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 그래도 꿈이 남았다면

삶은 어느 순간 화려한 선택이 아니라, 존재를 유지하는 일이 된다

by 광화문덕

카페는 낯익으면서도 어쩐지 낯설었다.
문을 열자 퍼지는 커피 향,
테이블 위 노트북과 이어폰,
각자만의 대화가 흐르는 낮은 웅성거림.
그 풍경이 오래전 내 일상이었던 시절을 조용히 불러낸다.


Moonduk 커피’.

지하철 2호선 근처, 강남에 다닐 때 자주 들르던 작은 카페.
누군가는 이곳에서 퇴근 전 마지막 PT를 정리하고,
누군가는 당 충전을 위해 야근을 견뎠다.
나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회의와 꿈 사이를 오가곤 했다.


문 너머로 실루엣 하나가 들어오고,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였다.
정희영.


머리가 조금 짧아졌고,
화장기 없는 얼굴은 담백했다.
조금은 수척해 보였지만,
여전히 눈빛만은 선명했다.


그녀도 나를 발견했다.


“…지후 선배?”


마치 어제도 함께 퇴근했던 사람들처럼
우리는 자연스럽게 같은 자리에 앉았다.
희영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나는 식은 아이스커피를 다시 저었다.


“오랜만이네요. 10년은 된 것 같아요.”


“그쵸.
희영 씨 결혼하고, 회사도 옮기고…
나는 퇴사하고.
그 뒤로는 각자 살아내느라 바빴죠.”


서로를 바라보며 우리는 웃었다.
그 웃음엔 무거운 시간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지만,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되는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


“지후 선배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잠시 망설였지만, 숨기고 싶지 않았다.


“백수예요. 3개월째.
면접도 몇 번 봤고, 떨어졌고…
아이 학원비는 줄지 않고요.”


희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요.
10년 만에 다시 사회로 나왔는데,
예전만큼 말도 잘 안 나오고,
능력도 자신이 없어요.
면접장에 가면 저보다 어린 친구들이 면접관이더라고요.”


그 순간,
우리 사이엔 묘한 웃음이 흘렀다.
비극도 아니고 희극도 아니고,
그저 ‘서로 너무 잘 알아서’ 나오는 안도의 웃음.


“희영 씨는… 아직도 글 써요?”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예전, 그녀는 광고 문구를 참 잘 썼다.
단 한 줄로 마음을 건드리는 감각이 누구보다 예리했다.


“가끔요.
육아 일기처럼.
밤에 아이들 재우고 혼자 쓰는 정도예요.”


“그거… 계속 써요.
그게 어쩌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첫 단서일지도 몰라요.”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꿈이 남아 있긴 하네요.”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맞아요.
그게 우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예요.
사라지지 않은 꿈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 접속 중이라는 뜻이니까요.”


그 순간,
창밖으로 햇살 한 줄기가 스르르 흘러들었다.
낮은 테이블 위로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두 사람의 커피잔이 조용히 마주했다.


“지후 선배는,
지금 다시 뭘 하고 싶으세요?”


나는 대답 대신
작게, 그리고 진심으로 웃었다.


“모르겠어요.
근데… 뭔가 다시 해보고 싶긴 해요.
막막하지만,
그래도 꿈이 남았거든요.”


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조금 더 이어졌다.
마흔의 인생은 특별할 것 없다고 하지만,
이런 순간 하나로
다시 내일을 살아볼 용기가 조금 생긴다.


삶은 어느 순간
화려한 선택이 아니라,
조용히 무너지지 않는 용기로
존재를 유지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직 꺼지지 않은 무언가를
다시 손에 쥐는 일.


그게 지금,
우리 마흔의 방식이었다.


“막막해도 괜찮다.
그래도 꿈이 남아 있다면,
우리에게는 아직… 다음 장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