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기자생활 ①
기적의 대장내시경
2025년 8월. 계속 미뤄왔던 과업 하나를 끝냈다. 바로 대장내시경. 입사한 이래로 4년 넘게 술을 부어댔으니 뱃속에 100% 뭐라도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은 과민반응이라고 말씀하셨다. 30대면 창창하다고. 40대에 받아도 아무 문제없다고. 하지만 먼저 이 공포의 검사를 경험한 친구들은 한 번쯤 해서 나쁠 건 없다고 했다. 검진 당일 다른 모든 검사를 끝내고, 대장내시경 차례가 되었다. 뒤가 뻥 뚫린 바지를 입고 두근대는 마음을 갖고 시술대 위로 올라갔다.
"약 들어갑니다. 눈 감으세요."
20분 뒤 아무런 기억 없이 눈을 떴고, 침대에 새우자세를 한 채 엎드려있었다. 눈을 다섯 차례 정도 끔뻑거리니 간호사 선생님의 말씀이 들려왔다.
"깨끗합니다."
"용종 안 나왔나요?"
"네 없어요"
만세! 속으로 쾌재를 외치며 가스로 찬 배를 움켜잡고 죽을 먹으러 갔다. '다음부턴 꼭 술을 적당히 먹으리라' 다짐을 한 번 더 해본다. 하지만 내 직업은 기자인데, 사람 만나는 게 일인데, 사람 만나면 술 마셔야 하는데, 이 다짐이 언제까지 또 지켜질지 모르겠다.
취재의 연장선
투명한 글라스에 소주 1/5, 맥주 3/5. 휙휙 저어 사람들에게 딱딱 전달한다. 나는 맥주를 조금만 넣는 편이다. 한 입에 털어 넣기 좋으려면 잔 절반 정도만 채우는 게 좋다고 선배들에게 배웠다. 취재원들과 한 잔, 두 잔 걸치다 보면 딱딱했던 분위기는 자연스레 누그러진다. 명함을 건네며 서로 머쓱했던 사람들이 순간 '형, 동생'이 된다. 벌게진 얼굴만큼 입근육도 부드러워진다. 호구조사는 끝났고, 슬슬 민감한 정보를 떠볼 시간이다.
"아 이런 거 얘기하면 안 되는데…이 기자, 술이 술술 분다고 해서 술이야"
전략이 통했다. 겉은 취했지만, 정신은 똑바로 차려야 한다. 취재원이 해주는 말을 잘 기억했다가 정보보고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기삿거리는 아니지만 추후 더 취재해 볼 만한 정보의 가치가 있는걸 기자들은 정보보고라고 한다. 기자 초년생 때는 술자리 복기가 너무 어려웠다. 몰래 음성녹음을 해 높고 집에 가서 두 시간을 다시 들으며 정보보고를 만든 적도 있다. 이제는 중요한 말들만 카톡에 단어로 저장해 뒀다가 그 자리를 연상하면서 풀어내는 실력이 됐다.
"기자면 술 많이 드시겠어요"
이 직업을 가진 뒤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다. 그럼 술 못 마시면 기자를 못할까? 사실 그렇진 않다. 내가 아는 몇몇 선배만 봐도 술 못 마시는 사람들이 꽤 있다. 술 한잔 안 걸치는데 도대체 저런 정보는 어디서 습득했는지 현란한 선배들도 있다. 그래도 술을 할 줄 알면 확실히 유리한 건 맞다. 코로나19가 퍼지기 전 대부분의 언론사들은 음주면접이라는 걸 실시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야만적이다. 하지만 언론사에서 음주면접을 했던 이유는 분명 있을 것이다.
AI가 모든 직업을 대체할 수 있다는 무서운 예언이 나오는 요즘. 적어도 AI가 기자를 대체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물론 현장에서 직접 취재를 하는 기자에 한정한다면) 아직 술까지 마셔주는 AI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자에게 술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조금 강하게 표현하면, 일종의 '무기'가 아닐까. 지난 2016년 한 교육부 고위공직자가 한 신문사 기자들과의 자리에서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개돼지로 먹고살게만 해주면 된다" "신분제를 공고히 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가 바로 자리를 빼야 했다. 이외에도 굉장히 딥한 특종거리들이 술자리에서 나오기도 한다. 꼭 특종이 아니어도 좋다. 대부분의 술자리는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진행되기 때문에, 말 못 할 조직의 고민들이 안줏거리로 오른다. 기자들에게는 술자리만큼 취재하는 대상이나 조직의 현 상황을 알아내기 좋은 기회가 없다.
그래도 술을 취재도구로만 생각한다면 너무 낭만이 없다. 여느 날과 달리 속보와 단독이 터져 나오면, 기자실에는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온다. 이대로 집에 가긴 적적하고, 스트레스도 쌓였다. 그럴 때 연락 오는 "오늘 저녁에 일 없으면 합류해"라는 선배의 카톡이 반가울 때가 종종 있다. 어렸을 땐 몰랐지만 거나하게 취해 집에 들어왔던 아빠의 맘이 이해되는 요즘이다.
그래도 바뀌지 않을까
회식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는 요즘이다. 퇴근 후 술자리에 간다는 다른 친구들은 거의 못 봤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겪어봤을 때 기자라는 직업과 술을 완전히 떼어놓긴 힘들다. 앞서 서술했듯, 술은 사람과 사람사이를 연결해 주는 가성비 좋은, 효과적인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글을 쓰며 생각해 보니 9 to 6가 당연한 세대에게 기자라는 직업의 인기가 점점 떨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래도 바뀌지 않을까. 경찰서에서 먹고자며 밤샘 취재했던 소위 '하리꼬미' 문화도 사라졌고, 언론사도 육아휴직을 눈치 보지 않고 사용하는 시대다. 취재원들도 저녁보다는 점심을 선호한다. 기자에게도 술이 필수가 아닌 날이 오길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