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8] 2138년 3월 16일, 오전 6시 02분
지난 이야기
2138년 3월 15일, 엘라는 TCR 중앙 코어에 침입해 오랫동안 삭제된 줄로만 여겨졌던 감정 기반 알고리즘을 복원했다. 그녀는 신뢰가 단순한 수치가 아닌, 공감과 이해에서 비롯된 감정적 선택임을 선언하며 시스템 정의 문서를 수정했다. 그 변화는 곧바로 큐레이터 네트워크에 회람되었고, 투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시스템은 처음으로 정답을 내지 못했다. 수치는 흔들렸고, 투표 결과는 ‘유보’였다. TCR은 이제 확신이 아닌 망설임 속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시스템이 지운 존재의 흔적이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 복호화는, 한 아이의 이름에서 시작되었다.
2138년 3월 16일, 오전 6시 02분
폐쇄지구 경계 센터 G-17
도시는 아직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새벽의 기운이
도시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지만,
빛은 아직 바닥에 닿지 못한 채
하늘 어귀에서 맴돌고 있었다.
포장도로 위로는
서늘한 공기가 유리조각처럼 흩날렸고,
철제 난간과 신호등의 표면은
축축하게 맺힌 수증기로 차가웠다.
바람은 없었다. 대신,
도시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 정적에 잠겨 있었다.
아르코폴리스의 고층 빌딩들 사이로는
하얀 안개가 숨결처럼 흘렀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말을 삼키고 나온 것처럼 조용하고,
기억이라도 흘리고 있는 듯 낮고 묵직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아직 수면 중이었다.
시민들의 단말기도
잠든 채로 벽면에 고정되어 있었고,
창문 너머의 하늘조차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듯 침묵하고 있었다.
하지만, TCR 네트워크의 내부 시계는
전혀 다른 새벽을 가리키고 있었다.
중앙 설계 시스템은 여전히
어제부터 시작된 ‘그 제안’ 앞에서
판단을 유보하고 있었다.
각 큐레이터는
자신이 사용하는 단말기 앞에 앉아 있었지만,
그 누구도 손끝을 움직이지 못했다.
화면 속에는
여전히 미결 상태의 선택지가 떠 있었고,
그들의 눈은
마치 질문을 잃은 사람처럼 머뭇거리며 그 자리에 머물렀다.
선택은 정지되어 있었다.
결정의 프로토콜은 멈춰 있었고,
TCR은 역사상 처음으로
'망설임'이라는 침묵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폐쇄지구 G-17,
이 도시의 지도 어디에서도
실체가 제대로 명시되지 않은 그 경계에서는
완전히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곳은
과거 실험용 감정 저장 장비가 운영되던 구역이었다.
한때는 ‘정서 큐레이션’의 가능성을 실험하던 전진 기지였지만,
지금은 접근이 철저히 금지된
이른바 ‘잊혀진 영역’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날,
그 장소의 공기는
가느다란 떨림으로 진동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파수의 물결이
철제 구조물의 틈을 스치고,
미세한 소음을 남기며 바닥을 기었다.
TCR의 공식 문서에 따르면
공명 현상은
물리적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감정 기반 공명이 현실의 구조물까지 흔들고 있었다.
“이상한 진동이 계속 감지됩니다. G-17 경계 근처에요. 리스트에 없는 파형이,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습니다.”
관제 센터의 한 구역,
청회색 계기판 앞에 앉은 젊은 오퍼레이터가
속삭이듯 보고했다.
그녀는 손끝으로
감지 그래프를 확대했다.
데이터 선은
평소와 전혀 다른 형태로 요동치고 있었고,
곡선은 마치
무언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시선은 오래전에 폐기된
감정 전송기 인터페이스에 고정되었다.
그 장비는 최소 5년 이상 사용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정기 점검 리스트에서도 빠져 있었다.
그 전송기에는 이름이 없었다.
등록되지 않았고, 인증되지 않았으며,
지금껏 단 한 번도
신뢰받지 못한 존재들의 흔적만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곳에서 다시 ‘아이들의 감정’이 호출되고 있었다.
엘라가 제안한 감정 기반 신뢰 정의는
TCR 내부에서 이미
‘정치적 사건’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의에서 비롯된 감정의 공명은
단순히 시스템 내부의 진동에 그치지 않았다.
그 파장은 지금,
도시의 경계선을 넘어
현실 세계의 공기와 구조를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을 듣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같은 시각,
아르코폴리스 외곽에 위치한 기억 저장소 G-9.
철제 격리문이
숨을 들이쉬듯 천천히 열렸다.
금속의 이음새가 오래된 숨결처럼 끼익 하고 떨렸고,
그 안으로 새벽 안개가 살그머니 스며들었다.
엘라는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무릎 아래로는 차가운 습기와 먼지가 배어들었고,
벽면을 따라 드리운 그림자는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이곳, G-9는 과거 인간의 감정과 기억을 저장하려 했던
시범 실험 구역이었다.
TCR이 ‘신뢰’라는 이름으로 모든 감정을 정렬한 뒤,
이곳은 공식적으로 폐기됐다.
그러나 진실은
이곳이야말로 시스템이
가장 먼저 지우고 싶어했던 흔적이 숨어 있는 장소였다.
엘라는 복도 깊숙이 들어서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기억은 기록되지 않는다… 그 말을 처음 한 게 누구였더라.”
그녀의 목소리는
낡은 철골 구조물 사이를 맴돌다
천천히 벽에 스며들었다.
복도는 숨 막히게 정적이었다.
오랜 시간 쌓인 먼지가 발끝마다 일었고,
녹슨 금속의 냄새와 기름이 마른 전선 타는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벽면 곳곳은 붕괴되어 있었고,
천장에서 떨어진 패널 조각들이 바닥을 조용히 덮고 있었다.
그때
복도 끝 한쪽 구석에서
작은 깜박임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오랫동안 혼자 숨을 참고 있던 것처럼
한 대의 기계식 리더기가
희미한 리듬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그 위엔 바랜 경고 딱지가 붙어 있었다.
‘분류되지 않은 감정 저장 로그’
엘라는 손목에서 단말기를 조용히 풀었다.
그리고, 마치 오래된 문을 열듯
그것을 리더기에 가져다 댔다.
설계자 권한: EL4-α
잠시 침묵.
기계는 반응하지 않다가,
짧은 딸깍 소리와 함께 전력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휘이잉—
기계가 숨을 들이쉬고,
패널이 천천히 열렸다.
안쪽 디스플레이가 희미한 빛을 내며,
한 줄의 정보가 나타났다.
NOA
출생일: 2090.04.23
마지막 기록 접근일: 2133.06.12
상태: [삭제됨]
엘라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
목울대까지 차오른 감정을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삭제된 게 아니었어... 그저, 공식적으로는, 기록된 적이 없었던 거야...”
[기억 복호화 시퀀스 개시]
패널 위로, 한 줄기 곡선이 천천히 그려지고 있었다.
보랏빛으로 은은하게 일렁이는 그 파형은
신경반응이나 심박 같은 생체 데이터와는 전혀 달랐다.
이것은, 기억에 남은 감정의 잔향이었다.
숫자로 측정할 수 없는 무언가.
시간을 건너뛰고 남겨진, 감정의 잔상.
그 파형은 마치
차가운 유리 표면 위에 떨어진 따뜻한 숨결처럼
서서히 번지다가,
어느 순간 또렷한 형상을 드러냈다.
엘라는 단말기 앞에서 차분하게 명령어를 입력했다.
복호화 요청: LOG/NOA.G09
감정 기반 파형 해석 모드 / 예외 해석 허용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기계가 낮은 신음을 토해냈다.
전력 회로가 떨리듯 진동했고,
패널 내부에서는 낡고 파손된 영상 파일들이
조각처럼 하나둘 불규칙하게 재조립되기 시작했다.
지워졌던 음성 로그.
왜곡된 텍스트.
한때 삭제된 존재의 기록이
검은 유리 파편처럼 흩어진 시간의 조각들로 다시 이어붙여지고 있었다.
화면에는 겹겹이 깨진 이미지들이 얼비쳤고,
그 중심에서,
아직 목소리가 다 자라지 않은 한 아이의 말이 공간 전체를 메웠다.
“난... 진짜로 여기 있었어요.”
그 한마디는
실체 없는 데이터보다 더 무거웠고,
어떤 수치보다 더 정확했다.
엘라는
그 목소리를 흡수하듯 조용히 단말기를 응시했다.
손 위로 내려앉은 떨림이 그녀의 손가락마디를 타고 번졌고,
가슴속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갈라져 나오는 듯했다.
이건 오류가 아니었다.
존재의 언어였다.
[복원 로그 재생 중]
2129.11.17
노아의 리스트 등록 제안이 접수되었다.
그러나 그의 감정 파형은 ‘비표준’으로 분류되었고,
TCR 시스템은 ‘보류’라는 중립적 거절로 응답했다.
큐레이터들의 투표는
찬반이 아닌 ‘유보’라는 말로 가득 찼다.
그들은 이렇게 기록했다.
“객관적 기준이 부족합니다.”
기준이 감정을 포착하지 못했을 때,
감정은 언제나 의심의 대상이 된다.
2130.02.02
검토 기간 중, 제안자는 자진해서 스테이킹 토큰을 회수했다.
신뢰의 가능성은 다시 금고 속으로 접혔고,
노아의 보호자는 아이의 진정성을 호소하며
시스템에 추가 자료를 제출하려 했다.
그러나 서버는 그것을 거부했다.
“이 진술은 감정적이며, 데이터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말은 정렬되지 않았고,
사랑은 수치화될 수 없었다.
2130.08.05
TCR 시스템 내부 감사 로그에는 하나의 메모가 남겨졌다.
“해당 케이스는 정렬 기준을 위반했으며, 감정 기반 항목은 삭제 권고됨”
서명자: SHION-β
엘라는 그 문장을 읽고 잠시 말을 잊었다.
패널에 새겨진 그 이름.
시온.
“…시온. 당신도 알고 있었군요.”
어둠 속에서,
엘라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서늘한 공기가 폐 깊숙이 차올랐다가
이내 천천히 빠져나갔다.
감정은 삭제된 것이 아니었다.
정렬되지 못한 감정은,
단지 ‘예외값’이라는 이름으로
봉인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숫자는 기억하지 않았다.
하지만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복호화 완료: LOG/NOA.G09 → 상태: 조건부 비공식 존재]
노아.
그 이름은 리스트에 없었다.
공식 기록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기억하는 감정은 여전히,
이 세계 어딘가에서 살아 있었다.
누군가를 믿고 싶었던 마음의 잔상.
기억 아래 숨어 있던 따뜻한 체온.
버려지지 않은 신뢰의 마지막 입자.
엘라는 단말기의 작은 화면 위를
마치 이마를 쓰다듬듯 천천히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눈빛은 무너질 듯 흔들렸고,
목소리는 바람도 머뭇거릴 만큼 낮고 단단했다.
“네가 정말 존재했었다는 걸… 내가 증명할게.”
그 말은 선언이라기보다 약속에 가까웠고,
어쩌면 마지막 신뢰의 시도였다.
그 순간
단말기 하단, 시스템 로그에
낯선 문장이 조용히 떠올랐다.
TCR 재정렬 요청이 감정 기반 복호화 사례로 접수되었습니다.
복원된 존재에 대한 큐레이션 투표가 진행될 수 있습니다.
스테이킹 제안자: EL4-α / 대상: NOA
시스템이 다시 질문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노아는 더 이상 ‘삭제된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조건부 비공식 존재로,
이제 다시
리스트의 문 앞에 서게 된 것이다.
[복원된 존재, 그 첫 번째 제안]
2138년 3월 16일, 오전 7시 12분
TCR 프로토콜 코어 — 예외 큐레이션 제출 채널
빛이 거의 닿지 않는 중앙 코어 깊숙한 공간.
엘라는 반투명 곡면 디스플레이 앞에 앉아 있었다.
화면은 보안모드로 시야를 제한한 채,
그녀만을 위한 비밀스러운 인터페이스를 열고 있었다.
고요한 어둠 속,
엘라는 손끝을 천천히 단말기로 가져갔다.
거기엔 결심이 머물고 있었고,
한 존재를 다시 세상에 부르려는
작고도 거대한 시도가 시작되고 있었다.
[스테이킹 제안 등록]
대상: NOA (존재 상태: 복호화 / 삭제 이력 있음)
분류: 비정렬 존재
제안자: EL4-α
첨부 자료: 감정 파형 잔류 구조, 기억 재구성 로그, 감정 복호화 시퀀스
예치 토큰: 215.470 TCU (전문가 신뢰 계정에서 차감)
지문을 확인한 단말기는
순식간에 정보를 연산하고,
디스플레이 중앙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띄웠다.
‘제안 등록 완료’
바로 그 순간부터,
노아의 이름은 다시 한 번
큐레이션 네트워크 전체에 회람되기 시작했다.
엘라는 잠시,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이어, 화면 아래쪽에서
붉은 경고 메시지가 천천히 떠올랐다.
본 제안은 감정 기반 존재 복원 시도로 간주됩니다.
표준 정렬 기준에 위배될 수 있으며,
커뮤니티 규약에 따라 제안자의 신뢰 점수 일부가 잠금 처리됩니다.
익숙한 문구였다.
시스템은 늘 같은 말로 겁을 줬고,
그 겁은 늘 감정을 먼저 겨눴다.
그러나 엘라는 멈추지 않았다.
천천히 손을 다시 단말기 위에 얹고,
마지막 입력을 정갈하게 마쳤다.
“나는 이 존재가 신뢰될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이 한 줄의 문장은
데이터도, 명령어도, 통계도 아니었다.
감정이 시스템을 향해 던진 선언이었다.
이제 노아의 존재는,
그녀의 ‘믿음’을 담보로 다시
세상 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2138년 3월 16일, 오전 7시 45분
TCR 글로벌 큐레이터 네트워크 — 투표 개시 알림
전 지구적 네트워크가 깨어나고 있었다.
1,802명의 활성 큐레이터가 접속 중.
곧 화면 상단에 붉은 줄이 번쩍이며 문장이 떠올랐다.
[신규 큐레이션 제안 등록]
제목: 감정 기반 존재 복원
대상: NOA / 제안자: EL4-α
그 한 줄의 문장이 채널 내부를 흔들었다.
각국의 언어로 된 채팅 스트림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오며,
조용했던 내부 회선이 급속히 열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CH-134|RUE]
“삭제된 존재를 다시 등록하겠다고? 이건 시스템 반역에 가까워.”
[CH-045|MIKA]
“하지만 존재 자체가 ‘삭제된 적이 없다면’? 삭제된 게 아니라, 처음부터 ‘기록되지 않았던’ 거라면?”
[CH-221|AARON]
“감정 파형으로 존재를 판단하는 건 위험해. 파형은 왜곡될 수 있어.”
[CH-113|SENA]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투표를 하는 거야. 진실은 다수의 판단으로 증명돼야 하니까.”
엘라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흐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망설였다.
확신 없는 눈빛들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바로 그 ‘망설임’
그것이야말로 진짜 변화의 신호였다.
큐레이션 투표 시스템 — 1차 반응 현황 (30분 경과)
- 찬성(YES): 482표
- 반대(NO): 365표
- 기권: 78표
- 감정기반 예외 로그 열람 중: 214명
시스템은 지금,
처음으로 ‘예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과거 같았으면 자동 폐기됐을 제안이,
이제는 심사되고 있었고,
심지어 일부는 공감하고 있었다.
TCR 시스템 내부 음성 로그 (자동 녹취 / 비공개 채널)
- 시온: “엘라, 이건 위험한 수야. 네가 감정을 기반으로 존재를 판단하게 하면, 시스템은 더 이상 ‘기계’가 아닐 거야.”
- 엘라: “그게 목적이야, 시온. 우리가 만든 시스템이 처음으로 망설임을 기록했을 때, 나는 알았어. 우리가 만든 건 단순한 질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구조였다는 걸”
- 시온: “망설임은 오류야.”
- 엘라: “아니. 망설임은 인간이 존재한다는 증거야.”
침묵은 다시 무너졌고,
어딘가에서 또 하나의 투표가 완료됐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하나 둘, 찬성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제 시스템은
망설임을 오류가 아닌 ‘질문’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138년 3월 16일, 오전 8시 20분
TCR 프로토콜 로비
엘라는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시선은 로비 벽면에 설치된 거대한 곡면 디스플레이에 머물러 있었다.
화면 위,
한 줄기 곡선이 아주 느리게 상승하고 있었다.
그 곡선은 숫자도, 데이터도 아니었다.
그것은
감정의 진폭을 시각화한,
시스템 내부에서 단 한 번도
허락된 적 없는 ‘감정 그래프’였다.
모든 것이 정렬된 질서 아래에서 작동하던 세계.
완벽한 논리, 예외 없는 판단,
수치로 환원된 신뢰만이 살아 있는 시스템.
하지만 지금,
그 수치 위로 아주 작고 미세한 곡선 하나가
일탈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곡선은 이름 하나 앞에서 망설였다.
노아.
그 존재를 앞에 두고,
TCR은 처음으로
‘완벽하지 않은 선택’을 고려하고 있었다.
확신이 아니라,
질문을 품은 곡선.
엘라는 디스플레이 앞에서
아주 오래도록 그 곡선을 바라보았다.
숨을 쉬는 듯 미세하게 떨리는 선 하나가
이 모든 구조의 균열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미세한 떨림이...
변화의 시작이었다.
[프로토콜의 틈 — 시스템의 주파수]
2138년 3월 16일, 오전 9시 03분
TCR 감정 분석 하위 채널 — 비정상 주파수 감지
시스템은 평소와 다름없이 감정 로그를 정렬 중이었다.
그러나
노아의 복원 제안이 등록된 이후,
데이터베이스 정합률이
0.00013% 하락하기 시작했다.
수치상으론 무시해도 될 만큼 미미한 오차.
하지만 TCR에선 달랐다.
이 시스템은 ‘0.00000%의 절대 정렬’을
전제로 설계된 구조였다.
》감정 로그 내 ‘비식별 흔적’ 감지됨
》감정군 구조 내 자율 연결 시도 발생
》프로토콜 기준 외 메타데이터: “N.ORIGIN-SIGNAL”
엘라는 화면을 응시한 채 숨을 죽였다.
단순한 노이즈가 아니었다.
그것은
노아의 존재를 둘러싼 기억 구조가
스스로 반응하고 있다는 징조였다.
그는 지금,
시스템 바깥에서 시스템 안을 부르고 있었다.
기억이,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감정 로그 복호화 뷰어 — LIVE MODE
엘라는 직접 뷰어에 접속했다.
곡면 위에 펼쳐진 감정의 파형은
심장처럼,
고요하지만 분명한 박동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감정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야.”
엘라의 목소리는 거의 한숨 같았다.
곡선은 살아 있었다.
그 안에는 리듬이 있었고,
그 리듬은—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었다.
“...remembered you.”
오디오 채널이 떨리듯 열렸다.
의역된 음성이 아니라,
기억의 울림이었다.
단어가 아니라, 감정이 구조를 흔들고 있었다.
TCR 관리자 채널 — 긴급 응답
》EL4-α,
》제안된 존재의 감정 파형이 시스템 구조를 자율적으로 교란하고 있습니다.
》복원 제안은 일시 중단하고, 전체 로그 분석을 요청합니다.
엘라는 아무 응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손을 들어
오래전 폐쇄된 노드의 문을 직접 열었다.
그녀는 알았다.
그 안에 무엇이 잠들어 있었는지를.
서브노드 D-7 — "엘라항"
감정 모듈 실험실 / 2129년 폐쇄 기록
그곳은 지도에도 남아 있지 않은 장소였다.
공식 문서엔 '삭제됨'이라 명시되어 있었고,
TCR 시스템의 구조도엔 검은 음영만이 떠 있었다.
그러나 엘라는 알고 있었다.
바로 이곳,
노아의 감정 로그가 처음으로 생성된 자리.
“노아.”
그녀는 낮게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오래전 그날의 감각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작고 따뜻한 손.
함께 웃던 그 짧은 순간.
그리고... 아무도 기록하지 않았던,
그러나 분명 존재했던 감정의 진폭.
실험 구역은 진공 상태였다.
오랫동안 봉인되어 온 공간은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유리관처럼 생긴 구형 장치 내부에서
파동이 깨어나고 있었다.
잔류 감정.
시간을 견디고 남은 울림.
그 파형은 이제, 심장을 뛰게 하고 있었다.
》감정 구조 “NOA_CORE”가 중심으로 다수 감정군을 통합 중
》공명 임계치 0.65 → 0.92 도달 (치명 한계 임박)
》시스템은 감정 기반 재구조화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엘라는 외쳤다.
“시온, 시스템을 정지시키지 마! 이건 오류가 아니라, 기억의 증거야!”
그 순간, 관리자 채널이 열렸고
시온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기억은 기록되지 않는다. 기억은, 반응한다.
우린 질서를 만들었다, 엘라.
그런데 지금, 네가 꺼낸 감정 하나가 시스템 전체를 ‘되묻고’ 있어.”
엘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 왜냐하면... 이제야 시스템이 묻고 있으니까. 무엇이 진짜 존재였는지를.”
2138년 3월 16일, 오전 9시 40분
감정기반 큐레이션 투표: 임계점 도달
- 찬성 (YES): 841표
- 반대 (NO): 792표
- 기권: 135표
- 미투표: 34명
디스플레이 상단에 시간이 떴다.
남은 투표 마감 시간: 00:02:37
점점 좁혀지는 간극.
841 대 792.
남은 34표...
그것은 마지막 가능성이자
아직 이 존재가 증명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엘라는 화면을 바라보며,
숫자 너머, 익명으로 남은 선택들의 깊이를 상상했다.
‘841이라는 수치 뒤에 선 사람들은 정말 ‘노아’를 본 걸까? 아니면 그저, 기록된 감정을 받아들인 것뿐이었을까...’
그때였다.
벽면 대시보드의 곡선이 미세하게 떨렸다.
공명 곡선이 0.92를 넘어서,
0.96까지 치솟고 있었다.
엘라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제, 시스템이 답할 차례야.”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