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낸 날들과 놓쳐버린 순간들과 아직 남아 있는 기대들이...
〈지후〉
아침,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유난히 따뜻하다.
어제보다 더 잘 잔 것도 아닌데, 몸이 조금은 가벼웠다.
휴대폰을 켜니, 희영이 단톡방에 사진을 올려두었다.
“추억 하나 저장 완료.
다음엔 셋 다 뭔가 이뤄놓고 다시 찍자 :)”
지후는 그 사진을 오래 바라봤다.
사진 속 자신은 웃고 있었고,
그 웃음은 진심이었다.
그런 얼굴, 정말 오랜만이었다.
커피를 내리며, 그는 생각했다.
‘42.
그저 숫자인 줄 알았는데,
이 숫자 안에는 내가 미뤄둔 시간도,
피하고 싶었던 결정도,
남들에게 들키기 싫었던 순간들도 다 들어 있었구나.’
나이는 그저 숫자일 뿐이라는 말을,
이제야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다.
아직 진짜 나이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이
쉽게 하는 말이었다는 걸,
지후는 이제서야 깨닫는다.
〈희영〉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거실엔 오랜만에 조용한 여백이 남는다.
희영은 식탁에 앉아 다이어리를 펼치고,
한 페이지에 적어본다.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 매주 한 편 글쓰기
- 자기 이름으로 이메일 하나 만들기
- 립스틱 바르고 거울 보기
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펜을 내려놓는다.
마흔이라는 숫자는
아직 한참 젊으면서도
어딘가 조용히 늙어가는 시간.
아이들 생일은 잊지 않으면서
정작 자신의 생일은 매번 놓쳤던 몇 해.
기념일마다 남편과 아이들을 먼저 챙기고
정작 자기 이름으론 케이크 하나 제대로 사 먹지 못했던 날들.
“마흔이 되니까 알겠더라.
삶이 얼마나 나를 스쳐갔는지.”
하지만 이제는,
그 숫자만큼
조금 더 자신을 기억해보기로 한다.
〈태석〉
이사회 보고를 끝내고
오랜만에 회사 옥상에 올랐다.
신입 시절,
이곳에서 동기들과 야경을 보며
맥주를 나누던 날들이 있었다.
지금은 누구도 이곳에 오지 않는다.
하지만 태석은 안다.
이 건물을 올려다보며
처음 출근하던 날,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를.
이제는 그 높은 층에 익숙해진 대신,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를
종종 잊곤 한다.
나이와 자리는
성공의 지표가 아니라
돌아보지 않으면 금세 사라질
내면의 작은 이정표였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제 찍은 셋의 사진을 다시 열어본다.
“이 나이에도
내가 나를 다시 정의할 수 있다는 게
좀 놀랍고… 조금은 기쁘다.”
세 사람은 각자의 공간에서
똑같은 사진을 바라보며,
각자 다른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서로의 감정이 묘하게 닮아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그게,
‘나이’라는 것의 진짜 본질일지도 모른다.
비슷한 시점,
비슷한 감정을 통과하고 있다는 증거.
“나이는 숫자지만,
그 숫자 안에는
살아낸 날들과
놓쳐버린 순간들과
아직 남아 있는 기대가
모두 묻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