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악바리 기자로 만들어 준 치욕적인 경험
산업부 기자로 첫 시작
한 달여간의 기본 교육(?)을 마치고 부서가 정해졌다. 산업부였다. 당시 내가 일을 했던 매체는 사회부란 게 없었다. 당연히 사스마리란 개념이 있을 리 없었다.
기본적인 공시 당직 등에 대한 교육만 완료하면 현장에 투입하는 구조였다. 기사 역시 현장에서 발로 뛰면서 배워야 했다.
면접 때 대표와 산업부장이 들어왔던 것도 이 때문인 듯했다. 산업부장이 내게 아낌없는 조언을 해준 것도...
산업부장은 내게 유통업체를 맡겼다. 유통업체라하면 백화점, 대형마트, 홈쇼핑, 제과업체, 음료업체 등이 해당된다. 쉽게 생각하면 소비자 대상으로 사업을 하는 모든 업체가 해당된다. 매체마다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식약청과 소비자원도 포함됐다.
출입기자 등록을 위해 홍보실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출입기자 등록 좀 하려고요.
"아... 네..."
전화기 너머로 퉁명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바빠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기자실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어디에 있나요?"
"00구에 있는 본사 0층에 있습니다"
귀찮다는 뉘앙스가 내 귀를 후려쳤다. 더는 말을 걸었다가는 왠지 안 될 것 같았다.
찾아가서 얼굴을 마주 보고 인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화기로 인사를 해서 버릇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때는 입사한지 두 달 정도 된 신입이었으니까...
"네 그럼 조만간 찾아뵙고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아... 네..."
며칠 뒤...
A사가 있는 곳으로 출근했다. 출근 길 발걸음이 무거웠다. 나를 반기지 않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인 만큼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부딪혀보기로 했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게 주어진 출입처이고 출입처에서 인정받는 것이 기자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내겐 신입으로서 패기가 있었다. 돌도 씹어 먹을 수 있는 그런 패기... 순진했다...
저 회사 앞에 왔는데요.
인사 좀 드리려고요...
해당 업체는 기자실이 홍보실 옆에 있었다. 홍보실 승인이 있어야 1층 출입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관리자는 홍보실과 통화를 한 뒤 내게 기다리라고 했다. "홍보실 직원이 내려오기로 했다"면서...
내 기억으론 30여 분가량 1층 로비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거긴 앉을 곳도 없었다. 무료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림 뿐이었다.
홍보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려오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바쁘겠지란 생각에 무작정 기다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 같았고 어리석었다.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아 그냥 가겠다고 홍보팀장에게 전화를 넣으려는 순간, 출입문이 열렸다. 문 사이로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직원이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 귀를 의심했다.
"저기...... 기자님....(주임도 난감해 보였다) 죄송하지만 그냥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네?????"
'아 이런 뭐 같은 경우가 있나... 완전히 대놓고 사람을 무시하는구나'. 이 순간을 똑똑히 기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니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빡쳤지만 슬프게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주임에게 따질 수도 없었다. 주임도 마음고생이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홍보팀장에게 기자를 돌려보내라는 어려운 미션을 부여받고 내려오는 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앞으로 연락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지금 이렇게 돌아가지만, 홍보팀장한테 꼭 전해주세요. 앞으로 연락하지 마시라고요"
이대로 그냥 돌아설 수는 없었다. 이렇게라도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기자로서의 자존심이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었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말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으로서 모멸감을 느꼈다.
이런 일이 더 발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슬펐다. 앞으로 내가 풀어나가야 할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너무도 속상했다. 지금 생각해도 속상하다. 문전박대 충격은 거의 한 달여 동안 지속됐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일을 당하며 회사를 다녀야 하나까지 고민했다.
그러다 악이 받쳤다. 이렇게 무능하고 한심한 놈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업체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대단한 회사길래 나를 무시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무엇보다 멋진 기사로 내가 괜찮은 기자임을 인정받고 싶었다. 오로지 내 머릿속에는 A사밖에 없었다.
최근 몇 년간 올라온 공시자료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사업보고서, 분기보고서 싹 다 뒤졌다. 한 달여 동안의 분석 끝에 정체불명의 한 회사를 찾아냈다.
페이퍼컴퍼니?
최대주주가 회장 아들?
회장의 자식 중 한 명이 최대주주로 등극해 있는 B사. 이 회사는 설립은 됐는데 실적이 없었다. 홈페이지도 구색만 갖춰놓은 듯했다. 따져볼수록 이상했다. 지분을 분석하면서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B사는 숨겨진 지주회사 격이었다. 마치 롯데호텔이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고 보이지 않는 일본 회사가 롯데호텔을 다스리고 있듯이...
전체적인 지분 관계도를 그려보니 겉으로는 회장이 최대주주로 보이지만 숨겨진 B사의 정체가 드러나면 최대주주는 아들이었다.
기사 검색을 해보니 아직 보도된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심층 취재에 돌입했다.
팀장에게 보고했다. 지분구조에 대한 그래프도 한 땀 한 땀 직접 그렸다.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민감한 기사인 만큼 마지막으로 해당 업체의 입장을 듣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난 입장만 달라고 했다. 오래 통화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구차한 변명...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
전화가 울렸다. 홍보팀장의 전화였다. 입장을 달라고 했다.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난 거절했다. 입장만 주면 된다고 했다.
팀장이 내게 만나보라고 지시를 내렸다. 만나서 입장을 받기로 했다.
"저희 기자실에 시니어 기자들이 많이 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온라인 매체 신입 기자들이 오는 걸 안 좋아해서요. 그래서 제가 신 기자님을 어쩔 수 없이 돌려보낸 거에요. 그때 회의가 있어서 주임을 내려보낸 거고요. 오해가 있었다면 푸시길 바랍니다".
홍보팀장은 먼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 일이 있고난 뒤 한 달여가 흐른 지금에 와서 이렇게 말하다니... 비갑하다고 생각했다. 구차한 변명으로 들렸다. 진심을 느낄 수 없었다.
난 기사를 써서 팀장에게 넘겼다.
퍼져나가는 찌라시
홍보팀장이 내게 사과했다는 이야기는 금방 퍼져나갔다. 동료 마이너 기자들은 나를 볼 때마다 이 이야기에 관해 물었다. 내 이야기를 퍼트린 이들은 홍보팀장에게 나처럼 당한 어린 연차의 기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분명히 기억한다. 아직도 생생하다. 어쩌면 평생 잊지 못할지도 모른다......
많이 씁쓸했지만... 난 그렇게 취재기자로서 한 걸음을 뗐다.
에필로그
참 야비한 홍보팀장이었습니다. 사실 홍보부라는 것은 해당 업체의 얼굴입니다. 입이기도 하고요.
미디어 관리가 주 업무인 홍보팀장이 아무리 마이너 매체라고 하더라도 인사하러 간 어린 연차 기자를 문전박대한 것은 분명 잘못된 행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알아보니 해당 홍보팀장은 당시 차장급이었는데 오랫동안 광고집행권까지 가지고 전횡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홍보임원 없이 사실상 왕 노릇을 해왔던 상황이었죠. 상황이 상황인지라 온라인매체 기자는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홍보실 직원분들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요즘 기자라는 명함을 들고 다니며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는 이들이 많은 거 알고 있습니다. 기자실에 와서 행패를 부리거나 홍보실 직원에게 막말하는 이들도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전 그저 인사하러 간 것이었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충분히 상황설명도 했다고 생각했는데... 휴...
최근 미디어 오늘에 기자의 홍보실 갑질과 관련해서 기사가 나온 게 있어서 조심스러운 면이 있지만, 제 기자 삶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었기에 이번 편에서 다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