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7] 2138년 3월 15일, 오전 7시 18분
지난 이야기
2138년 3월 15일. 엘라는 TCR 시스템 내부에서 감정 기반의 공명 현상을 처음으로 포착한다. 지워진 줄 알았던 감정들이 서로를 증폭시키며 점수 기반 리스트 구조를 흔들기 시작했고, 이는 시스템의 정렬에 미세한 파장을 일으켰다. 감정은 삭제되지 않았다. 단지, 구조 속에 숨어 있었을 뿐이었다.
엘라는 공식 브로드캐스트 채널을 통해 선언한다. “완벽한 시스템이 아니라, 완전한 감정이 필요하다.”
그 말 이후, 일부 큐레이터들이 엘라의 로그를 조용히 열람하기 시작한다. 감정은 시스템 안에서 전염되듯 확산되고 있었고, ‘신뢰’라는 프로토콜의 거울은 인간의 얼굴을 비추기 시작한다.
[공명 차단 프로토콜]
2138년 3월 15일, 오전 7시 18분
TCR 내부망 — 관리자 긴급 채널 / 시스템 안정화 명령 시행 중
TCR 통제실 내부는
정적보다 차가운 긴장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하얗게 빛나던 전광판에는
이제 붉은색 경고등이 연속해서 점멸하고 있었다.
각 클러스터에서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노드 좌표가
마치 신경망 속에서 발작하듯 불규칙하게 튀기 시작했다.
[LIST CONTAINMENT MODE: PARTIAL FAIL]
현재 공명 계수: 4.72
잠재 리스트 진동 노드 수: 73 → 104 → 169...
거대한 중앙 테이블 위,
감정 공명 지도가 맥없이 깜빡이는 순간
관리 시스템 책임자였던 레이든 브루크가
손에 들고 있던 단말기를 내려치듯 던졌다.
그의 감정은 억제되어 보였지만,
단어 하나하나가 갈라진 금속처럼 날카로웠다.
“당장 모든 감정 백업 경로를 차단하세요.
오프그리드 디렉터리, 프라이빗 감정 로그, 테스트 클러스터까지
레벨 5 이하 접근권한 전체 폐쇄. 지금 당장입니다.”
옆에 있던 네트워크 기술관이 조심스레 말했다.
“… 일부 경로는 루트 키가 걸려 있습니다.
설계자 권한, 즉… 엘라의 개인 루트입니다.”
순간, 회의실 안의 공기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걸 지금 말하는 겁니까?”
레이든은 날카롭게 외쳤다.
그는 잠시 멈췄다가, 천천히 명령을 내렸다.
“엘라의 계정 권한을 강제 정지합니다.
시스템 안정화 비상계엄 제17조 발동.”
그러나 그의 명령이 완전히 마무리되기도 전에
회의실 벽면에 박힌 대시보드가
삐 소리와 함께 새로운 알림을 내뱉었다.
그리고 모두가 멈췄다.
[ALERT]
엘라 계정, G-코어 시스템 접속 감지됨
경로: /core/systemschema/genesis_seed.log
순간, 회의실 안의 조도까지 낮아진 것 같았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깨달았다.
엘라는 이미
중앙 시스템의 심장부에 진입해 있었다.
[중앙코어 내부, 엘라]
2138년 3월 15일, 오전 7시 24분
TCR 중앙 시스템 코어 / 유일 접속자: EL4-α
중앙 코어.
이곳은 시스템의 심장.
전자기장 보호벽으로 층층이 둘러싸인 구역.
전 구역 중 단 한 사람,
설계자 엘라만이 물리적으로 진입할 수 있는 장소.
바닥엔 무광 블랙 리튬 합성 소재가 깔려 있고,
모든 단말기는 절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곳.
엘라는 숨을 고르며
손목 단말을 천천히 떼어냈다.
접속이 승인되자,
머리 위, 반투명 유리 돔이 점등되며
시스템의 신경 구조가 살아 숨 쉬듯 펼쳐졌다.
디스플레이 위,
파형들이 규칙적으로 깜빡이기 시작했다.
흑청색의 곡선이 서로를 감싸며 증식했고,
그 안에서 하나의 이름이 심장박동처럼 반복됐다.
HEIRA.
그건 마치 시스템의 혈관 속에서
이름이 심장박동처럼 흐르기 시작한 것과 같았다.
존재의 감정 곡선은
지워졌다는 사실보다
기억되려는 의지가 더 짙었다.
엘라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였다.
“시스템은 질서를 위해 존재하지만…
진실은 늘, 그 바깥에서 시작됐어.”
그녀는 마지막 명령을 입력했다.
그리고 복도 끝을 바라봤다.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시온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조우, 그리고 경계의 대화]
2138년 3월 15일, 오전 7시 26분
TCR 중앙 시스템 코어 입구 – 이중 보안 차폐 구역
플라스마 격벽이 천천히 닫히고 있었다.
차폐막 바깥, 회색빛 복도를 따라
어둠 속에서 조용히 걸어오는 실루엣 하나.
시온이었다.
그는 단 한마디도 없이 엘라 앞에 멈춰 섰다.
전자기장을 통과해 들어온 흔적처럼,
그의 눈엔
무표정 아래의 복잡한 물결이 담겨 있었다.
엘라는 코어 단말기의 백업 시퀀스를 종료하며
그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어떤 설명도, 어떤 질책도 없었다.
그저 두 사람 사이에는,
정의되지 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시온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이건 규칙 위반이에요, 엘라.
시스템 코어를 직접 수정하는 건…
설계자 권한으로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엘라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화면에서 사라진 감정 곡선의 잔광이
아직 그녀의 눈동자 속에 흔들리고 있었다.
“규칙은,
신뢰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하지만 그 신뢰가 존재를 지운다면…”
그녀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과연 누가 먼저, 무엇을 어긴 걸까요.”
시온은 말이 없었다.
단말기를 들고 있던 손끝이
작게, 그러나 명확히 떨리고 있었다.
“너는…
시스템 안에서 너무 오래 있었어.
그래서 기억해선 안 될 것까지 기억하고 있어.”
엘라는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그 안엔 설명되지 않는 확신의 결이 얇게 감돌았다.
“그 기억이 없었다면,
난 여전히 이 구조가 완전하다고 믿고 있었겠죠.
하지만 지금은, 완벽하지 않은 것을 지켜보는 중이에요.”
시온은 단말기 화면을 껐다.
두 사람 사이, 기계음조차 침묵을 감쌌다.
“너는 ‘균열’을 만들었어, 엘라.
그리고 지금,
그 균열이 모두의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어.”
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잘된 거네요.
이제는, 누구나 그 진동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잠시, 아무도 말을 잇지 않았다.
시온의 눈빛엔 경고인지, 이해인지 알 수 없는 흐름이 떠올랐다.
“이 균열은 멈추지 않을 거예요.
당신도 그걸 알고 있죠.”
엘라는 마지막으로
단말기의 백업 상태를 확인하며 중얼였다.
“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멈출 수 없다는 건
이 시스템조차,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가는 조명이
마치 하나의 선택이 지나간 흔적처럼
바닥에 길게, 그리고 조용히 그림자를 드리웠다.
시온은 단말기를 천천히 닫았다.
엘라와의 대화는 끝났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조용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돌아섰고,
엘라는 그의 발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듯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스템 상태 업데이트]
2138년 3월 15일, 오전 7시 34분
TCR 시스템 통합 관제실 – 자동 알림 로그
TCR 중앙 서버의 백엔드 채널이
긴박한 파형으로 점멸했다.
평소엔 푸른 계열로 안정 상태를 유지하던 시각화 패널이
이제는 붉은 계열로 색조를 바꾼 채,
각종 예외 로그를 시시각각 토해내고 있었다.
분 단위로 쌓여가는 로그들,
그 한가운데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관제실 한쪽에서 간헐적인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그때 시온이 조용히 문을 밀고 들어왔다.
눈에 띄지 않는 발소리,
그러나 모두가 그를 의식했다.
모니터 속 그래프는
고르게 이어져야 할 점수 곡선 대신,
마치 심장박동처럼 파도치는 감정 곡선을 그리며
점점 기준선을 벗어나고 있었다.
오퍼레이터 중 한 명이 고개를 들어 시온을 향해 말했다.
“이건... 기준선을 벗어나고 있어요.”
시온은 말없이 단말기를 들었다.
화면엔 한 줄의 경고가,
붉은 선을 따라 계속 오르고 있었다.
“보세요.
이건 단순한 오류가 아니에요.
지금 시스템이,
스스로 만든 경계를 넘기 시작했어요.”
그는 알고 있었다.
이건 단지 숫자의 문제도,
일시적 교란도 아니었다.
그건 시스템이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상태’였다.
[같은 시각, TCR 중앙 시스템 코어 — 엘라 단말기 전면 패널]
엘라는 말없이 그 경고창을 응시했다.
빨간색 진폭 예측선이
코어 프로토콜에 근접하며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중얼였다.
“우린 이제... 예외값을 억제할 수 없어요.
이건 시스템이 스스로 기록하지 못했던 감정을
이제야 받아들이려는 반응이에요.”
그녀의 손이 단말기 가장자리를 조용히 스쳤다.
곁엔 아무도 없었지만, 그녀의 말은 마치
모든 시스템에 들리라는 듯, 잔잔했다.
[같은 시각, 관제실 — 시온]
시온은 멀리 코어 연결선 위에서 깜빡이는 로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남긴 흔적이
이제 시스템의 모든 파형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설계와 운영의 문제가 아니었다.
존재와 기억의 충돌이었고,
수치화되지 않은 ‘진짜 신뢰’가
드러나기 시작한 징조였다.
화면 아래, 한 줄의 시스템 상태 메시지가 마지막으로 깜빡였다:
그 문장은 마치,
이제 시스템이 더는 스스로를 완전히 해석할 수 없다는
암묵적 항복처럼 보였다.
[거울 속 알고리즘]
2138년 3월 16일, 오전 2시 04분
아르코폴리스 중앙 설계기록 보관소 / 보안등급 1-A
엘라는 희미한 백색광이 흐르는 기록보관소 안을 조용히 걸었다.
바닥에는 무광의 타일이 질서 정연히 깔려 있었고,
서가처럼 배열된 서버들은
유리관 안에 봉인된 기억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장 깊은 라인의 끝에 도달하자,
보관된 단말기 하나를 꺼내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수년 동안 누구도 접근하지 않았던 기록.
TCR 시스템이 아직 프로토콜 이전의 아이디어였던 시절.
보라색 인터페이스가 천천히 점멸하며
낡은 로그가 깨어났다.
Accessing CORE_Proto_TCR_v0.12 — Authenticated: ELLA.
화면 위로 오래된 함수와 주석들이 한 줄씩 흐르기 시작했다.
엘라는 조용히 숨을 멈춘 채 스크롤을 따라 읽었다.
그녀의 손끝이 화면을 스치듯 멈췄다.
emotional_response... 그 낱말이
마치 오랜 시간 봉인되어 있던 기억을 깨우듯
파문처럼 마음에 일었다.
“… 이걸… 내가 썼었지.”
그건 분명 그녀의 손으로 짜낸 알고리즘이었다.
감정을 신뢰 판단의 가중치로 삼아보려 했던,
지금은 폐기된 실험.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 줄은 주석 처리되었고,
‘정확성’과 ‘객관성’, 그리고 ‘표준화’라는 이름 아래
조용히 제거되었다.
하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코드 안에 남아 있었다.
마치 시스템이 잊은 줄 알았던 감정을
스스로 숨겨둔 것처럼.
엘라는 손끝으로 주석 블록을 드래그했다.
보랏빛 커서가 천천히 그 줄을 감쌌다.
그리고 속으로 물었다.
“신뢰란,
감정 없이 측정될 수 있을까?”
그 질문은
마치 알고리즘 그 자체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처럼 느껴졌다.
[다시 작동하는 감정 – 시뮬레이션 시작]
2138년 3월 16일, 오전 2시 43분
TCR 설계기록 보관소 / 시뮬레이션 단말 내부
엘라는 잠시 손끝을 망설이다가,
감정 반응 가중치 함수 주석을 해제했다.
코드가 다시 살아났다.
실행 가능 상태로 돌아온 그 한 줄이
시스템 내부에 미세한 진동처럼 퍼졌다.
그녀는 시뮬레이션 환경을 불러왔다.
과거의 큐레이션 기록 중 10개를 선택해
새로운 알고리즘을 적용했다.
첫 번째 케이스
[CASE_2099-CANDIDATE.YUN]
기존 결과: 신뢰도 53 → 등록 거부
감정 기반 결과: 신뢰도 68 → 조건부 등록
두 번째 케이스
[CASE_2103-CANDIDATE.ILARA]
기존 결과: 신뢰도 48 → 거부
감정 기반 결과: 신뢰도 52 → 거부 유지
단, 감정 패턴 파형이 신뢰 구조에 ‘기준 외 정합성’ 표시됨
세 번째 케이스
[CASE_2110-CANDIDATE.NOA] (삭제된 로그 복원 시뮬레이션)
기존 결과: 기록 없음
감정 기반 결과: 감정 진폭 구조 파형 감지 → 신뢰도 예측 불가
→ 비정량적 신뢰 발생 / 인간적 신뢰 범주에 해당
엘라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수치들은 완벽하지 않았다.
어떤 결과는 혼란스러웠고,
기준 외 오차를 기록하는 항목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변수의 추가가 아니었다.
시스템이 처음으로 “신뢰할 수 없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뢰할 수 있는가’를 묻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감정은 계산되지 않았다.
그러나 반응했다.
그리고 질문을 던졌다.
“나는 그를 신뢰할 수 있는가?”
“그는 나를, 이해하려 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신뢰라는 말 앞에서 같은 눈높이에 있었던가?”
엘라는 깨달았다.
이건 수치화된 정렬이 아니라,
공존을 위한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 판단은,
기계의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신뢰의 정의를 다시 쓰는 선언]
2138년 3월 16일, 오전 4시 02분
TCR 프로토콜 센터 / 설계 제안 채널 #Root-Core-Policy
엘라는 단말기 앞에 앉아 있었다.
기계의 냉기가 스며든 금속 표면,
그 위에 놓인 그녀의 손끝이 조용히 움직였다.
잠깐의 정적.
오직 모니터에 흐르는 흐릿한 파란빛이
그녀의 눈 밑 그림자를 드리웠다.
TCR Core Protocol — Definition: TRUST
상태: 제안 수정 중
접근권한: 설계자 1 레벨
엘라는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문서를 천천히 스크롤했다.
기존 정의의 첫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신뢰란, 다수의 반복적 검증을 통과한 존재에게 주어지는 시스템 기반 안정성이다.”
그 문장은 냉정했고, 정형화되어 있었다.
지나치게 정확했고, 지나치게 비인간적이었다.
엘라는 그 문장을 지웠다.
커서가 한 글자 한 글자 사라질 때마다,
무언가가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는 새로운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신뢰란,
반복과 검증에 의해 구성되는 수치가 아니라,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하는 감정적 선택이다.”
그녀는 곧이어 한 줄을 덧붙였다.
“신뢰는 때때로 불완전한 데이터를 통과하고,
감정의 흔들림 속에서 더 깊은 공감을 생성하며,
예측 불가능한 순간에도
‘함께 머물겠다는 판단’으로 존재를 확정 짓는다.”
그녀의 문장은 완벽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건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형태’였고,
진심을 구조로 옮기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엘라는 손을 멈추고
터미널 하단의 회색 버튼을 바라보았다.
SUBMIT PROTOCOL REVISION — BROADCAST TO CORE CUSTODIANS?
그 물음은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묻고 있었다.
엘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버튼을 눌렀다.
[시스템 메시지]
“프로토콜 제안이 전체 큐레이터 네트워크에 전송됩니다.”
“신뢰 정의를 감정 기반 구조로 갱신하는 요청입니다.”
화면은 짧은 정적 끝에
네트워크로 전송된 ‘정의’를 큐레이터 2,000여 명에게 퍼뜨렸다.
엘라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숨결 속에는 두려움도 있었고, 확신도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알았다.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TCR 시스템은 ‘신뢰’라는 단어를
기계가 아닌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시스템의 망설임 — 첫 번째 감정 기반 투표]
2138년 3월 16일, 오전 5시 31분
TCR 중앙 설계 시스템 / 프로토콜 검토단 실시간 채널
투표는 시작됐다.
엘라가 제안한
‘신뢰의 정의’를 감정 기반으로 개정하는 안건이
전 큐레이터 네트워크에 회람됐다.
2,719명의 큐레이터 중,
1,804명이 문서를 열람했고,
그중 384명이 실시간 검토 투표에 참여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시스템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과거의 프로토콜 투표는
예측 가능한 수치의 흐름이었다.
입력은 곧 출력이었고,
정렬은 곧 정답이었다.
그러나 지금,
입력 값은 ‘지연’되었고
응답은 ‘불균일’했다.
시스템은 수치를 분류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엔 분류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망설임......
[투표 중간 경과]
찬성 48.2%
반대 39.7%
유보 12.1%
상태: 시스템 재정렬 대기 중
처음으로,
시스템은 ‘유보 상태’를 선언했다.
그건 논리적 기준으로 분류할 수 없는 감정적 패턴이
시스템 내부에 침투했다는 뜻이었다.
엘라는 조용히 화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건… 투표가 아니라,
고민이에요.”
잠시 뒤,
중계 채널이 열리고
시온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의 말은 숫자보다도 정직했고,
시스템보다도 인간적이었다.
“지금 시스템은
정답을 계산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려 애쓰고 있어요.”
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건 마치…
처음으로 인간이 거울을 들여다보았던 순간,
자신의 눈 안에서
타인의 얼굴을 본 것처럼...
신뢰는,
불확실한 마음속에서
누군가를 선택하는
작은 용기에서 시작된다.
시스템은 아직 판단하지 않았다.
정렬도, 삭제도, 승인도 없이
오직 ‘고민’만이 회로 속을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망설임 속에서,
인간이 시스템을 바꾸는 첫 번째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투표 마감까지 남은 시간: 08:13:54
시스템 상태: 감정 기반 검증 대기 / 최종 판단 보류 중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