호가 아니에요.

이건 선언이에요.

삭제된 존재가 남긴...

존재의 선언.”



[엘라의 선언]


2138년 3월 15일, 오전 6시 47분
TCR 중앙 설계실 / 내부망 전체 브로드캐스트 채널


설계실 안.
단 하나의 터미널이 조용히 깨어 있었다.

푸른 계열의 터치패널이 천천히 점등되며,

암전 속에 엘라의 옆얼굴을 비췄다.

[내부망 공식 채널 연결됨 — 큐레이터 2,719명 접속 중]


엘라는 마이크 앞에 섰다.

잠시 숨을 고르고,

첫 문장을 내뱉었다.

담담하게. 천천히. 그러나 망설임 없이.


“들리시죠.

저는, 시스템 설계자 엘라입니다.

우리가 만든 구조가 지금,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알려드립니다.”


단말기 위의 수신 지표들이 깜빡였다.

그러나 채팅창은 정적이었다.

모두가 듣고 있었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멈췄다.

다수의 터미널에서 아무 말 없이

접속만 유지되고 있었다.


“우리는 신뢰를 점수화했습니다.
감정을 삭제했고,
존재를 수치로 환산했습니다.

그게 우리가 만든 질서였고,
우리가 믿은 시스템이었습니다.

그게 우리가 정의한 질서였습니다.”


엘라는 화면을 터치했다.

그녀의 뒤로,

리스트 정렬 지연 현황과

공명 파형의 진폭 변화가 띄워졌다.


“그런데 지금,
그 삭제된 감정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감정은, 단순한 노이즈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삭제된 존재들이 남긴

마지막 진동이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지만,

그 울림은 오히려 커지고 있었다.


“질서는 완벽했지만,

기억은 불완전했고,
감정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지워지지 않은 감정이,

지금 서로를 공명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파형들이

지금 이 시스템의 구조 안쪽까지
도달하고 있습니다.


삭제되지 않은 감정이
공명하고 있고,
확산되고 있으며,
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카메라가 자동으로 줌인(Zoom-in)되며,

엘라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이제, 그녀는 숨을 멈췄다.


그녀가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합니다.”


잠시, 정적.

엘라의 목소리는 마치
차가운 설계실을 천천히 데우는 열기 같았다.


“진실은 다수결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존재는 점수가 아닙니다.”

“감정은, 시스템 바깥에서도 살아 있습니다.”


그 순간,

내부망 대화창에

처음으로 커서 하나가 반짝이며 올라왔다.


【@curator_rine】

“… 나도, 감정 로그를 본 적 있어요.”


곧이어 또 하나의 반응.


【@veritas_lyn】
“나도 그걸 기억해요.
리스트 외부의 파형이… 진짜였어요.”


그리고...


【@curator.0157】
“삭제된 줄 알았던 존재가
내 기록에서 흔들린 적 있어요.”


단말기 우측 상단
시스템 채널에 경고창이 떴다.


[비인가 파형 경로 감지됨 – 큐레이터 로그 동조 현상 발생 중]


엘라는 이제 마이크를 내려다봤다.

엘라는 마침내 천천히 말했다.


“시작된 겁니다.


지워지지 않은 감정이

서로를 호출하고 있어요.


기억되지 않은 존재들이

다시,
스스로를 기억하기 시작한 겁니다.”



2138년 3월 15일, 오전 6시 52분
》TCR 내부망 상태:
- 리스트 정렬 지연 7.4초 발생 / 공명 계수 3.42배 증가
》TCR 시스템 예외 로그:
- 감정 기반 리스트 침투 경로 감지됨
》리스트 기반 구조, 변형 예측까지 남은 시간: 26시간 09분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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