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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 Jul 24. 2021

권한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획득하는 것이다

조직문화 담당자로 일하며 큰 전환점이 되었던 말

침몰하는 배에 탑승하신 걸 환영합니다


"우리 부서는 침몰하는 배야. 지안 씨도 열심히 해서 빨리 다른 데로 가"


부서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을까? 선배가 따로 불러서 한 말이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지만 부서의 역사를 보면 침몰하는 배가 맞았다.


부서 초창기만 해도 미래가 밝았다. 신임 CEO가 부임하며 야심 차게 HR 혁신 TF가 꾸려졌다. HR 혁신 TF는 크게 인사와 문화 2개 부서로 나눠졌는데, 이때 생긴 문화 담당부서가 지금 조직문화팀의 전신이다.


TF는 몇 가지 변화에 성공했지만 '혁신'이라고 부를 만한 결과는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며 CEO의 관심은 사라졌고, TF의 규모와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조직문화팀은 흔히 말하는 '끗발' 있는 조직 소속에서 점차 힘없는 조직 소속으로 바뀌어 갔다. 그런 와중에 내가 부서에 합류했다.   


기존 멤버들은 맡은 일은 열심히 했지만 사기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열심히 해도 CEO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우리 부서는 뭔가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한탄을 자주 들었다. 자꾸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지금의 '상황'에 불만을 가지게 됐고, '어차피 여기는 뭘 해도 안 되는구나'라는 선입견이 생겼다.


권한에 대한 관점이 바뀌다


그러던 중 나의 선입견을 깨는 사건이 발생한다. 외부 커뮤니티에서 <어서 와 리더는 처음이지> 저자이자 얼라인업의 대표 장영학 님을 만나게 된 일이다. 당시 영학 님은 샌프란시스코에 열린 조직문화 컨퍼런스 'Culture summit 2019'에 다녀온 직후였다. 마침 영학 님이 컨퍼런스에서 참여한 세션의 주제가 '권한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조직문화를 바꿀까?'였다. 영학 님의 세션 참여 후기는 처음부터 신선한 충격이었다.


"스스로 권한이 없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내 생각의 시작점은 '권한이 없다'였다. 하지만 '권한이 없다'를 전제로 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고 있었다. 조직문화 담당자로 일하려면 권한이 없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권한을 획득하기 위해서 어떤 활동들을 해보셨나요? 세일즈맨처럼 영업도 하고 윗사람을 설득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웠다. 그동안 권한이 없다고 툴툴거렸을 뿐 권한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권한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획득하는 것이다'로 관점이 바뀌었다. 그리고 '우리 부서에 CEO가 관심이 없다면 관심 가질 만한 일을 만들어주겠다' 스스로 다짐했다.


권한을 획득하기 위해 판을 벌리다


'어떤 일을 벌이면 조직문화 개선 활동에 관한 권한을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중 눈에 들어온 업무 아이템이 있다. 바로 조직문화 진단이다.


조직문화 진단을 하면 현재 조직이 어떤 상황인지, 무엇이 문제인지 객관적인 데이터로 알 수 있다. 이 정도 내용은 최소 CEO 보고감이다. 거기다 문제가 발견되면 당연히 문제 해결을 위한 조직문화 개선 활동을 해야 한다. CEO 관심을 얻어냄과 동시에 업무를 추진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조직문화 진단을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소소한 문제는 있었다. 일단 내가 조직문화 진단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팀에도 해본 사람이 없었다. 거기다 컨설팅을 쓸 수 있는 예산도 없었다. 그야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야 하는 상황. 그런데 용케 겁도 없이 무조건 고(go)를 외쳤다.


조직문화 진단 계획안을 써서 통과시키고, 사돈에 팔촌 인맥까지 동원해서 조직문화 진단을 하는 다른 대기업 담당자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리고 벤치마킹을 위해 포항까지 다녀왔다. 문항을 개발하고, 전 직원 4,000명 대상으로 설문을 돌리고 결과 분석과 개선방안까지 담은 결과보고서를 만들었다. 팀원들의 도움을 중간중간받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과정을 혼자서 진행했다. 한 해의 절반을 정말 숨 가쁘게 보냈다.


그렇게 최종 작성된 진단 보고서는 CEO를 포함한 모든 경영임원에게 공유되었다. 다행히 당시 부사장님이 보고서의 메시지에 공감해 '우리부터 바뀌어야 한다'라고 임원회의에서 30분 넘게 한참을 이야기했다고 전해 들었다. 부사장의 불호령에 깜짝 놀란 몇몇 조직들은 자체적으로 조직문화 개선방안을 수립하기도 했다. 고생은 했지만 분명히 성과는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진단 이후 부서의 업무 범위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기존에는 이벤트, 캠페인, 조직 활성화가 부서 업무의 대부분이었다면 진단 이후로는 개선 필요성이 강하게 발견된 일하는 방식 개선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조직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리더들을 지원하는 업무도 생겼다. 진단 이후 한층 더 조직문화팀다운 일을 하게 됐다.   


변화의 시작은 담당자 스스로 자신의 힘을 믿는 것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처음에 부서에 왔을 때 들었던 '경영진은 우리 부서에 관심이 없다'는 맞는 문장이 아니다. '경영진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을 우리 부서가 만들지 못했다'가 맞는 문장이었다. 조직문화 진단이라는 판을 벌리자 거기에 경영진은 반응했다. 그리고 후속 활동을 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어졌다.


조직에서 개인의 영향력은 어디까지일까? 예전의 나는 큰 조직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미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다.


분명히 조직에서 한 개인은 작은 톱니바퀴다. 하지만 다른 수많은 톱니바퀴와 맞물려 있다. 혼자의 힘으로 안된다면 나보다 더 큰 톱니바퀴의 힘을 빌리면 된다.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렇게 다른 톱니바퀴를 하나씩 움직이다 보면 어느 순간 거대한 조직이 움직인다. "충분히 긴 지렛대를 달라. 그러면 나 혼자서 지구도 움직일 수 있으니"라고 말했던 아르키메데스처럼 자신의 힘을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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