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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tsky Dec 17. 2022

어쩌다 DT

01 - 아직은 걸음마 디자이너

내 학창 시절은 온통 건축이었다. 


사실 건축과는 단지 

이것저것,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마지막에 갑자기 선택한 학과였다. 


그렇게 입학 후 건축학 개론 첫 시간.

교수님이 영화를 한편 틀어 주셨다. 

"8월의 크리스마스 - 한석규, 심은하.."


영화가 끝날 무렵 갑자기 영상을 멈춘 교수님. 

"영화에 나온 사진관 어때요?" 

지금도 군산에 가면 단팥빵 하나를 물고 

사진 한 장 찍으러 가는 '초원 사진관'이었다. 


"지금부터 이 사진관을 새롭게 디자인해 보세요~! 

한 장에 다 그린 사람은 제출하고 집으로~!"


아직 건축에 익숙하지 않은 새내기들은 우왕좌왕

연필을 잡고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러다 집에 못 가겠네;;'


그러던 중 재수강생으로 보이는 형님이 순식간에 제출하고 

강의실 문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역시 건축과 선배들은 멋있어!


다음 시간, 그 선배의 그림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형님의 그림은 꽤나 정확하면서도 종이를 가득 채운 원. 

그냥.... 동. 그. 라. 미.


교수님은 그... 좀 정확하고 큰 동그라미에

새내기들의 박수를 강요했고..


그날 교수님의 강의는 마치... 안드로메다 어디쯤에 있는 별.... 에 사는

그저. 새로운 종족의 언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이 날부터 나는 디자이너로 살아갈 다짐을 했다. 


건축학도로 한해, 두 해를 보내며

피타고라스를 통해 배웠던 기하학이

내 머리와 마음속에서

아름다움과 인간의 삶을 표현하는

새로운 언어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내가 살아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사는 느낌. 


어느 겨울 도서관 700번대 서가에 앉아 

그냥 지구에 발붙이고 있는 건물은 

모조리 기하학으로 바꿔보는 수련을 했고..


르 꼬르뷔지에, 미스 반데로에, 안도 다다오, 김수근, 렘 콜하스, 스티븐 홀... 

그간 교과서에서 만나 보지 못했던

새로운 지구인들을 만났고

앞서 접했던 안드로메다의 언어를 습득하게 됐다. 


그 후에 나는 연속되는 공모전 탈락의 가혹한 겨울을 지나 

건축문화대상 우수상, 강구조 디자인 공모전 동상, 래미안 디자인 페어 특선 등 

다양한 학생 디자인 공모전을 수상하는 영애를 얻게 된다.




누구나 모든 일에는 처음이 있다. 


처음은 항상 두려움으로 다가오지만, 

지구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살고 있던 삶이라고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보자. 


그러다 보면 그 첫날은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짜릿한 선물이 되는 

어느 하루가 되어 있기도 하다. 


술자리에서 한마디라도 더할 수 있게 되는

기회는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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