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방향은 몰라도, 발끝의 위치 정도는 분명해지는 순간
프레임 커피 2층, 오후 네 시.
햇살은 유리창 너머로 느리게 기울고,
카페 안은 오랜 시간 멈춘 듯이 조용했다.
사람들은 각자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누군가는 노트북을 두드리고,
또 누군가는 조용히 책장을 넘긴다.
그 익숙한 일상 속,
지후와 희영, 태석이 오랜만에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었다.
20년 전,
함께 야근을 하고, 함께 퇴근하던 그 시절의 그들처럼.
하지만 서로의 얼굴에는
그때는 없던 작은 주름이 깊어졌고,
마음에는 말하지 못한 계절이 한 겹씩 더 얹혀 있었다.
“진짜 오랜만이다.”
지후가 먼저 웃었다.
희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태석은 약간 늦은 미소를 띄웠다.
“그때 우리… 야근 끝나면 여기 와서 밤새 광고 얘기했었지.”
지후가 말하자 희영이 맞장구쳤다.
“아직도 기억나요. 선배가 ‘감성은 수치화할 수 없다’며
아이디어를 마구 지우고 다시 썼던 거.”
태석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 요즘은 내가 투자자 앞에서 제일 많이 해.
‘데이터가 없으면 감정도 설득 안 된다’고.”
셋은 잠시 소리내어 웃었다.
그 웃음은 추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서로 이어져 있다는 안도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근데… 다들 어때?”
지후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마흔 넘으니, 좀… 살만해?”
짧은 침묵.
먼저 희영이 입을 열었다.
“나는…
가끔 거울을 볼 때
내가 내 인생에서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이 키우고, 집안 챙기고…
이제 조금 숨 돌릴 수 있게 됐는데,
막상 내가 뭘 좋아했는지,
뭘 하고 싶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
그녀는 조용히 커피잔을 굴렸다.
태석이 말을 이었다.
“나는 반대야.
겉으론 성공한 거 맞는데…
이제 더는 하고 싶은 게 없어.
욕심도, 꿈도 사라졌지.
그냥 매일 회의하고, 성과 발표하고,
집에 가서 조용히 잠드는 거.”
지후는 두 사람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 얼굴과 목소리에
자신의 표정이 겹쳐졌다.
“근데 있잖아…”
지후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
이렇게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뭔가 살아 있다는 증거 아닐까?”
희영과 태석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자리 그냥 넘겼을 텐데,
이젠 그런 게 더 소중해졌잖아.
사실…
우리 다들 이 만남을
어쩌면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던 거 아냐?”
누구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
그 말에 마음이 움직이는 걸 느꼈다.
“지후야.”
태석이 물었다.
“너, 지금 뭐 하고 싶어?”
지후는 한참 생각하다가
작게 웃었다.
“모르겠어.
근데 뭐라도 다시 해보고 싶어.
그냥, 아침에 눈 떴을 때
‘조금 기대되는 하루’였으면 좋겠어.”
희영도 미소 지었다.
“나도.
내 이름으로 뭐 하나 남기고 싶어.
크든 작든…
‘이건 내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무언가.”
태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그거 하나씩 해보자.
진짜 작아도 좋아.
그냥,
지금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보는 거야.”
그 순간,
오랜만에 무언가 명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인생의 방향은 몰라도,
발끝의 위치 정도는 분명해지는 순간.
그리고 그거면,
막막한 삶 속에서
충분한 첫걸음이었다.
모임이 끝나고
셋은 카페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거, 어디다 써야 할지 모르겠네.”
희영이 웃었다.
“아니야,
언젠가 우리 책 쓰게 되면
이거 표지로 쓰면 되지.”
지후가 말했다.
“그럼 제목은?”
태석이 물었다.
지후가 마지막으로 웃으며 말했다.
“막막하니까,
우리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무언가 다시 해보고 싶다는 마음,
그 자체가
아직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