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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진 Feb 16. 2017

우린 알고있다 단지 행하지 않을뿐  : 더 큐어

#10 더 큐어 리뷰


스포가 있을 수 있음


우리에게 케리비안 해적의 감독으로 유명한 고어 버빈스키의 신작이다. 이 작품은 감독뿐만 아니라 제작과 각본까지 도맡았다. 언제나 새로운 시도는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미스터리 스릴러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투박하면서 스타일리시하다. 보통의 90분을 웃도는 비슷한 장르의 영화와는 다르게 146분이라는 획기적인 시도 또한 그중에 하나이다. 감독은 흥행 작품을 잘 만들어내는 사람으로 관객이 '보고 싶어'라는 마음을 들게 하는 방법을 잘 아는 디자이너라고 생각한다. 이번 영화에서는 보는 즐거움이 너무나도 지대하다. 꽉 막혀버린 회색 빌딩에서 시작해 대자연이 숨 쉬고 있는 힐링의 장소 스위스까지 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대놓고 자본주의를 비판이라도 하듯 컴퓨터 라이트에 의지하며 늦은 시간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하는 남자가 있다. 남자는 과로로 죽게 되고 그 남자의 빈자리는 록하트의 차지가 된다. 고속승진을 하는 그는 부정거래쯤이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며 부모님의 생일쯤 대충 부하에게 맡긴다. 어느 날 이사회에 소환된 그는 그 자리에서 편지 한 통을 보게 되는데 휴가를 떠난 회사 CEO의 편지다. 읽는 족족 옳은 말만 하는 그 편지는 어쩐지 그곳에서는 미친 생각을 하고 있는 편지가 되어있다. 회사 사정이 어렵게 되어 당장 CEO의 승인이 필요한 이사진은 록하트에게 CEO를 데려 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6000킬로를 날아 몽환적을 넘어 스산하기까지 한 의문의 '웰니스 센터'까지 오게 된다. 문이라고는 없는 이 곳은 평화로운 유토피아처럼 보인다. '웰니스 센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병이 있다고 말하지만 록하트가 보기에는 배드민턴을 치고 카드게임을 하며 수영도하는 지극히 건강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이상함을 떨쳐버릴수 없는 이 곳을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록하트는 유리컵에 파리를 잡으며 잡았다!를 외치는 노인들의 말처럼 이미 잡혀버린지도 모르겠다. 우리들 또한


영화의 제작은 “현대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고 비이성적으로 변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회에 만연한 느낌을 <더 큐어>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병의 치료법이 사실은 병 자체보다 더 끔찍할 수도 있다.”라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감독의 메시지는 욕망과 직결한다. 현대 사회가 병들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원인을 욕망에서 찾고 있다. 욕망은 여러 가지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명제들을 흐리게 한다. 더 큐어에서는 혈통의 욕망과 자본의 욕망이 대립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순수함을 가지기 위한 집착증과 더 높은 곳에 오르려는 야망이 잘못되었다고 강조한다. 게다가 저런 병들을 해소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더욱 큰 문제들을 범할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는 진실과 거짓이 얼마나 종이장 같은지 알려준다. 웰니스 센터의 사람들은 단 한 번도 이 곳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실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우선 의심부터 해야 한다. 거짓이라 할지라도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실된다. 믿음을 광적으로 치닫게 하는 게 물이다. 물을 마신 록하트에게 그런 의심을 심어주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영화는 병적으로 수면 위에 나를 그리거나 거울을 마주하고 있는 씬들을 보여주는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환각증세를 보이던 록하트는 의심을 품게 된다.

물이란 상징적으로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무서운 건 이미지에 있다. 이미지란 하나를 떠올릴 때 연상되는 일련의 것들인데 물은 긍정적인 것들뿐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믿어오던 것의 대한 배신은 큰 충격으로 오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유재석이란 사람이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에 정반대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자.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은 뒤통수는 맞아본 적이 없기에 상상할 수도 없다. 영화가 끝나고 물을 멀리하게 되거나 장어를 못 먹게 되는 경우가 이런 경우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허황된 것들이 많은지 조금은 무기력해진다.


사실 영화는 146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지만 설명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판타지적인 요소가 너무나 강하다. 영상미에 너무 취중한 탓인지 감독의 의도인지 떡밥을 생각하며 보고 있으면 어느새 찜찜한 엔딩을 볼 수 있다. 어디서부터 고어 버킨스키의 이야기가 시작된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스위스 기차와 함께 터널에 들어가면서 일까? 아니면 교통사고가 나고 자동차 찌꺼기에 뒤엉켜 죽어간 사슴을 보면서 일까? 어쩌면 옛날 아버지의 죽음 이후부터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록하트가 꿈에서 깨어나 눈을 뜰 때 알 수 있을 노릇이다. '나인'의 대사가 떠오른다. '믿고 싶은 판타지는 믿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라' 지금쯤 고어 버빈스키는 마지막 록하트의 비열한 썩소를 짓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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