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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tRain May 31. 2017

고장 난 필름 똑딱이를 고치다


아주 오래전, 필름으로 사진을 찍던 시절에 가방 속에 항상 들어 있던 카메라가 있었다.

후지필름에서 내수용으로만 출시했던 NATURA BLACK이다. 10년 전부터 써왔는데(엄밀히 말하자면 10년 전에 처음 샀던 바디는 직장 상사의 CONTAX T2와 강제로 교환당했고, 난 그 T2를 헐값에 팔고 한 8년 전쯤에 결국 다시  네츄라 블랙을 들였더랬다) 디지털 장비를 쓰면서 서랍에 보관해왔다. 

서랍에 처박아두게 된 계기는 디지털 장비의 사용 빈도가 높아져서가 아니다. 고장 때문이었는데, 필름을 넣어도 필름을 먹지 않은 증상이 발생한 것! 모터가 나갔거나 센서가 나갔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 생각하면서 그 상태로 방치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방이 휑한 것처럼 허전했는데 점점 그 상태가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네츄라가 없다고 사진 못 찍는 것도 아니고. 후지필름 디지털 똑딱이를 하나 더 들이면서 나름 허전한 부분을 채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러던 어느 날, 예전 직장 후배에게 필름 카메라를 하나 선물하기 위해 서랍을 뒤지다가 이 녀석을 발견한 것이다.

솔직히, 잊고 있었다. 

고장 난 상태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 심지어 배터리도 방전이 돼 전원도 안 켜지더라. 

그놈을 카메라 가방에 넣고 출근하자마자 배터리를 구해 전원을 넣고 점심시간에 카메라 수리실로 달려갔다. 

그런데 수리실 카운터 앞에 이미 열 개 정도 되는 필름 똑딱이들이 줄을 서 있더라. 

"요즘 이상하게 필름 똑딱이 수리가 많이 들어오네. 그동안 큰 카메라만 만져와서 작은 건 어렵더라고. 수리 시간을 넉넉하게 줘야겠어. 밀린 게 너무 많아."

그렇게 말씀하시는 수리실 사장님께 고장 증상을 말씀드리고 사무실로 돌아왔지.

수리비가 얼마가 들던 일단 맡겨야겠다고 다짐한 건 네츄라가 담아줬던 사진을 잊지 못해서, 다시 그 필름 사진을 찍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수리를 맡기기 전에 이베이를 통해 이 카메라의 중고 거래 가격을 보고 깜짝 놀랐기 때문. 박스까지 다 있는 민트급의 경우엔 1,000달러 정도에 거래가 되고 있었다. 그걸 보고 눈이 뒤집혀서  고쳐서 팔면 돈 되겠다는 생각에 수리를 결심하게 된 거고. 

그리고 일주일 정도 지난 귀 수리가 완료된 카메라를 들고 왔다. 수리비는 7만 7천 원.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나왔다. 

"필름을 이송하는 모터가 쇼트 났더라고. 어디 같은 모터를 구할 수가 있나. 그래서 모터를 수리했지." 

수리실 사장님 말이 맞다. 일본 내수 카메라다 보니 부품을 따로 구하는 게 쉽지 않다. 흔한 카메라였다면 다른 부품이 고장 난 놈을 수리용으로 같이 맡기면 될 일이지만 그렇지도 않고. 

수리가 끝난 녀석을 손목에 끼고 더운 충무로 길을 걷는데 건물들 사이로 남산이 얼핏 보였다. 

카메라 전원을 켜고 셔터를 눌러봤다. 필름은 없지만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지극히 정상이었다.

그래, 넌 아주 말짱해졌구나. 

집에 들어가서 필름을 넣어봐야지. 네츄라는 새 필름을 넣으면 반대방향으로 필름 전체를 다 말아버린다. 그리고 액정에 컷 수가 표시된다. 36방 필름을 넣으면 1부터 차례대로 36까지 숫자가 카운트된다.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 한 컷씩 다시 파트로네에 넣기 시작하고 액정의 숫자도 하나씩 줄어간다. 흔하지 않은 역 카운트 방식. 행여 의도치 않게 뒤판이 열리더라도 최소한 찍은 사진들은 살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수리된 카메라를 들고 집에 들어가서 냉장고에 묵혀뒀던 필름을 하나 꺼냈다. KODAK PORTRA 400NC. 이제는 단종되어 구할 수 없는 필름. 이걸 카메라에 넣자 기다렸다는 듯 잉잉 거리며 필름을  삼키기 시작했다. 그제야 이 카메라와 함께 했던 지난 시간들이 조금씩 기억나기 시작했다.  

그럴 일 없겠지만 누가 CONTAX T3와 바꾸자 그래도 안 바꿀 카메라. 후면 설정 액정 때문에 다른 똑딱이들보다 조금 두껍지만 나름 귀여운 생김새. 콘탁스 시리즈가 인정머리 없게 사진이 쨍하게 나와서 재미가 없다면 NATURA BLACK의 결과물은 묘하게 인간미가 넘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오래전에 촬영했던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중고로 팔아버리려 했던 생각이 쏙 들어간다. 

물론 카메라가 만들어주는 분위기도 있겠지만, 필름이 전달해주는 분위기도 무시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냉장고에 쟁여놓은 수많은 필름을 이제 좀 다시 꺼내 볼 때가 된 것 같다. 

디지털의 고화소 경쟁이 사진가들에게 뭘 남겨줬을까. 크게 인화할 수 있다는 것?(인화까지 하는 취미 사진가가 몇이나 될까) 마음껏 크롭 할 수 있다는 점?(처음부터 잘 찍으면 되는 걸) 사실 일반 취미 사진가들에게 지금의 고화소 디지털카메라는 짐만 떠넘길 뿐이다. 초고화소를 커버할 수 있는 고해상 렌즈가 필요한데, 가격도 만만찮고 크기와 무게도 엄청나다. 

고만고만하게 찍을 요량이면 고화소 디지털 바디가 그다지 필요 없다.

35mm 필름 정도면 충분한 경우가 더 많다.

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 계속될까. 디지털카메라도 어디까지 나아갈까.

한 템포 쉬는 느낌으로 서랍에 묵혀뒀던 필름 카메라들을 좀 꺼내서 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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