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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tRain Jul 07. 2015

검은 땅 위로 펼쳐진 녹색 원시림

제주 선흘리 동백동산


환상을 좇는 사람에겐 허상 밖에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허상 뒤의 진실을 대면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여행지도 마찬가지다. 흔히 알려진 관광명소를 찾아가 수박 겉핥기만 하고 맛없는 관광지 식당에서 배를 채우고 돌아온다. ‘제주’하면 가장 먼저 무엇을 떠올릴까. 대부분 마라도, 성산 일출봉, 용두암 등 유명 관광지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곳을 다녀오고 진짜 제주를 만나고 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주의 진짜 속살을 만날 수 있는 곳, 선흘리 동백동산으로 여러분을 안내한다. 



사시사철 푸르른 숲

선흘리 동백동산은 단순히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물론 10만 그루에 달하는 동백나무가 우거진 원시림이지만 그 곳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처녀림은 아니라는 말이다. 선흘리 일대에 위치한 동백숲은 주민의 생활터전이었다. 사람들은 숲에서 나무를 해 숯을 만들기도 했고 손바닥만 한 땅이라도 어떻게든 개간해 논과 밭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즉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1971년 선흘리 일대 동백숲은 보호지역으로 지정된다. 주거 환경, 생활 습관이 변하면서 숯을 원하는 사람이 급격히 줄어들기도 했고 주요 농작물이 감귤농사로 바뀌면서 동백숲은 차츰 마을 주민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람의 발길이 잠잠해지고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선흘리 일대 동백숲은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다. 2011년의 일이다. 그리고 이제는 태고의 아름다움을 품은 생태관광지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동백동산을 탐방할 수 있는 길은 여러 가지다. 만약 초행이거나 숲에서 길을 잃을까 걱정된다면 탐방안내소를 들머리로 하면 된다. 미리 탐방로 안내를 받을 수도 있고 해설사 동행을 신청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탐방안내소 뒤편으로 난 길을 시작으로 동백동산 걷기는 시작된다. 동산이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전체 걷기 코스는 가파르거나 험난하지 않다. 거의 평지에 가까우며 얼마 되지 않는 오르막길도 매우 완만하다. 따라서 노약자나 어린이와 함께 걷기에도 전혀 부담이 없다. 코스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본격 산행이 아니므로 신발은 가벼운 트레킹화로도 충분하다.

탐방안내소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 숲에 들어서면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이 탐방객을 반긴다. 동백동산 전체 면적은 59만㎡로 국내 난대상록활엽수림지대 중 최대 규모다. 그리고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전체 수목 중 1/3이 동백나무다. 그런데 대부분 탐방객들이 동백나무를 알아보지 못한다. 타 지역과 달리 옆으로 부피를 늘이기 보다는 위로 키를 키웠기 때문이다. 타 수종에 비해 키가 빨리 자라는 참나무과인 종가시나무와 경쟁하다 보니 그렇게 모습이 변했다. 과거 이 숲이 마을 주민의 생활 터전이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열매를 통해 수익을 낼 수 있는 동백나무만 남겨놓으면서 동백숲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가 70년대 보호지역 지정 이후 사람의 간섭이 없어지자 다른 수종이 조금씩 자리를 잡게 됐고 지금 같은 모습으로 동백나무들이 자라게 됐다.

탐방객이 가장 쉽게 동백꽃을 볼 수 있을 때는 꽃이 질 때다. 3~4월이면 동백이 지는데 그때야 비로소 꽃이 눈에 띈다. 꽃을 피우기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키를 키우는데 힘을 쏟아서 그런지 나무에 맺히는 꽃도 많지 않다. 지명 이름만 생각해서 이 곳을 찾으면 조금은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숲길을 걷다 보면 금세 길쭉길쭉 자란 이색적인 동백내무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탐방로는 오솔길처럼 좁게 이어지다가 다시 넓어지기도 하는데 탐방로 이외 길로 돌아다니는 것은 금물이다. 하늘을 덮을 정도로 나무가 자란 원시림이기 때문에 방향감각을 잃어 다시 길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해당 지역 특성상 계곡이 없어 물길을 따라 내려가며 길을 찾는 것도 불가능하다. 길을 잃어버리는 것도 문제지만 동백동산을 훼손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따라서 트래킹  중간중간 만나는 이정표를 잘 살피며 탐방로만 이용해 숲길 걷기를 즐기도록 한다.

동백동산을 녹색으로 물 들이는 주인공은 나무만이 아니다. 나무가 하늘을 덮어 빛이 잘 들지 않다 보니 땅과 가까운 곳은 온통 양치식물이다. 탐방로 양 주변으로 보이는 키 낮은 식물 대부분이 ‘가는쇠고사리’다. 그런데 이곳 동백동산에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양치식물이 자라고 있다. 원시 고사리 식물인 ‘제주고사리삼’이다. 여러 종으로 분화하지 않은 1속 1종인 이 양치식물은 전 세계에서 제주도에만 분포하고 있으며 선흘곶자왈 동백동산에서만 자란다. 현재 선흘리 주민들이 직접 나서 제주고사리삼 복원작업에 앞장서고 있다.



제주의 아픈 역사를 품은 곳

이어진 탐방로를 걷다 보면 안내판 하나와 구멍 뚫린 바닥을 만나게 된다. 제주의 아픈 역사 4.3의 상처가 남아 있는 ‘도틀굴’이다. 입구는 작은 구멍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제법 널찍한 공간이 나온다. 이 곳에서 4.3 당시 숨어있던 선흘리 주민 25명이 끌려나왔고  그중 18명이 토벌대에 총살당한 곳이다. 아직까지 제대로 아물지 못한 제주 현대사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난 곳이다.


길은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5월의 숲에서 낙엽길을 만난다. 다른 숲에서는 만날 수 없는 묘한 풍경이다. 동백 동산이 국내 최대 난대상록활엽수림지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동백은 4~5월이 되면 잎을 떨구는데 바람이 불면 잎이 우수수 떨어지기도 한다. 길을 걷다 보면 숲 곳곳에 일정한 모양으로 돌이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숯가마터다. 한때 선흘리 마을 경제를 책임졌던 숯가마지만 이제는 이끼 낀 돌 무더기로 남았다.

동백동산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인 상돌언덕이 보이면 전체 코스의 중간쯤 온 셈이다. 이곳은 과거 선흘리 주민들이 동백동산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무렵 목장의 마소가 잘 있는지 살펴보기도 하고 무단 벌목을 감시하던 전망대 역할을 했다. 보호지역 지정 이후 나무가 빽빽이 자라 시야를 가리지만 예전에는 함덕해변까지 내다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았다고 한다. 


상돌언덕을 지나 조금만 더 숲길을 걸으면 별안간 갑자기 주변이 환하게 밝아진다. 하늘을 덮고 있던 나무가 사라지면서 동백동산에서 가장 큰 습지인 먼물깍이 시야에 들어온다. 먼물깍이란 제주도 방언으로 ‘먼 곳에 있는 물의 끝’이라는 뜻이다. 과거에는 소나 말에게 물을 먹이던 곳이기도 하고 주민들의 식수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깊은 곳 수심이 1.5m 정도 밖에 되지 않아 아이들의 물놀이 공간 역할도 했다. 먼물깍 주변에는 화장실, 벤치 등이 있으니 쉬었다 가도 좋겠다. 

먼물깍을 벗어나 조금만 더 걸어가면 포장길이 나오고 포장길을 따라 내려가다 선흘분교가 보이면 트래킹은  마무리된다. 동백동산은 언뜻 보기엔 사진 찍기 좋은 피사체들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카메라를 들고 파인더를 보면 구도 잡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선 빛이 잘 들지 않으므로 대낮이라 하더라도 과감히 ISO를 올려 촬영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표준 렌즈보다는 광각 렌즈 사용도가 높다. 망원렌즈를 사용할 일은 그리 많지 않지만 가방에 여유가 있다면 중망원 렌즈 하나쯤은 챙겨도 좋다. 


2015년 현재 선흘리 사람들은 선대부터 이어 내려온 숲과 인간의 공존을 다시 꿈꾸고 있다. 과거에는 숲이 아낌없이 내주며 마을 사람을 먹여 살렸다면 이제는 사람들이 나서 푸르른 숲을 아끼는 모양새다. 시간이 흘러도 동백동산의 아름다움이 상처받지 않도록, 다음 세대가 찾아왔을 때 더 푸른 숲을 만날 수 있도록 마을 주민이 나서고 있다. 

선흘리는 다양한 생태문화자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어 2013년에 환경부 지정 생태관광지역으로 선정됐다. 이후 마을 주민들은 원탁회의 ‘리민큰마당’을 개최해 마을의 방향성을 스스로 논의하고 적극적으로 생태관광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실제로 선흘리에서 직접 진행하고 있는 다양한 생태관광 프로그램이 있으며 학생들을 위한 환경교육 프로그램과 체험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제주생태관광협회 고제량 대표는 “동백동산을 단순히 경제 효과를 가져오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은 기존 구태를 답습하는 것”라며 “동백동산을 중심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마을공동체를 되살리는 동시에 마을 밖의 다양한 문화·예술인도 함께 참여하는 다양성이 공존하는 마을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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