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착각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안경 한 쌍.
투명한 렌즈에는 희미한 손때가 묻어 있고,
가느다란 테는 마치 아무렇게나 놓인 듯 바닥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
얼른 주워서 주인을 찾아주는 것이 도리겠지만, 그것도 어느 바닥이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적어도 그 바닥이 유명한 미술관이라면 말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지나치면서 잠시 멈칫했다.
누군가는 신발끈을 묶다가 발견했고, 또 누군가는 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게 작품인가?"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동요했다.
"정말 그런 것 같아. 위치가 절묘한데?"
"그러고 보니, 단순한 안경이 아닌 것 같아."
한 사람, 두 사람, 곧 여러 사람이 그 앞에서 서성였다.
미술관 직원조차 그것이 작품인지, 아니면 단순히 방문객이 흘린 물건인지 판단하지 못했다.
사실, 유명한 현대미술 작가의 설치 작품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고,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다.
‘시각의 프레임을 상징하는 것일까?’
‘관객이 직접 참여하는 작품인가?’
‘존재와 부재의 경계를 탐구하는 실험일지도 몰라.’
어느새 하나의 예술 작품이 탄생했다.
그러나 정작 그것을 흘린 사람은 뒤늦게 자신의 안경이 없어진 것을 깨닫고, 이리저리 찾아다녔다.
한참 후,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그곳에서 자신의 안경을 발견한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순간, 주변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어떤 이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고, 어떤 이들은 피식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안경은 다시 안경일 뿐이 되었다.
그러나 잠시나마, 그것은 예술이었다.
"일단 유명해져라. 그러면 당신이 똥을 싸더라도 사람들은 박수를 칠 것이다"
'예술가의 똥'을 아는가?
이것은 예술가 피에로 만초니의 1961년 작품이다.
그리고 그것은 진짜로 그의 '똥'이다.
그는 자신의 배설물을 깡통에 담아 전시했고, 그것은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작품 중 하나로 남았다.
누군가는 이를 예술의 극한이라 평가했고, 누군가는 조롱과 경멸을 보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았고, 오늘날까지도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예술이라 부르는가?
바닥에 놓인 안경을 보고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그것은 작품이 된다.
예술가가 자신의 배설물을 포장하여 ‘예술’이라 선언하면, 그것은 작품이 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규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일까,
아니면 예술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순간,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인가?
안경은 다시 안경이 되었지만,
만초니의 똥은 여전히 예술로 남아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는 지식을 통해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그 지식이 오히려 판단을 흐리게도 한다.
"미술관에 있으니 예술일 것이다"라는 전제가 작동하는 순간,
평범한 안경도 의미를 부여받고 작품이 되어버리기에.
나는 이것이 인간의 사고방식 자체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이미 머릿속에 각인된 개념과 기대 속에서 본다는 것.
미술관이라는 공간과 예술이라는 맥락이 부여되었을 때,
우리는 무언가를 특별하게 해석하려 하고, 또 의미를 찾아내려고 한다.
그게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얼마나 쉽게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프레임에 갇힐 수 있는지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