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리고 반성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도 있겠네요. 여기에서 조금 더 생각을 뻗어나가면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오해하실 수 있어 미리 말씀드리자면, 사진을 찍지 않는 사람이 반성하지 않고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진을 통해, 사진찍는 과정을 통해 부끄러움과 반성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세상은 단 0.1초도 가만히 있지 않아요.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시간의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 없죠. 모르긴 몰라도 100년 전과 비교해 봤을 때 지금 세상은 100배는 더 빨리 달라지고 있을 겁니다. 더욱 급하게 사는 사람들로 더 빨리 변하는 세상이라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사진은 그다지 달라진 게 없습니다. 필름이냐 디지털이냐는 도구의 차이일 뿐이지 사진의 정의까지 바뀌진 않았습니다.
사진은 정지된 시간을 담아냅니다. 세상이 제아무리 빠르게 변한다 해도 사진 속 세상은 한 치의 흐트럼 없이 오도카니 정지된 순간을 보여줍니다. 쉼 없이 움직이는 이 산만한 세상을 프레임 안에 다소곳이 정리해서 보여주지요. 세상의 한 조각을 정지된 상태 그대로 신선하게 담아낼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우리는 카메라를 손에 쥐곤 합니다. 그러나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는 흘러가가는 시간과 세상을 담아내는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순간을 다시 대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을 다시 대면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했듯이,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듯이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면 고민이 많아집니다. 타인 앞에 내놓기 부끄럽지는 않은지, 노출이 부족하거나 흔들리지는 않았는지, 구도는 적절한지 등등 찬찬히 뜯어볼 게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실수나 오류를 수정하게 되죠. 그리고 그런 고민은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뿐 아니라 무엇을 담아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집니다. 이렇듯 흘러가버린 시간에 대한 반성은 사진에서 꽤 중요한 일입니다.
지난한 자기반성을 거치지 않은 결과에 대해서는 이야기해봐야 입만 아프겠지요. 반성을 모르는 사람,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어떤 사진을 찍을지는 너무 뻔하니까요. 그런 면에서 정말 궁금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세계 1위 카메라 생산국 일본은 왜 그렇게 자기반성이 없는지, 부끄러움이 없는지 모르겠단 말이죠. 심지어 지난 2012년에는 도쿄와 오사카에 위치한 니콘 살롱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종군 위안부 사진전이 니콘 측의 통보로 중단된 사건도 있었지요.
일본 카메라를 사용하지 말자는 말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카메라를 쥐고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지나간 시간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그 고민의 영역을 조금 넓혀보자는 말입니다. 알고 계셨나요. 지난 5월 27일에는 이효순 할머니가, 지난 7월 5일에는 최금선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2015년 한 해 동안 벌써 일곱 명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별세했습니다. 이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8명 가운데 48명의 할머니만 남게 됐습니다. 그리고 현재,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