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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화문덕 Aug 17. 2018

아빠표 투명한 볶은 김치

요즘 멍할때면 추억의 실타래가 풀린다

아침 출근길 가을냄새를 맡았다. 선선하면서도 깊게 들이마시고 싶은 그런...


안도감이 들었다. 가만히 있어도 가마니에 들어온 것처럼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폭염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기쁨 때문이다.


요즘은 가끔씩 멍해질때가 있다. 그리곤 추억의 실타래가 풀리며 어릴적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중학교 시절 어느날. 방학이었거나 휴일이었던 것 같다. 기억 저 깊은 곳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 올라오는 감 여유로움이 묻어다.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휴일의 오후 같은 그런 풍요로움이 있다. 지금의 삶과는 달리 무언가에 쫓기는 마음은 없다. 


점심 때가 다 된 것 같다. 그날 점심에는 무얼 먹을지 잔뜩 기대하고 있는 내가 안방 TV 앞에 앉아 있다. 당시 우리집에는 거실 같은 개념은 없었다. 상을 안방에 들여다 놓고 온 가족이 식사를 하곤 했다. 온 가족이 한방에서 먹고 자고 했다.


엄마와 아빠는 부엌에 계신다. 시장에서 사온 춘장으로 장소스를 손수 끓이고 계신다. 냄새를 맡아보니 이제 거의 다 된 것 같다. 짜장소스의 짙은 향이 내 식욕을 자극한다. 배가 고파 난 엄마를 연신 불러댔다.


난 엄마, 아빠가 정성껏 만들어주신 짜장에 맛이나 국수를 비벼 먹는 걸 좋아했다. 큼직큼직하게 들어간 고기와 감자를 씹는 것은 밥을 먹을 때 큰 즐거움이었다.


부모님의 정성어린 짜장이 만들어지면 한달 동안 식단은 두 가지다. 짜장밥 또는 짜장면. 부모님의 짜장은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신기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는 방으로 돌아오셨지만 아빠는 아직이다. 아빠는 계속 요리중이시다. 부엌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계신다.


궁금해졌다. 안방에서 부엌으로 통하는 자그마한 쪽문을 살짝 열었다. 가스레인지 화구 위에는 궁중팬으로 불리는 오목한 프라이팬이 올려져있고 그 옆에는 반쯤 비워진 식용유가 놓여있다.


아빠는 무언가를 집중해서 열심히 볶고 계셨다. 달짝지근한 냄새로 미뤄보건데 김치를 볶고 있는 듯했다. 아빠의 장난끼 가득하면서도 포근한 미소가 느껴진다.


"아빠 진지드세요 배고파요"


아빠를 재촉했다. 어릴 적 난 식성이 남달랐다. 중학교 시절 한해 10cm이상 컸으니 그럴만도 했다.


드디어!!! 방 문이 열렸다.


아빠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한 손에는 하얀 접시를 들고 계셨다. 접시 위에는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김치가 놓여 있었다. 식용유를 한 껏 머금은 듯 윤기가 좌르르 흐르다 못해 넘쳤다. 짐작대로 볶은 김치였다.


'김치가 이렇게 투명해질 수 있구나'


볼수록 신기했다. 처음보는 빛깔을 지녔다. 이전에도 본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날 이후에도 본적이 없는 투명한 김치였다.


"자 이제 밥 먹자"


"네 감사히 먹겠습니다"


드디어 아빠가 수저를 드셨다. 짜장밥 한 숱가락을 큼지막하게 떠서 입 안으로 구겨 넣었다. 우걱우걱 씹으니 칼칼하면서도 매콤한 맛이 그리워 김치 한 조각을 입 안에 보탰다.


투명한 김치가 주는 느끼함이란... 정신이 혼미해졌다. 씹을 수록 김치에서 식용유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결국 더이상 김치 먹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나도 어느덧 이제 마흔이 되어간다. 20대와 30대에는 앞만 보고 달렸는데 이제는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내가 잊고 사는 것은 없는지 혹여나 잃어버린 것은 없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져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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