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는 대로 맛보고 싶은 욕구
최근 내겐 하나의 집착이 생겼다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와인만 보이면 발걸음을 멈추고 다가선다. 와인 에티켓(라벨)에 적힌 글자를 뚫어져라 살펴본다.
빈티지(생산연도)와 포도품종, 생산지 등을 얕은 지식이지만 최대한 꼼꼼하게 읽으려 애쓴다. 직접 맛을 볼 수 없으니 '와인 서처'앱을 통해 해당 빈티지 와인의 평점을 확인한다.
사실 한 달에 한 병 마시기에도 지갑 사정은 빠듯하다. 매주 토요일 와인 한병을 경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여의치 않다.
게다가 와인은 알면 알수록 어려운 것 같기도 하다. 무작정 시중에 와인을 마셔보는 것도 무모해보인다. 시중에 파는 와인의 종류가 너무 많고 공부를 하지 않고 와인의 품격을 받아들이기에는 난 한계가 느껴진다.
말백을 고집하다 최근에는 카베르네 쇼비농을 마셔봤다. 아르헨티나 말백 와인을 더 알고 싶어 아르헨티나 말백만 고집하려고 하기도 했고, 프랑스 와인을 공부할 때면 프랑스 와인을 마셔보고 싶다는 갈증을 느끼기도 했다.
어느 와인바
오랜만에 후배들과 만났다. 시끌벅적한 곳에서 25도짜리 소주로 1차를 거하게 하고 2차 자리로 이동하기 위해 장소를 모색하고 있었다.
'알코올이 내 몸에 스며들어서 일까...'
와인이 마시고 싶어졌다. 마침 고개를 드니 2층에 스페인 포차라고 적힌 간판이 있었고 그 옆에는 와인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2차는 스페인 요리에 와인 어때?"
난 말과 동시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후배들도 싫어하지는 않았다.
후배들은 요리에 몰두했지만 난 와인 리스트를 뚫어져라 살폈다.
'하...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겠네...'
와인 리스트에는 칠레 산과 캘리포니아 산 와인으로 꾸려져 있었다. 가격대는 2만원에서 5만원까지였다.
와인 입문자로서 모를 땐 물어보는 게 상책이다.
"사장님 와인 추천 좀 해주시겠어요?"
"여기 캘리포니아 카베르네 쇼비뇽도 괜찮고 칠레 카베르네 쇼비뇽도 가격 대비 괜찮아요"
첫 와인 칠레 카베르네 쇼비뇽은 조금 가벼웠다. 가격은 캘리포니아 산보다 비쌌음에도 말이다. 예전에 마셨던 아르헨티나 말백이 그리웠다.
6명이서 마시니 와인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캘리포니아 카베르네 쇼비농을 마셔보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었다.
가이저 픽 카베르네쇼비농 2014.
괜찮았다. 와인 서처에서는 이 와인에 몇점을 줬을 지 궁금해서 찾아봤다.
87점이구나... 그동안 마셨던 와인이 모두 87점짜리였다. 얼큰하게 취해서 였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날 마셨던 이 와인의 참 좋았다.
다음날
어제 마셨던 캘리포니아 카이저 픽 카베르네 쇼비뇽의 맛이 입가에 계속 맴도는 것 같았다. 맨정신에 제대로 음미하고 싶어 어제 갔던 그 집에 다시 찾아갔다.
와인이 나오자 설렘이 느껴졌다.
'엇 이건 어제 내가 기억하는 맛이 아닌데...'
와인병 주변에 이슬이 몽글몽글 맺혀있었다. 와인잔에도...
이 와인은 와인셀러가 아닌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내놓은 것이라고 짐작이 됐다. 내 경험이 있어서다.
한달 전... 와인에 대해 무지했던 나는 이마트에서 아르헨티나 말벡 2017 빈티지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뒀다. 그리고 토요일 밤이 되길 고대했다.
토요일 밤에 만난 아르헨티나 말벡은 너무도 시고 가벼웠다. 제게 감동을 주었던 아르헨티나 말벡이 아니었다.
그날의 기억이 스쳐갔다. 와인의 온도가 올라가길 기다리며 천천히 마셔야 했다. 와인 잔에 이슬이 맺히지 않을 즈음... 1시간 여를 두고 나니 겨우 어제 내가 기억하려고 했던 와인의 맛에 가까워졌다.
캘리포니아 카베르네쇼비뇽을 맛보며 '괜찮다'라고 느꼈던 설렘은 차디찬 와인의 첫잔으로 인해 실망으로 변했다.
"사장님 오늘 마셨던 카이저 픽은 어제 마셨던 것과 너무 달랐던 것 같아요. 온도가 너무 차갑더라고요"
사장님은 놀란 듯했다.
와인을 제대로 음미하고 싶은 욕망
지난 주말 와인셀러를 샀다.
좁디 좁은 내 방에 설치했다. 이제 나만의 컬렉션을 만들어야 겠다. 주머니 사정으로 비록 8병밖에 못들어가는 작은 셀러지만 그래도 너무 좋다.
바람이 있다면 좋은 빈티지 와인을 셀러에 넣어 두고 좋은 벗이 놀러오면 한 병씩 따서 함께 마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