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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진 May 15. 2016

빨려 들어가는 공포감 곡성

#2 곡성 리뷰


어제 동생의 휴가에 맞춰서 한국에 왔다.
가족과 함께 요즘 말이 많은 곡성을 꼭 보고 싶어 영화관으로 직행
내 머리의 모래성들이 격정적 파도에 쓸려 내려가 바다로 뿔뿔이 흩어지는 경험을 했다.
여러 의미로 너무나도 소름 끼치게 무서운 영화.
리뷰 시작.



초반 인셉션과 파프리카를 방불케 하는 꿈을 이용한 현혹은 어디까지를 현실로 봐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꿈으로 봐야 하는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는 연출은 단연 지금까지 본 영화를 통틀어 탑에 들 정도로 완벽하다. 거기에  강약을 적절히 조절해 주는 완충적 음악은 숨을 쉴 수 있는 시간까지 마련해준다. 배우에게 분위기와 개연성이 결여된 장면을 연기하는 데 있어서 고도의 노력과 노하우가 없으면 하기 힘든 걸 알기에 이번 작품에서의 배우들의 열연에 격정적으로 감탄을 안 할 수가 없다. (특히 검정개와 귀신이 든 효진의 연기) 어느 하나 튀지 않고 세 가지의 요소가 하나가 되어 곡성이라는 완성도 높은 좋은 작품이 나왔고 또 그 그 작품은 나뿐만이 아니라 보신 모든 분께 후유증을 만들었을 것이다.



곡성은 곡소리의 뜻을 가지고 있는 5월 11일 날 개봉한 나홍진 감독의 신작 영화이다. 이전 작품인 '추격자'와 '황해'는 먼가에 홀리듯 숨 가쁘게 움직이는 친절한 장면들과 빠른 템포로 우리의 시선을 정신없이 옭아매던 작품이라면 이번 곡성의 영화는 뿌리에서 오는 메시지는 같은 다른 사람이 오마주 하여 만든 느낌을 준다. 영화는 산으로 둘러싸인 곡성이라는 마을에 의문의 살인사건의 시작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나홍진 감독의 곡성에서 말하는 인간은 쓸데없이 호기심이 많고 내면을 완곡히 지킬 수 있는 능력도 없으며 믿고 싶은 데로만 믿는 고집불통이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은 보기 좋은 그림 성곽과 같다. 인간의 무력함에서 오는 공포감에 휩싸인 나를 지킬 수 있는 건 의심뿐이다. 의심은 두려움을 낳고 언제나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보통 몰입도가 좋은 작품들을 표현할 때 숨도 못 쉬고 봤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 작품 또한 몰입도가 장난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진지하게 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이 무영을 만나 소문으로만 듣던 일본인에게 들켜 뜯기는 장면이 마치 꿈인 것처럼 종구는 잠에서 깨어나는데 그 순간 영화관 관객 모두가  무거운 숨을 뱉어내고 자연스럽게 생명활동을 이어가는 소리를 듣고 알게 되었을 때이다.  그만큼 나뿐만 아닌 영화관람객들이 모두다 한마음으로 몰입했다는 뜻이다.





나홍진 감독의 인터뷰 중에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잔혹한 범죄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스스로 행하는 것인가?' '악한 존재의 조종을 당하는 것인가?'라고 하였는데 영화를 본다면 이 답의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적어도 답은 열린 결말이고 결론은 우리들의 몫이다. 주인공인 종구는 차례로 4번의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는데 사막의 신기루가 내가 가장 열망하는 것을 투영하듯 현재 종구의 상황에 맞는 의심들을 하게 된다. 사실 그 의심들은 종구 스스로 만든 것인지 주위의 속삼임에서 오는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에서 튀어 오른다. 뉴스에서는 독버섯에 의한 환각증세라고 말해주지만 종구의 막을 수 없는 의심은 쓰나미가 되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영화의 무서운 연출은 어느 하나 확실한 것이 없어 아리송하다. 일광과 일본인이 굿을 하는 장면에서 마치 온갖 흰 것만을 가지고 굿을 하는 일광은 선이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못을 밖는 장면 뒤에 꼭 못을 박은 부위를 움켜잡는 효진을 보여줘 효진을 죽이고 있는 것처럼 연출하며 온갖 검정 것으로 칠해 놓은 일본인 굿은 악으로 표현하지만 박춘배의 사진을 놓고 박춘배를 살리기 위한 굿처럼 보여 준다. 일광이 굿을 멈춤과 동시에 깨어나는 일본인 앞에 귀신처럼 등장하는 무명을 보여주며 무명이 꼭 악인 것처럼 보여준다. 나중에 무명은 또 효진을 살리려는 착한 귀신으로 연출된다. 닭이 두 번째 울릴 때 가기 시작한 종구는 세 번째까지 기다렸다면 과연 가정을 지켜키고 해피엔딩으로 끝났을까? 마지막에 황정민과 일본인을 마치 동료인 것처럼 끝내지만 동료라는 증거는 마지막에 흘린 사진뿐이고 사진뿐으로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효진을 데리고 간 건 무명이고 효진을 살리러 가는 일광을 내쫓는 것도 무명이다. 마치 무명을 악이고 일광은 선인 것처럼 표현한다. 내가 쫓고 있던 선악의 관계들이 산산 조각나는 기분이다. 어느 누구도 선이 아니며 어느 누구도 선이 맞으며 어느 누구도 악이 아니며 어느 누구도 악이 맞다. 이미지란 건 얼마나 허망한가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미지가 고정관념이 되어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얼마나 많을까.



일광은 일본인이 착한 놈이라고 효진을 살리려고 했던 같은 무당이라고 관객들에게 깔아 놓고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일본인은 동굴에서 일본인과 마주하며 클라이맥스가 시작된다. 클라이맥스 부분은 종구가 아닌 이삼을 등장시킨다. 영화는 귀신과 무당과 오컬트가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도 사실감만은 확실히 챙겨주지만 이 장면에서 만큼은 확실히 신화적이다. 일본인은 종구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이삼에게만 말을 한다. 그리고 이삼은 어떤 결심에서인지 그 무서운 동굴을 낫 하나와 십자가 하나로 일본인과 마주한다. 결론적으로 생각한 건 인간은 내가 보고 싶은데로 보고 듣고 싶은 데로 듣는다. 악마라고 단정 짓고 찾아간 이삼이 아닌 종구가 갔더라면 다른 모습의 일본인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종구는 왜 하필 내 딸 효진인지 물어보고 일광은 낚시와 미끼를 가지고 설명한다.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누가 정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닌 운 나쁘게 효진이 걸린 것이라고 우리가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것이 아닌 행복과 불행이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무명은 종구에게 아비가 죄를 지어 업보를 받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말은 반대로 행복과 불행이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 아닌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귀신과 악마, 성경의 이야기, 무당, 교회, 동서양 불문하고 오컬트적인 요소가 나오는 현실감 떨어지는 무대에서 내가 조금씩 모아 소중히 쥐고 있던 모래들이 사실 모래 따위는 먼들 상관없다는 식의 관객까지 무력하게 만들고 끝내는 무기력하게 만드는 엄청난 영화다. 많은 장면들이 생각나지 않지만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돈 주고 아깝지 않은 느낌을 받았고 이번 주말 행복한 무기력에 빠질 것만 같다.




Authorling   |  JaoL

Photograph |  Ja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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