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와 파리

여행 24일. 파리 4일.

by 어린왕자

*이 글에 베르사유 궁전 내부를 다루는 내용은 없으니 베르사유 궁전 내부에 관한 내용을 찾아오셨다면 뒤로 가기를 누르세요. 여러분의 시간은 소중하니까요.



2014년 7월

베르사유, 파리.


Zone 4까지 가야 했기에 오늘은 게하에서 조금 빨리 나왔어. 베르사유를 갈 거라는 형의 말에 '파리까지 왔으니 '베르사유의 장미'로 알게 된 이곳은 봐야지'라고 생각했어. 주제가 밖에 모르는 만화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움직였지만 그렇게 까지 먼 줄 몰랐어. 그래도 뭐, 형의 안내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트램 타기


'드디어 유럽 와서 트램을 타는구나~' 유럽 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의외로 트램을 탄 건 처음이었어. 그래서 기대감을 갖고 한참을 걸었어. 공장지대 같은 외곽 느낌이 나는 곳이었는데, 트램역이 보이질 않아 구글맵으로 확인하면서 갔어.


길 가운데에 있는 정류장에 도착했더니 안내판에 T2라고 적혀 있었어. 생각보다 배차 시간이 길어서 한참을 기다리다 드디어 트램에 탔는데 '이거 뭐야 지하철이랑 다를 봐 없잖아'. 량수를 보니 서울 9호선과 비슷한 거 같았어. 내부는 프랑스 신식 지하철이랑 비슷해. 내가 너무~~ 고전적인 트램을 생각했나 봐.


종점에 가까워서 타고 있는 사람들도 없었어. 그래서 조용히 편안하게 널브러져 타고 갔어. 역시 이런 대도시 내부로 느린 트램을 운행하다는 건 무리라 외곽을 이을 용도로 사용하는 거 같아. 그래서 도시 외곽으로 가니 시골스러운 분위기가 있어서 마음도 편안해졌어.


그러다 한 정류장에서 한국인들이 탔어. 칸에 사람도 없겠다 이런저런 여행 했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갔지. 그분들도 베르사유로 가고 있었어. 한국이라면 가능했으려나? 외국에서 여행하면 이런 재미가 있는 거 같아. 다 외향적인 형 덕분이지만.


그렇게 한참을 가더니 조금 규모가 있는 정류장에 내렸어. 정류장이라기보다 지하철역에 가까웠지. 역을 따라 도로로 나가니 고가도로 위로 나갈 수 있었어.




버스 타기


형과 다른 여행객들이 여기서 버스를 타야 된다고 했지만 정류장이 보이질 않았어. 고속도로 같아 보였는데 이런 곳에는 광역버스 정류장이 있긴 하지만 흔하지 않으니까.


그러다 역에서 나와 우연히 지나가는 프랑스인을 봤고, 물어봤지. 그런데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셨어. 파리에서 조금만 나가도 영어 하는 사람이 드물다고 들었는데 역시나. 그래서 냉큼 지도로 베르사유를 가리켰지. 역시나 한 번에 우리의 질문을 파악하고 정류장 위치와 버스 번호를 가르쳐 주셨어. 친절함에 감사했어.


도로를 따라 조금 걷다 보니 정류장이 보였어. 도시 외곽이라 버스도 한참 기다렸지. 아! 버스나 트램도 마찬가지로 지하철과 같이 까르네(승차권)를 이용하면 돼. 대신 Zone 4까지 이용할 수 있는 까르네를 구입해야 할 것. 까르네가 없을 경우 해당하는 요금을 기사에게 내도 돼. 버스 내부는 한국 저층 버스와 거의 같았어. 관광객보다는 현지인들이 많아 보였어.


개선문 위에서 본 에펠탑




버스 안에서


우리는 가는 곳 경로마다 여행객이 없는 거 같아. 목적지에는 엄청 많지만. 그러나 버스가 마을 내부로 들어서더니 사람이 점점 많아져서 만원 버스가 됐어. 출근시간은 이미 넘은 거 같은데 말이야. 일행들과 대화 나누기도 힘들어져 귀에 이어폰을 꽂고 노래 들으며 갔지.


그때, 버스 한가운데에 있는 체구가 큰 흑인 아줌마가 큰소리로 말을 했어. 나와 떨어진 거리에 있는 데다 내가 아는 이가 아니기에 당연히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나를 쳐다보며 말을 하는 것 같아서 이어폰을 빼고 말을 들어보니 '하차벨을 눌러달라는 것' 같았어. 뭐지, 이 어이없음은? 만원 버스라 누르기 힘들면 주위에 사람들 한테 말하면 되지 굳이 떨어져 있는 나에게 말하는 거야? 관광객인 나에게 현지인이 부탁하는 경우가 없어서 당황했어. 아무튼 벨을 눌러줬어.


이내 정류장에 버스가 서자 사람들이 비켜주면서 내렸어. 그때 보니 어르신이 타고 계신 휠체어를 밀고 있었어. 만원 버스에다 휠체어가 내려야 하니 하차하는데 시간이 걸렸지. 그래서 그랬나 보다 했지만 굳이 왜 카메라 목에 메고 있는 검은 머리 동양인에게 영어도 아닌 프랑스어로? 내릴 때는 땡큐라고 하더라고. 그 말에 웃음만 나오더라. 아주 사소하지만 한참이나 당황스러운 일이었어. 뜬금없이 나에게 화내는 거 같았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가 베르사유 궁전 맞은편 정거장에 도착했어. 1시간 넘게 왔더니 관람 전에 지치더라.




베르사유 궁전에 들어가 보자


그래도 멀리 반짝반짝 황금색 궁전을 보자 어서 가고 싶었어. 그런데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정말 어이없는 광경을 봤어. 궁전 앞에 궁전만 한 공간에 줄로 가득 차 있었어. 오르세에서 놀라고 루브르에서 더 놀라고 베르사유는 놀람을 초월해서 입이 벌어졌어. 일행 모두 '와.......'만 반복할 뿐이었어. 본능적으로 줄 끝에 서기는 했지만 이렇게 하는 게 올바른 건지 의심이 들 정도였어. 왜냐면 관람 시간보다 줄 서는 시간이 더 길거 같았거든.


우리에게는 무적의 뮤지엄 패스가 있기에 뮤지엄 패스 줄을 찾았어. 그래서 우선 앞에 서있는 사람한테 물어봤어. 그랬더니 이 줄이 맞다는 거야. 그래도 혹시나 싶어 일행들에게 줄을 맡기고 앞에 가서 관계자에게 묻고, 티켓 사는 곳에 가서도 물어봤더니 모두 같은 줄에 서면 된다고 했어.


줄은 끝없는'ㄹ'를 그리고 있는데 정말 여기에 서야 한다니. 줄이 조금씩 줄어들긴 했지만 속도로 봐서는 이대로 1~2시간 줄을 서야 입장이 가능할 거 같았어. 날씨도 조금씩 어두컴컴해지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지. 그래서 기다리다 형과 나는 정원부터 들렸다 나와 줄을 보고 너무 많으면 궁전을 보지 않고, 줄이 설만하다 싶으면 궁전을 보기로 했어.


베르사유 궁전 앞 루이 14세 동상




베르사유 궁전 정원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꽤 많은 시간이 흘렸어. 서둘러 궁전 오른편으로 가니 정원으로 가는 길을 볼 수 있었어. 이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가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지.


뮤지엄 패스가 있으면 이곳도 통과. 정원 입구는 짐 검사를 하지 않기에 줄을 서지 않고 바로 입장할 수 있었어. 그런데 입구가 마치 놀이공원 같았어. 아마 당연한 거겠지. 이런 유럽 궁전을 따라 놀이공원을 만들었니까.


들어가면 놀이공원보다 더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토끼를 따라온 느낌이었어. 꼬마기차에 나무들은 원형의 모습이 아니라 네모, 세모, 회오리 등 인위적으로 깎여 있었어. 거기다 세계 각지의 남녀노소의 다양한 사람들을 보면 정말 다른 세계의 느낌이야.


그냥 걸어갈까도 생각했지만 정원을 보면 '이건 아니다'라고 금방 깨닫게 돼. 정말 어마어마하게 크거든. 많은 곳을 보고 싶다면 꼬마 기차를 이용하는 것을 추천해. 따로 요금을 지불해야 하는데 기억으로는 5~6유로였던 거 같아.




쁘띠 트리아농 (Le domaine de Marie-Antoinette)


꼬마 기차를 타고 이상한 나라의 풍경을 구경하면서 형이랑 정신없이 이야기하다 끝까지 가서 쁘띠 트리아농에서 내렸어. 퐁파두르 후작 부인을 위해 지은 별궁으로 이후 바리 백작부인을 거쳐 마리 앙투아네트가 소유하게 되는 별궁이야.


정원에 들어와 날씨가 어두워지더니 기차에 내리자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어. 파리에서는 늘 우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산을 펴기 싫어서 사람들 뒤에 줄을 섰어.


뮤지엄 패스가 있기 때문에 티켓은 필요 없어서 자연스럽게 입장했지. 별궁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어. 오히려 시골스럽다고 해야 하나? 루브르에서 본 분위기와 많이 달랐어. 오히려 안락함과 차분함이 느껴졌어. 그래서 여기는 사람 사는 곳 같았지.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화도 있어서 이곳의 주인임을 확실히 알게 됐어. 본관 앞쪽 정원은 인위적인 정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반대편 정원은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어서 더 좋았어.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정원을 걷는 건 괜찮은 거 같아. 대신 하늘이 너무 어두워서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만 빼고 말이야. 결국 사진 찍는 걸 포기하고 감상에 집중했어.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과소비는 혁명가들에 부풀러 진 이야기'라는 말이 있다더니, 이곳을 둘러보면 그 말이 믿길 거야.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화




짧은 점심과 여유

쁘띠 트리아농을 나와서 꼬마 기차를 기다렸어. 왕비의 촌락까지 꼬마 기차가 운행하지 않아. 비도 오고 그래서 가지 않기로 하고 옆의 그랑 트리아농으로 가기로 했어.


그런데 배차 시간이 왜 이렇게 긴 거야. 그동안 주위를 둘러보니 꼬마 아이들이 단체로 소풍 왔는지 우산도 쓰지 않고 사진 찍으며 뛰어놀고 있었어. 이상하게 기분 좋더라.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사람을 맑아지게 하는 거 같아.

비가 조금씩 잦아들었고, 이내 그쳤어. 한 것 없이 벌써 점심때. 그래서 비에 젖지 않은 벤치에 앉아서 사온 샌드위치를 먹었어. 파리 와서 아침마다 마트에 들러 맛난 것들을 사는데, 샌드위치가 정말 맛있어. 심지어 엄청 싸기까지 해. 편의점 샌드위치 가격 정도에 양은 좀 더 많아. 거기에 생과일주스 한 병이면 꿀맛이야. 그래서 매일 샌드위치를 먹을 때마다 프랑스는 빵의 나라라는 걸 실감하지. 이후 나를 빵쟁이로 만들어 버렸어. 잠시 아이들 노는 걸 구경하면서 멍 때리다 기차가 오지 않아서 그냥 걸었어.


정원에서 노는 아이들




그랑 트리아농 (Le Grand Trianon)


바로 옆이라 그리 오래 걷지 않았어. 그랑 트리아농은 맹뜨농 부인을 위해 지은 별궁이야. 왼쪽 입구로 들어가니 이곳도 전체적으로 하얀색을 이루고 있고 분홍색과 민트색으로 포인트를 주었을 뿐 그리 화려하지 않아서 좋았어. 가장 화려한 곳은 회랑인데 대리석으로 꾸며져 깔끔하면서 분홍색이 참 잘 어울려. 여기서 알록달록한 꽃이 피어 있는 정원에 내리는 비 구경은 내가 귀족이 된 느낌이야.


베르사유 궁전 정원의 중심에 십자가 모양의 대운하가 있는데, 그랑 트리아농 정원 왼쪽 끝으로 가면 이 대운하의 오른쪽 끝을 볼 수 있어. 정원에 이만한 크기의 운하를 만들다니, 그냥 호수야. 정말 '대단하다'라는 생각뿐이야.


그랑 트리아농 정원
그랑 트리아농 안에서 보는 운하




베르사유 궁전 정원에서 산책


그대로 밖으로 나와서 꼬마 기차를 기다렸지만, 역시나 오지 않아. 비도 그치고, 해도 다시 얼굴을 비춰서 나무 사이 길로 걸었어. 사람이 없어서 조용하니 좋더라. 보슬비에 살짝 젖은 풀과 흙을 밟을 때 나는 소리는 달빛은 없지만 '드뷔시의 달빛'을 듣는 것 같은 은은한 느낌이었어. 거기다 비의 향기와 섞인 풀내음은 한 것 없지만 상당히 지쳐있는 나를 회복시켜 주었어.


정원 내 산책로


상당히 걸었더니 운하가 나왔어. 그 사이에 비가 다시 내리고 그치길 반복했으니 정원의 크기를 실감할 수 있었지. 사람들은 보트 대여소에서 보트를 빌려 운하를 구경하거나 운하 근처에서 돗자리 위에 앉아 여유를 즐기고 있었어. 우리도 근처에 자리 잡고 누웠지. 사람들이 베르사유 궁전에 화장실이 없어서 정원에 버린다고 했지만 그건 옛날이야기니 걱정하지도 않아도 돼.


체력을 회복하고 있는데 역시나 사람이 많으니 소음도 크고 앞뒤로 왔다 갔다 해서 편안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어. 일어나서 라토네 화단 쪽으로 걸었어. 이 길에 사람이 왜 이렇게 많니. 한 줄 서서 가는 기분이었어. 결국 화단까지 가지 못하고 정원 입구로 돌아갔어.


사람도 많고 정신도 없고 비도 왔지만 정원에 오길 잘한 거 같았어.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실력이 녹아들어 신비롭고 이쁜 곳이었던 거 같아. 더불어 곳곳에 몸과 마음에 휴식이 될 수 있었던 곳이 있어서 더 좋았어. 괜히 사람들이 궁전보다는 정원이라고 하는 걸 궁전에 가지 않아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던 거 같아.


운하와 보트 대여소




RER 타기


정원을 나와 궁전 입장 줄을 보니 줄이 줄어들긴 했지만 기다릴만한 줄은 아니었어. 관람까지 마치면 저녁때가 될 거 같았지. 그리고 궁전에 많은 비계가 있어서 보기 좋지 않았어. 어디 가나 공사중이가봐. TT. 그래서 그냥 입장하지 않고 돌아가기로 했어. 오는 것만 해도 체력을 많이 소비한 거 같아. 형은 게하로 돌아가기로 하고 나는 잠깐 동안 이틀 전에 미쳐 보지 못했던 고흐 특별전을 보러 가기로 했어.


가까운 RER역으로 걸어갔어.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단체 MT 온 느낌이었어. 다들 짧은 옷에 선글라스, 창이 큰 모자는 궁전을 보고 왔다기보다는 해변이나 계곡을 갔다 온 느낌이었거든. 튜브까지 있었다면 주위에 큰 바다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을 거야.


까르네을 사고 플랫폼으로 들어갔더니 또 줄 서있더라. '오늘 사람 엄청 많이 본다.' 하며 한참을 기다려 RER에 탑승했는데 프랑스에 와서 처음으로 덥다고 느꼈어. 긴팔만 입고 다녔으니까. 왜 사람들이 짧은 옷을 입었는지 알 수 있었지. 그리고 RER은 거의 기차와 흡사해서 또래들과 앉아 떠드는 모습 때문에 더 MT 가는 느낌이었어. 오랜만에 이런 느낌은 지친 나에게 여행의 활력소가 되었던 거 같아.


베르사유 궁전 정면




다시 오르세 미술관


RER은 생각보다 빨랐어. 역시 광역철도! 역에서 나와, 폐장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기에 서둘렀어. 오르세에서는 뮤지엄 패스를 사용해서 금방 입장하여 2층으로 곧장 갔어. 하지만 여기에 줄이...... 그리 긴 줄이 아니었기에 금방 들어가서 고흐 작품을 볼 수 있었어.


전에도 말했듯이 많은 작품들이 서울로 갔기에 평소와 다른 주제로 전시회를 하고 있었어. 그래서 전시하지 않았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했어. 덕분에 잘 모르는 나에게는 생소한 작품뿐이었지.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전에 왔을 때보다 시끄러웠어. 그래서 서서 이어폰을 꽂을까 싶었지만 에스컬레이터처럼 지나는 사람들의 행렬에 가만히 서 있기가 쉽지 않았어.


그렇게 훑어보는 중에 수채화들이 몇 작품 보였어. 유화보다 물에 번져 캔버스에 녹아든 수채화들이 더 마음에 들었어. 유화보다 짙지 않아 캔버스 자체가 그림이 된 느낌이 좋았던 거 같아.


한 곳에 여러 작품이 걸려있었어. 그중에 나를 서 있게 한 작품은 파란 배경에 나무 한 그루 있는 그림이었어. 이유도 모를 감정이 가슴에 가득 차서 눈가에 눈물이 맺혔어. 추운 겨울 홀로 서 있는 나무가 아무도 없는 그인 거 같아서. 하지만 살아야 할 이유와 살아서 이루고 싶은 마음이 나무를 통해 전해지는 거 같아 심장을 쬐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 그렇게 사람들의 행렬을 피해 뒤에 서서 그림을 감상했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내 앞을 지나가고, 폐장 시간이 다 되어서 나머지 작품을 보고 나와야 했어. 앞서 오르세에 대한 기억이 적은 것은 오르세를 생각하면 이 작품과 이 느낌만이 떠올라서야. 미쳐 이름도 물어보지 못한 이가 내 머리와 가슴속 어딘가를 차지하여 그 시간과 공간의 기억을 전부 가져가 버려서야.


개선문




다시 에투알 개선문


게하에서 잠시 쉬었다 해질 무렵 나왔어. 오늘 저녁은 개선문 위에서 파리 전경을 볼 예정이야. 처음 파리에 왔던 날처럼 지하철을 타고 개선문으로 갔어. 전에 보지 못 했던 저녁의 개선문을 잠시 구경하고 지하를 통해 개선문 아래로 갔어. 개선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팔지만 우리에게는 뮤지엄 패스가 있기에 패스만을 보여주고 개선문으로 입장했어.


개선문 안쪽을 보니 확실히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문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어. 그리고 멀리서 본 것보다 훨씬 세세하게 만들어졌고 로마의 개선문에 사용된 문양들이 보였어.


그 아래 세계대전 때 전사한 무명용사들을 기리는 무덤과 성화가 있었어.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보다 나라를 위해 전사한 군인들의 예우하는 것이 더 좋았던 거 같아. 개선문의 방사형 도로를 따라 사진을 찍고 개선문 위로 올라갔어.


개선문 아치 아래부분, 개선문 아래에서 본 신 개선문


크기에 맞게 회오리 계단을 한참이나 걸어갔어. 빙글빙글 올라가 밖으로 나오니 작은 초승달이 나를 맞이해줘서 좋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맞이해줬지. '여기서 어떻게 사진을 찍지'라는 고민이 든 것도 잠시, 이내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었어.


파리의 건물은 높이 제한이 있어서 막힘 없이 다 볼 수 있었어. 그래서 툭 튀어나온 에펠 탑몽마르뜨 언덕의 사크레 쾨르 성당이 잘 보였어. 전경 중에 샹젤리제 거리를 통해 우리가 갔던 콩코드 광장, 뛸르히 정원, 루브르 박물관이 직선으로 보여 좋았던 거 같아. 그리고 라 데팡스의 신 개선문이 있는 신시가지는 높이 제한이 없어 파리가 아닌 거 같은 마천루가 꽤 인상적이었어.


그렇게 한 바퀴 돌며 야경을 찍다가 폐장 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어. 폐장 시간은 11시. 점점 추워졌고, 한국보다는 불빛이 없기에 그리 반짝반짝하지도 않았어. 이곳은 퇴근시간 엄수인 국가니까. 거기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불빛이 줄어들었는데도 내려가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10분 전 마지막 안내방송이 나올 때까지 있었지. 한국의 계획도시는 너무 네모 반듯한 도시였는데 파리는 규칙적이면서도 또 그렇지 않은 모습이 좋았던 거 같아.


개선문 위에서 본 신 개선문
개선문 위에서 본 몽마르뜨 언덕
개선문 위에서 본 샹젤리제 거리
해와 달과 그리고 두 개선문




개선문을 내려와


개선문을 내려오니 샹젤리제에 사람들이 엄청 많았어. 한국에 비하면 없는 편이긴 하지만. 역시 첫날에는 비 오는 낮이라 사람이 없었나 봐.


그런데 도로 가운데 모여서 뭐 하는 걸까? 자세히 봤더니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도로 중앙선 연석 위에 서 있는 걸로 보였어. 횡단보도를 통해서 연석 위로 오는 이도 있었지만 신호 무시하고 뛰어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어. 이곳에는 차량이 엄청 많은 곳이야. 도로 가운데이니 위험하지 않을 수 없지. 하지만 보는 사람이 더 위험을 느끼는 거 같았어. 외국 와서 이러지 말자 제발. 개선문 밑에서 사진 찍으면 차 걱정 없이 찍을 수 있어~~.

지하철 역에 갔더니 술 취한 사람들이 엄청 많았어. 차량 안뿐만 아니라 역에 정차할 때마다 알코올의 진한 향이 높은 습도와 함께 전해졌어. 월드컵 때문에 그러나? 이 날이었던 거 같은데, 아마 프랑스가 월드컵 8강 진출한 날이었던 거 같아.


역에서 휘청거리면서 막 소리 지르고 노래하는 사람들, 아무나 지나가는 다른 이에게 스킨십하는 사람들, 사람 얼굴 앞에서 소리 지르고 웃는 사람들. 특히 우리가 게하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승강문 앞에 있었는데, 역에 정차할 때 차량 밖에 여자들이 차량 안으로 고개를 넣고는 소리를 질러서 너무 놀라고 불쾌했어. 그리고 그걸 본 아저씨들이 매너를 갖추라고 소리쳤어. 하지만 비웃을 뿐이었지. 그 사람들이 고개를 들이밀고 있어서 출발 시간도 잠깐 지연됐지. 아마 대신 혼내주는 아저씨들이 아니었으면 시비가 붙었을지도 몰라. 뭐 자동반사적으로 한국 욕이 나왔지만.


그 역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였어. 내가 서 있던 곳에만 그렇지 않을 뿐이었지. 이 이야기를 유럽에서 만난 다른 한국인 대학생들에게 했더니 한국에도 2002년에 그랬다고 충분히 이해한다고 했어. 나만 이상한가. 당시에도 사건사고가 많아 뉴스에서 과도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도 그때 10명 넘는 지인들과 같이 밖에서 시청하고 지인들하고만 좋아했을 뿐 자리 청소 잘하고 조용히 집에 갔는데. 이 광경을 보고 왜 축구 때문에 사람이 죽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던 거 같았어. 공공장소에서 적당히 하자~~.


개선문 아래에서 본 신 개선문
개선문 아래에서 본 상젤리제 거리
거리의 밝음과 어둠


게하에 오니 조용했어. 여행객들에게는 월드컵은 남일이니까. 내일은 프랑스 마지막이야. 벌써 파리 마지막 날이라니. 내일은 천천히 돌아보며 마지막을 즐겨야겠다 생각하며 잠들었어.




날씨도 왔다 갔다 정신도 왔다 갔다 한 바쁜 날이었어요. (글도 왔다 갔다) 덕분에 사진이 없네요. 날씨가 어두워서 그런 것도 있지만 기다리고 줄 서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돼서 더 못 찍었던 거 같아요. 저뿐만 아니라 형 사진도 없어 몇 장 동원하지도 못했네요. 다음에 간다면 베르사유에서 1박 2일을 보내며 궁전도 보고 정원에서 여유 있게 산책도 하고 멍도 때리면서 왕의 플렉스를 즐기고 싶네요.

이번 주는 드뷔시의 달빛을 들으며 마음의 은은함을 즐기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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