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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tRain Nov 01. 2019

사라지지 않는 것, 혹은

잊혀지지 않는 것들

길다면 길고, 짦다면 짦은 날이 흘렀다.

2017년 10월 14일, 뇌의 왼쪽이 주르륵 가라 앉으면서 뇌경색이 심해졌다. 

옆에 있는 사람이 말하는 소리는 들려도 뭔 말인지도 몰랐고 내가 뭔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단순한 이야기말 듣고 말할 뿐이었다.

'배가 고프다', '맛 있어', '맛 없어' 그 정도 뿐이었다.

병원으로 나를 데리고 갔던 마눌님은 참 많이 답답했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진찍기였다. 

머리의 왼쪽이 바닥까지 가라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는 변하지 안았다. 얼만나 밝고 어둡게 찍어야 하는지, 왼쪽 혹은 오른쪽 어딘가로 둬야할지, 가로와 세로 중에 뭐가 맘에 들지 고민했다. 사진 찍은 결과는 '아, 이게 바로 내 사진이야'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뇌경색 이전까지는 뇌의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것들이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지만 이젠 한 가지는 확실하게 믿는다. 사진 찍기나 그림 그리기 같은 일종의 예술은 뇌의 오른쪽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게 된 것이다. 아, 음악이나 노래도 잊혀지지 않더라.




이름은 사라졌지만

나와 친했던 사람, 그다지 보고 싶지 않는 사람 등등 그 많은 사람들의 얼굴은 기억한다. 다만, 그들의 이름은 사라졌다. 나와 마눌님의 이름,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름 정도만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카메라', '렌즈'는 물론이요, 카메라의 이름이나 렌즈의 이름도 사라지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노력해서 Canon, Nikon, SONY, SIGMA, 삼양 정도의 이름은 돌아온 정도다. 

중요한 건, 사람의 이름이나 특정 지역의 이름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만나 사진을 찍어주고 싶고 서울을 떠나 먼 곳의 아름다운 바다를 만나서 찍고 싶었다. 

이름은 사라졌지만, 얼굴은 기억이 나니 사진도 남게 되더라.

뇌경색 이후로, 내게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게 사진일 수 밖에.


잊지 마시라

당연한 이야기지만, 삶이 항상 편하고 즐거울 수는 없다. 삶은 일반적으로 슬프고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 처럼 작은 기쁨도 있기 마련. 그 즐거운 순간은 잊혀지지 않고, 점 보다 더 크게 남는다. 

그대도 그토록 슬프고 힘드신가? 그렇다면, 멈추지 말고 사진찍기를 즐기시라. 

물론, 폰으로 많이들 쓰지만 폰 만으로 못하는 것들도 많고 아쉬운 것도 많다. 그럴 땐 다들 고민한다. 

'실제 카메라와 렌즈를 사야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 고민이라면 망설이지 마시라. 원했던 사진을 찍지 못한 걸 후회하기 전에.

다시 말하지만, 개인적으로 뇌경색으로 머리가 가라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얼굴과 즐겁고 아름다운 곳은 잊혀지지 않더라.

그런 순간들을 다시 또 만나는데 사진 만한 게 없고, 그런 사진을 더 아름답게 남기는데 실제 카메라와 렌즈 만한 게 없다.

삶을 잊지 마시라.

그리고 순간을 더 확실하게 남기기 위해 사진과 카메라를 잊지 마시라.





#여기에 올린 모든 사진은 뇌경색 이후에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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