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살던 곳이 그리워 가슴저린 날
'너무 새벽인데...'
일요일 새벽 5시 50분... 어제 밤 잠이 안와 새벽 1시쯤 잠을 청했지만 내 눈은 6시에 떠졌다. 더 잠을 자려고 눈을 감고 있지만 이미 정신은 깨어있다.
일요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봤자 할 게 없다보니 누워 이런저런 공상에 빠진다. 그러다 문득 어릴 적 기억을 하나, 둘 끄집어 내 본다.
지금 내 아이의 나이였을 때의 나의 모습. 6살 이전까지는 서울의 달동네에 살았다. 차들이 오고가는 대로변에서 고개를 들고 쳐다보면 저 멀리 달이 있는 위치쯤 보일까해서 '달동네'라고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은 어릴적 내가 '빠박산'이라고 부르던 산 인근에 있었다. 마당이 있는 작은 집. 마당이라고 하기 보다 넓은 공터에 덩그러니 얼기설기 지은 구색을 맞춘 집 한 채가 덩그러니 있었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기와가 아닌 널판지와 플라스틱이 집 천장에 땜질하듯 놓여있었다. 여름 장마철만 되면 비는 어김없이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6살이던 때에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하셨을 것이다. 역산 해보니 아버지가 34살 정도에 내가 태어났다.
엄마는 10평 남짓한 공간의 양장점을 운영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임대료 이슈는 그대로이긴 하다. 어릴 적 양장점 안에서 여기저기 기어 올라다니다가 다리미에 어깨가 데여 쓰라렸던 추억이 떠오른다.
엄마의 양장점 옆에는 자그마한 시장이 있었는데 시장 입구에서 머지 않은 곳 지하에 내가 다니던 유치원이 있다. 유치원은 선교원에서 운영했다. 유치원이 끝나면 엄마 가게로 향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엄마의 가게에서 추억은 겨울이면 석유난로가 있어서 눈이 매콤했던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난 석유난로를 사랑했다. 엄마는 가래떡과 고구마를 석유난로 위에서 맛있게 구워주셨다. 난 그 맛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가슴이 아프다. 저린다. 더 생각을 해보자. 나이가 더 들면 내 기억이 사라질까 두렵다. 더 기록 해보자.
그 당시에는 주산/암산 학원이 유행이었다. 엄마도 없는 생활비를 쪼개 아빠 몰래 학원에 나를 보내셨다. 6살에 주산을 뜅기며 코딱지를 파먹으며 '짭짤하군'이라고 생각했던 내 모습이 생생하다.
암산은 1급까지 땄다. 엄마가 웃으시는 모습이 좋아서 계속 했던 것 같다.
엄마 가게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는 나를 유혹하는 곳이 많았다. 오락실도 있었고 쫀득이, 아폴로 등 불량식품을 파는 문방구도 있었다.
한참을 가다가 집으로 가는 길에는 드높게 펼쳐진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야 한다. 6살 때 난 볼일이 너무 급한 나머지 집에 가다가 응아를 바지에다 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엉엉 울었다. 그걸 어떻게 처리했고 집에 어떻게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날 충격을 받아서 그부분만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사진을 보면 6살 이전의 나는 빠박산을 벗삼아 자랐다. 빠박산에는 나무가 많지 않았다. 돌이 많아서 빠박산이라고 불렸던 것 같다. 거기에는 오래된 이발소가 있었고 아버지는 한달에 한 번 오래된 이발소에서 머리카락을 깎으셨다.
그 다음해 우리는 달동네에서 조금 내려와 산으로 올라가는 길목 전에 위치한 곳에 집을 구했다. 더이상 산을 타지 않아도 됐다.
7살때에는 형들을 유난히 따랐다. 형들에게는 당시 유행하던 '우뢰매'와 일본에서 만든 지금의 '파워레인저' 같은 장난감이 많이 있었다. 동네 형들에게 난 그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해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오징어 튀김과 동그랑땡을 아주 맛있게 하셨는데, 난 엄마가 그걸 해주시면 한 바구니 들고 나가서 형들과 나눠먹었다. 내가 줄 수 있는 게 그게 최선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 기억은 비교적 또렷하다. 집에서 나와 신호등을 하나 건너고 골목을 따라 가다보면 초등학교, 당시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 뒷문이 나왔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놓여진 곳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앞에는 큰 문방구와 작은 문방구가 있었다. 정문 앞 우측 문방구에는 오락기도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조금만 올라오면 컵떡볶이를 파는 곳이었다.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7살 이후부터 19살인 고등학교 3학년때까지 난 그집에서 쭉 내 청소년시절을 보냈다.
지금은 연락이 끊긴 친구들과의 추억을 끄집어 내어 본다. 우리 집 위로 100미터 쯤 올라가면 100평이 넘는 별장 같은 집에서 살던 '김원준'이란 친구. 같은 반 친구였기도 했고 순수했던 친구였다. 공부도 잘했다. 성품도 좋았다. 자기 것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친구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던 친구. 집이 가까우니 한 번은 그 친구 집에 놀러갔다. 앞서 에피소드에도 언급이 됐던 것 같긴 하다. 그 친구네 집에는 대중가요가 아닌 신기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만약에 김치가 없었더라면 무슨 맛으로 밥을 먹을까~~~ 김치없인 못살아~ 정말 못살아'
김국환의 타타타, 현철, 주현미의 노래만 알던 내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물론 그 집에 초대받고 놀러갔다가 물잔을 깨고 얼굴이 빨개져 도망치듯 나온 일도 있었다. 그 때 원준이의 어머님은 내게 말씀하셨었다.
"어디 다친데는 없니?"라고. 난 혼난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 걱정을 해주시는 원준이의 어머님께 더욱 죄송한 마음이 들어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엄마와 길음시장에 걸어다니는 것을 너무 좋아했다. 2~3킬로미터 이상은 족히 됐을 법한 거리이지만 엄마의 구르마를 끌며 콧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길음 시장은 내게 행복한 장소다. 거기에는 온갖 먹을 것과 이것저것 신기한 상품들이 많았다.
7살때부터 고3때까지 난 엄마와 길음시장을 거닐던 추억이 참 많다. 내가 운동화를 험하게 신는다며 3개월에 한번은 운동화를 사러 가곤 했다. 새신발을 사오면 난 내 머리맡에 두고 자곤했다.
한번은 무언가가 너무 먹고 싶었는데 엄마가 안사주셔서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 앉아 양다리를 굽혔다 폈다 하면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나이가 몇살 때였는지는 모르겠다. 엄마는 날 달래지 않으셨던 것으로 기억하니 아마 자주 그렇게 대책없이 떼를 쓰곤 했나 보다. 그럼에도 엄마는 길음 시장에 나와 동행하셨다. '엄마는 나를 키우시면서 인내가 많이 필요하셨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보니 그 동네에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는데 나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연락하는 친구는 한명뿐이다. 어릴 적 친했던 친구들..... 내겐 이모같았던 통통했던 친구 '김준'...... 음....... 이름마저 희미해져 간다... 이제 마흔을 앞두고 있다보니 그 친구들이 가끔 생각날 때가 많다.
내 어릴 적 기억을 하나하나 꺼낼때마다 너무 애틋하고 가슴 저림이 더 세진다. 하지만 이제 내가 살 던 곳은 찾아가볼 수 없다. 내가 살던 동네는 재개발로 인하여 변한지 오래다.
내가 20살되던 해에 재개발이 승인됐고 우리 가족은 이사했다. 아빠와 엄마의 청춘이 깃들어있던 동네, 나의 청소년기의 추억이 서린 동네는 이제 세상이 없다.
혹시나 하여 다음지도를 실행했다. 로드뷰로 '삼양동'을 검색했다. 내가 살던 미아6동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다행히 초등학교가 있던 동네와 삼양사거리는 추억 속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어릴적 추억을 되새겨 본다.
오늘은 아들에게 아빠가 살던 동네를 구경시켜주러 가야겠다. 너무도 그리운 나의 어릴적 시절이 담겨있는 동네.
'나이가 더 들면 그 동네가 더 그리워지겠지.......?'
'나이가 더 들면 그 동네는 지금의 모습마저 사라지고 없겠지......?'
재개발도 좋지만... 추억할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분명 슬픈 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