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도록 차를 마셔. 저녁 술자리는 피하고...
얼마 전 저희 기사 쓰셨죠?
입사한 지 한 달 여가 흘렀을 즈음. 부장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 회사로 연락한 통이 왔단다.
"전화받아봐 돌려줄게"
'엥??? 날 왜 찾지... 내가 뭐 잘못이라도 했나... 최근 내가 공시 오보 낸 것 때문인가...'
겁부터 났다. 도둑이 제발 저리듯...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기자님. 저희는 ○○ 회사 홍보대행을 맡고 있는 ○○인데요. 한 번 뵐 수 있을까요?"
통화를 해보니 홍보대행사 직원이었다. 목소리가 매우 상냥했다.
"네???"
다짜고짜 만나자는 말에 난 당황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난 매일 점심을 부장과 먹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머뭇거렸다.
"날짜 몇 개 주시면 맞춰보겠습니다"
상대는 능숙했다. 나 같은 초짜 따위는 식은 죽 먹기라는 식이었다. 난 연락처를 받고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답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이었다...
그런데 궁금해졌다. '나를 어떻게 알고 연락했을까?' 물어봤다. 답은 간단했다. 얼마 전 보도자료 처리한 것을 보고 새로 출입하는 기자인가 싶어 연락이 온 것이다. 기사의 무서움을 또 한번 느꼈다.
응 만나봐
부장은 내게 흔쾌히 다녀오라고 했다. 바로 전화를 걸어 날짜를 잡았다.
그들은 우리 회사 근처로 왔다. 식당도 예약했다고 했다. 처음으로 혼자 외부 사람과 만나게 됐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겁이 나긴 했지만 편하게 다녀오라는 부장의 말에 가벼운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사실 어디서 뭘 먹었는지까지 기억나지 않는다. 엄청 긴장했었나 보다.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기억한다.
어쩌면 그들과 내가 했던 이야기들이 사무적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내가 그들이 기억나지 않듯 그들에게 나도 그저 스쳐간 수많은 기자 중에 하나였을지도...
밥 잘 먹고 왔니?
부장은 상당히 궁금해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어떻게 처신했는지가 궁금했던 것 같다. 체면이 있어 동행하지 않은 듯한 눈치였다.
"음... 그냥 식사자리였어요"
"어디서 먹었니?"
"예약했던데요"
부장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늘 그렇듯 특유의 무심한 화법으로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는 이것만은 지키렴...
"대행사 직원들을 만날 땐 비싼 거 먹지 마렴. 되도록 차나 커피를 얻어 먹으면 더 좋고. 절대 저녁 술자리는 요구하지 마."
"왜요?"
"일단 그들은 정말 바빠. 기자 미팅은 부가적인 업무지. 그들은 늘 야근해. 대행사에서 저녁 있는 삶을 살긴 쉽지 않아. 무엇보다 너에게 밥을 사고 술을 사기 위해 그들은 클라이언트의 눈치를 봐야해.
클라이언트가 왜 이렇게 많이 쓰고 다니냐고 하면 그들은 난감해지겠지. 어쩌면 네가 마신 술이 그들의 사비일 수 있어. 그럼 그들이 월급이 많아야 하는데... 내가 알기론 그렇지 않아...
오늘 나갔다 와서 알겠지만 어차피 만나서 할 이야기는 정해져 있어. 커피 한 잔으로도 충분한 이야기들이지. 물론 인간적으로 친해지면 그 이후엔 알아서 하렴. 하지만 업무적으로 만나는 거라면 내 이야기를 명심하렴."
"네..."
그때 이후 되도록 점심 약속 자리는 그냥 오라고 한다. 상대방이 직급이 높아 격을 맞춰야 할 경우가 아니라면 편하게 먹는 게 좋기 때문이다. 또한 나보다 연차가 어린 친구들에게는 예약하지 말고 그냥 오라고 한다. 김밥천국도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라고 한다. 먹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지금은 이런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체면 격식은 따질 때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칸막이로 되어 있는 고급 식당을 굳이 찾을 이유가 없다. 주위 사람들이 들으면 안 되는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오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클라이언트 회사를 설명하기 위해 나를 만나는 것이니 그게 기업의 기밀일리 없다. 그러니 그냥 만나 서로 간을 좀 보면서 유쾌하게 대화하면 된다...
난 오고 가다 연락하는 이들이 더 반갑다. 수많은 기자 중에 내가 기억이 났다는 것이니까.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스며드는 그런 인연이 좋다.
에필로그
지금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의 약속은 늘 설레기도 하지만, 조심스럽습니다. 그들에 대한 정보가 있거나 없거나 마찬가더라고요.
상투적으로 예약하고 밥 먹고하는 것에 익숙해질만도 한데... 전 아직도 그런 만남은 늘 부담스럽네요......
그리고 전 제게 점심 먹자고 하는 분들에게 늘 말씀드리는 게 있습니다.
"무엇을 먹는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누구와 먹느냐가 제겐 아주 중요합니다"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