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GMA ⓐ 20mm F1.4 DG HSM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진은 카메라와 렌즈라는 기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아니, 카메라와 렌즈가 없으면 사진은 존재할 수 없다. 물론 사진가의 역할이 가장 크겠지만 의도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장비가 필요하다. 만약 표현을 위한 장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진가의 의도는 머릿속에서 미완으로 그치게 된다. 그동안 초광각렌즈로 밝은 조리개 값을 이용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사진가의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꿈의 영역이 시그마의 혁신으로 현실이 됐다.
그동안 광각렌즈 발전사는 화각에만 집중됐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다른 데 눈 돌릴 겨를도 없었다. 우선은 더 넓게 찍히는 게 중요했다. 대다수 광학회사는 사진가가 조금이라도 더 넓게 세상을 담을 수 있도록, 제한된 공간에서도 마음껏 대상을 담을 수 있도록 광각렌즈를 발전시켰다. 최근에는 캐논이 11mm부터 시작하는 광각 줌렌즈를 발표하기도 했다. 광각렌즈는 대체로 어두운 조리개 값으로 생산됐지만 고 ISO에도 이미지가 크게 손상되지 않도록 디지털 기술이 발전해 크게 불편한 점은 없었다.
그러나 조리개 조절이 단순히 빛의 양만 조절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사진가를 불편하게 만든다. 바로 심도 표현이라는, 사진을 이야기하는데 빠트릴 수 없는 표현 기술이 조리개 조절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더더군다나 광각렌즈는 표준 화각이나 망원화각 보다 기본적으로 심도가 깊다. 예를 들어 1m 정도에 거리를 둔 피사체를 50mm 렌즈를 사용해 F5.6으로 촬영하면 적당히 뒤가 흐려지는 결과물을 얻을 수 있지만 동일한 상황을 20mm 렌즈로 촬영하면 심도 표현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심도가 깊게 표현되는 광각렌즈 특성상 조리개 값이 매우 밝아야 뒤가 흐려지거나 보케가 맺히는 사진을 기대할 수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 광학회사는 이와 같은 사실 때문에 대구경 광각 단렌즈 개발은 24mm F1.4 이후로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시그마가 세상을 놀라게 할 렌즈를 발표했다. 바로 ⓐ 20mm F1.4 DG HSM(이하 24mm F1.4)이다. 일반적으로 20mm부터 초광각이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초광각 렌즈에 조리개 값 F1.4는 전무한 스펙이다. 기존 아트 시리즈로 시그마의 우수한 기술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는 숫자다.
렌즈 이름에 나타난 숫자만으로는 이 렌즈의 진가를 확인하기 힘들다. 일단 카메라에 마운트 해야 비로소 시그마 20mm F1.4의 진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선 이 렌즈를 장착하면 놀랍도록 밝은 파인더에 놀라게 된다. 기존 광각 렌즈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세상이다. SLR 시스템은 렌즈의 F값에 따라 파인더 밝기가 달라진다. 기존 초광각 렌즈는 F4 정도가 최대 조리개 개방 값이었고 그만큼 파인더가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그마 20mm F1.4는 놀랍도록 밝은 세상을 보여준다. 미러리스에서 기대할 수 없는 광학 파인더의 매력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넓은 세상을 구석구석 투명하고 맑게 바라볼 수 있다.
셔터를 누르고 결과물을 마주하게 되면 감동은 더 커진다. 우선 명확하게 드러나는 보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기존 초광각 렌즈는 빛망울이 잡힌다고 해도 잘았다. 구경이 작으니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시그마 20mm F1.4는 초광각 렌즈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큰 빛망울을 기대할 수 있다. 다만 모든 상황에서 보케가 크게 맺힐 거라는 오해는 금물이다. 이 렌즈도 기본적으로 광각렌즈다. 1미터 이내에 있는 피사체에서 보케가 극대화된다. 특히 최단 촬영거리 근방에서 최대 개방으로 촬영하면 배경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려진다. 그보다 멀어졌을 때에는 보케가 크게 맺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F1.4의 위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존 20mm 정도 화각에서 만날 수 없는 독특한 공간감은 시그마 20mm F1.4만의 매력이다. 과거에는 비슷한 화각에서 심도 표현 자체를 포기한 채 촬영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 렌즈를 사용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넓은 화면 안에 심도를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초광각 렌즈 특유의 원근감에 F1.4의 심도가 더해지면 생경한 풍경이 담긴다. 지금까지 어떤 렌즈로도 그려낼 수 없었던 풍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새로울 수밖에 없고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과거 초광각 렌즈가 조리개를 조이는 방법으로 거시적인 이미지만 한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면 시그마 20mm F1.4는 거시와 미시를 동시에 나타낼 수 있는 획기적인 장비인 것.
시그마 20mm F1.4의 스펙 때문에 단순히 조리개 값만 밝게 키운 렌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광각렌즈가 지녀야 할 기본기를 탄탄히 갖추고 있다. 우선 20mm 렌즈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왜곡이 잘 억제되어 있다. 수평과 수직을 맞춘 상태에서 촬영한 결과물은 20mm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선이 곧다. 시그마에서 공개한 그래프를 확인하면 기존 ⓐ 24mm F1.4 DG HSM과 비슷한 수준으로 왜곡을 억제하고 있다. 최대 개방에서 주변부 광량 저하가 보이지만 F2.8 정도부터 눈에 띄게 줄어들고 F5.6이 되면 거의 보이지 않는 수준이 된다. 11군 15매 구성 중 형석과 같은 성질을 지닌 FLD 글라스 2매, 특수 저분산 소재인 SLD 글라스 5매, 비구면 렌즈 2매를 사용해 색수차를 극복하는 동시에 광각렌즈만의 날카로운 묘사력, 우수한 콘트라스트까지 담보하고 있다. 기존 최대 개방 F4 광각 렌즈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발군의 성능이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류의 삶도 같이 변화했다. 자동차, 냉장고, 에어컨이 바꿔버린 일상은 혁명에 가까울 정도다. 사진이라고 다르지 않다. 새로운 장비가 등장하면 이는 곧 새로운 표현 방법으로 승화됐고 사진 예술의 영역은 그만큼 넓어졌다. 시그마가 ⓐ 20mm F1.4 DG HSM라는 기존에 없던 혁신적인 렌즈를 선보였다. 이제 사진가들이 이 렌즈와 함께 사진 예술의 영토를 얼마나 넓혀갈지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제품 사양
렌즈 구성 11군 15매
최소 조리개 F16
조리개 날 수 9매(원형 조리개)
화각 94.5°
최단 촬영 거리 27.6cm
최대 배율 1:7.1
크기 φ90.7mm x 129.8mm
무게 950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