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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진 Jul 03. 2017

박열

#12 박열 리뷰

스포가 포함된 리뷰입니다.


인생이란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끝없는 행진이다. 그 행진 가운데 자신의 신념이 고착화되고 그 고착화된 신념을 나눌 벗이 있다는 건 죽음을 행해 가는 고통의 불길 위에서도 호탕하게 웃으며 행진가를 불렀으리라. 박열에게

출처 : 박열


박열은 이준익 감독의 신작으로 사도와 동주에 이어 비슷한 면이 있는 영화다. 앞선 사도에서는 편집증이 심한 왕 영조와 아들 사도세자와의 소통과 화합이 끝내 실패하며 영조는 자기 손으로 아들을 죽이는데까지 오게 된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고는 하나 친 아들을 손수 죽이겠다는데 말리지 못하는 대신들만 봐도 그 당시 왕권의 힘은 천왕 못지않았을 것이다. 동주 또한 태어난 해가 1917년으로 이미 일제강점기 안에서 태어났다. 거대한 폭력 안에서 나고 자란 윤동주는 펜과 함께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폭력 앞에서 맞서 싸웠다.

이번 작품 박열 또한 1902년 생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강점기를 맞이하고 동주와 시기 상적으로는 차이가 있으나 가지게 되는 마음은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광기에 사로잡힌 시대와 싸워야 하는 청년들의 이야기로 청년들과 끝없이 소통을 시도하는 이준익 감독.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옳은 게 옳게 진행되고 있나 아니면 모습을 변형한 광기가 자행되고 있지는 않는가 하고 되짚어 보게 된다. 아버지와의 소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고만 사도와 끝까지 일제에 굴복하지 않다가 죽임을 당한 동주와 후미코를 잃고 22년을 옥중에서 보낸 박열을 보며 생각했다.

출처 : 박열


영화의 시작은 고증을 충실히 반영한 영화라고 호소하며 시작된다. 그러니 우리는 영화를 바라볼 때 다소 극적이거나 쥐어짜는 감정을 느낄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야기의 흐름은 담백하고 물 흐르듯 흘러가기보단 기름 흐르듯 모여줄 때는 모여주고 큰 흐름이 없는 곳에서는 웃음도 해학도 있다. 결속력이 강하게 느껴지는 부분에서는 촘촘하게 들끓는 마음도 느낄 수 있다. 감독이 염려한 부분도 이곳에 있다. 한국 감독이 일제강점기를 다뤘으니 당연히 한국 입장에서만 보는 영화가 아니냐라는 말이 듣고 싶지 않았다. 철저하게 사실 기반을 이야기하였고 실존인물들을 등장시켜 어떠한 외곡도 하지 않았다는 감독의 선언서 같은 말이다.


개새끼를 자처하는 박열은 인력거꾼과 여러 단체를 만들어 일본 안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박열이 지은 시 '개새끼'를 보고 첫눈에 반한 후미코는 박열에게 동거를 제안하고 박열은 그런 후미코가 싫지 않다. 동거 제안을 받아들인 그들은 동거 서약을 만들고 일본에 폭탄을 가져올 계획을 세우고 있다. 박열은 이름에서 느껴지는 폭탄 같은 인물이다. 일본땅 안에서 친일을 일삼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심판의 발길질도 서습없이 하며 시비를 거는 일본인들에게 칼을 들이미는 대담함도 가지고 있다. 박열의 폭탄 같은 행동은 관동대지진 이후에 조선인 대학살이 시작되며 더욱 가증된다. 우물에 독을 타고 조선인들이 여기저기 불을 지르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지고 각종 유언비어가 성행하게 되는데 일본 정부는 관동대지진으로 흐트러진 민심을 바로잡기를 원했다. 일본 정부는 내부를 결속하기 위해 외부에 적을 만드는 정책을 쓰게 되며 그 과정에서 저런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다닌 것이다.


길 한복판보다는 옥살이가 더 안전하다며 옥으로 자처해 들어가며 옥중에서도 잘 못한 것이 없으므로 떳떳하게 일본세력을 소용돌이치는 흡입력으로 좌지우지한다. 일본의 자경단이 온 동내를 뒤지며 무차별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관경을 보며 분노에 휩싸여 개새끼들이라고 욕하기 전에 시야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영화의 목적은 여기에 있다.

출처 : 박열


우리가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는 틀은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획일화되어있다. 우리가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는 시선은 탄압과 폭행, 자유의 박탈, 침략의 잔인성 등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분노다. 영화는 획일화된 틀을 깨고 확장된 프레임으로 보기를 원한다. 독립운동가들을 대변하는 유일한 일본인 국가유공자 후세 다쓰지, 후미코와 같은 인물이 확장된 프레임을 돕는 인물들이다.


박열이라는 청년이 거대 세력과 맞붙는 장면들은 실제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랍다. 일제강점기를 다루는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극적이고 비장하며 처절하게 맞서 싸우지만 박열에서는 일본 정부를 가지고 놀며 조롱한다. 일본 대지진을 이용하여 조선인들을 핍박하고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는 정부에게 너의가 잘못하고 있다고 혼내며 잘못을 인정시키는 과정은 영화보다 영화 같은 이야기다.


아나키스즘은 민중의 소유물이다. 영영 실패를 이어가야 하는 아나키스트들은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이어야만 한다. 아나키스트들은 때로는 과격하게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건 아주 단순하고 영유아들에게 많이 쓰는 말에 있다. 잘못한 행동을 돌아보게 하고 반성하게 하는 게 아나키스트들의 일이다. 대상만 다르지 페미니즘도 같은 맥락에 있다. 부당한 권력에 투쟁하여 권력을 잡자는 게 아니라 저항하자는 말이다. 페미니즘 또한 남성 위주의 사회를 뜯어고쳐 여성 위주의 사회로 만들자는 게 아니라 남성 위주의 사상에서 저항하자는 말이다.

출처 : 박열


박열과 후미코의 경험이 둘을 아나키스트의 길로 인도했지만 영화의 러닝타임으로는 설명이 부족해 보일 수도 있다. 그들의 글을 통해 일본 순사와 변호사들이 둘을 이해하는 것처럼 우리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이해하고 있다. 어떠한 이념도 필요 없고 강요된 사상 또한 필요 없다. 박열의 말처럼 우리는 오직 경험에 의해서만 움직일 뿐이기 때문에.


★★★★

 


Authorling   |  Ja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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