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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승리의 기록

좋은 흐름을 만들어 가고 있다

by 이지안

1. 올해 들어 가장 공을 들였던 CEO 영상 메시지 촬영이 끝났다. 현 CEO는 연임에 성공했고, 이번 메시지는 연임 이후 처음으로 구성원에게 전달되는 스피치다. 앞으로 새로운 임기를 끌고 나가는 본인의 포부와 경영방침이 영상에 담겼다.


2. CEO 메시지는 크게 세 가지 내용을 다룬다. 비전과 얼라인 해서 일할 것, 일하는 방식을 개선해서 실행력을 높일 것, 서로 소통하고 협력할 것. 이 3가지 방향성은 내가 제안한 것이기도 하다. 결과물은 단순히 10분짜리 영상 하나지만, 이 영상 메시지 하나가 나오기까지 여러 과정과 우여곡절이 있었다.


3. 시작은 작년에 실시한 조직문화 진단이었다. 비전에 대한 구성원 공감도가 낮게 나왔고, 나는 후속 활동으로 CEO 메시지 강화를 계획했다. 조직에서 비전을 가장 강조해야 할 사람이 CEO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통상 연 2회 정도 게시되는 CEO 메시지를 최소 분기 1회, 연 4회로 늘리자는 비교적 단순한 접근이었다.


4. 하지만 올해 들어 일이 좀 커졌다. 일단 CEO 메시지의 형태가 기존 텍스트에 영상으로 바뀌었다. 전달력을 높이기 위함도 있고, 직원들의 제안도 있었다. 신세계 정용진 회장의 신년사 영상이 핫했던 영향도 있다. 덕분에 CEO '영상' 메시지를 제작하게 됐다.


5. 이왕 영상으로 할 거 요즘 스타일로 하자고 제안했다. 정장에 넥타이 차림으로 단상 위에서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 느낌으로 하지 말고(지금까지는 그랬다), 노타이셔츠의 캐주얼한 차림에 높은 의자에 앉아서 말하는, 그리고 자막 플레이를 통해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는 요즘 느낌으로 하자고 말했다. 다행히 위에서 OK가 떨어졌다.

*카카오 if, EBR 토스 이승건 대표 편을 레퍼런스로 많이 참고했다.


6. 문제는 대본이었다. CEO 메시지 작성은 원래 다른 부서에서 담당했다. 내 계획은 그걸 받아서 대본으로 만든 다음 CEO 영상 메시지 촬영을 하는 것이었다. 영상 제작 일정 때문에 평소보다 CEO 메시지가 빨리 완성되어야 했지만, 담당 부서에서는 빨리 해줄 이유가 없었다. 급한 건 우리 쪽이었다. 담당 부서는 아직 아무것도 작성된 게 없으니 내용을 제안해주면 그걸 참고해서 작성하겠다고 했다.


7. 이걸 알게 된 우리 조직의 최고 리더가 아예 새롭게 임기를 시작하는 CEO에 맞춰서 조직문화 전략방향을 새롭게 수립한 뒤, 그걸 CEO 메시지를 작성하는 담당 부서에 제안하라고 오더를 내렸다. 졸지에 회사 조직문화 전략방향을 새롭게 수립하게 됐다.


8. 다행이라면 내가 짬밥이 안 되는 관계로 부서 선임이 조직문화 전략을 수립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불행이라면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우리 회사 조직문화 방향성이 이래야 한다"를 직접적으로 반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9. 부서 선임은 새로운 조직문화 방향성에 대해 각자 생각해 오라고 말했다. 통상 이런 경우, 자신의 업무가 아니면 아이디어 정도로만 준비해서 회의에 참여한다. 그런데 나는 내가 생각했던 방향성을 새롭게 수립되는 조직문화 전략에 반영하고 싶었다. 한번 정해지면 최소 몇 년은 그 방향성으로 가야 했다. 나는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방향성이 세팅되기를 바랐다. 나는 최대한 구체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게 자료를 준비해서 회의에 참여했다.


10. 부서에서 CEO 메시지 담당 부서에 제출한 자료의 90%는 내가 제안한 아이디어로 구성됐다. 그리고 그 자료가 매우 매우 잘 통과되어서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CEO 메시지도 제출한 자료의 방향성을 고스란히 담아서 작성되었다.


11. CEO가 말하면 죽는시늉이라도 하는 게 우리 조직이다. 하물며 새로운 임기를 시작하며 처음으로 공식적인 스피치를 하는 영상이다. 꽤 구체적으로 개선 과제들이 메시지에 들어가 있어서 조직 내 파급력이 클 수밖에 없다. 그 과제 중에는 조직문화 진단 이후 내가 계획하고 있는 것들도 있다. 앞으로의 활동에 탄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12. 만약 작년에 조직문화 진단을 실시하고 CEO 메시지 강화를 계획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영상 메시지가 나올 수 있었을까? 만약 부서에서 조직문화 전략방향을 수립할 때 대충 아이디어만 던지고 말았다면 내 생각이 CEO 메시지에 반영될 수 있었을까? 내가 순간순간 내렸던 몇몇 선택들이 모여서 내 생각이 반영된 CEO 영상 메시지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13. 작년 조직문화 진단 이후 눈에 띄는 조직문화 변화가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느리지만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고무적인 건 진단 이후로 어떤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다. 영상 메시지 업로드 이후 시작할 활동도 이미 준비가 끝났다.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한번 끝까지 가보자.


"자유의 진정한 의미는 삶이 주는 제약과 억압의 실체를 직시하면서도 결연히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선택하는 데 있다. 어떤 것도 통제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자유를 포기하면 복종이 익숙해진다. 복종이 익숙해지면 복종을 강요하는 것들에 대한 허상의 이미지가 생기고, 그마저 진실인 양 받아들이게 된다. 삶을 제약하는 권력은 앞으로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우리를 제약할 것이다. 그러니 복종하기 전에 생각해야 한다. 의심을 품고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한 걸음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가 도덕적 자부심을 가진 자유인이라면 그 걸음으로 자기 존엄을 증명해야 한다."
- 이창준, <진정성의 여정>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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