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 스펙은 쌓였는데, 꿈은 흐릿합니다

흐릿해진 건, 다시 또렷해질 기회를 기다리는 것일까

by 광화문덕

윤태석은 매일 아침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오늘은, 내가 원하는 하루를 살아보자.’


하지만 침대에서 일어나 양복을 걸치는 순간,
그 다짐은 늘 뒷전이 된다.
그가 원하는 하루는 이미 어디선가 짜인 스케줄 속에
조용히 자리를 내준다.


외제차 시동을 걸고,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와
강남의 회색 건물 숲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운전대 너머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
늘 보던 풍경인데도 요즘은 왠지 낯설다.
오히려 현실감이 멀어진 느낌.


그는 대기업의 브랜드 전략실 상무다.
명함의 글씨는 단정하고 반듯하다.
회의실에서 그의 말은 묵직했고,
사람들은 그의 고개 끄덕임에 맞춰 움직인다.


젊은 팀장들은 그를 롤모델이라 부른다.
그의 프레젠테이션은 사내 교육 자료가 된다.
‘잘 된 인생’의 표본처럼 보이고,
실제로도 그런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도
어딘가가 텅 비어 있다.


“상무님, 점심 식사하실까요?”


비서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식욕은 없다.
가끔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회의는 잘 끝나고,
성과도 나쁘지 않으며,
조직은 안정적이고,
연봉은 늘 상위 1%다.


하지만 이상하게
기분 좋은 날이 별로 없다.


퇴근길,
문득 예전 폴더 속 파일 하나가 떠오른다.


‘윤태석_자기소개서(2004).doc’


그 안엔 이런 문장들이 남아 있다.


“사람들의 일상을 바꾸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습니다.”
“시장의 흐름이 아닌, 사람의 감정을 먼저 읽는 기획자가 되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책을 한 권 써보고 싶습니다.”


허공에다 한숨처럼 짧게 웃음이 새어 나온다.


‘아, 이런 말도 했었지.
참 뜨거웠던 사람이었는데, 나도.’


지금의 나는
사람의 감정이 아니라
경영진의 KPI를 먼저 읽고 있고,
브랜드가 아니라
조직의 질서를 관리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이제는 브랜드보다 ‘이사회’에 충성하고,
감정보다 ‘위기관리’에 익숙해졌다.


저녁,
혼자 강남 골목의 오래된 라면집에 들어간다.
20년 전, 야근 뒤에
지후, 희영과 함께 다니던 곳.


면발은 여전히 얇고,
김은 찢어져 있고,
단무지는 조용히 옆에 놓여 있다.


태석은 젓가락을 든 채
조용히 라면을 바라본다.


‘스펙은 참 많이 쌓았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꿈이 흐릿해진 걸까.’


퇴근길,
휴대폰에 알림 하나가 떴다.


“프레임 커피에서 이번 주말, 옛 광고팀 모임 합니다.
오랜만에 얼굴 좀 봐요.”


강지후,
정희영,
그리고 낯익은 이모티콘.


태석은 한참을 그 알림을 바라보다
화면을 껐다가
다시 켠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디선가
아주 미세하게
무언가 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지금은 흐릿하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야.’


스펙은 숫자처럼 쌓이지만
꿈은 자주 잊히고,
때때로 돌아온다.
흐릿해진 건, 끝난 게 아니라
다시 또렷해질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