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지만 도전해볼 만한 업무
돌이켜 보면 조직문화 진단이 많은 것을 바꾸었다. 설문 문항을 통해 우리 조직의 현 상태를 진단하고, 개선방안까지 수립하는 프로젝트였다. 진단 이후 가장 큰 변화는 내가 속한 팀의 역할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원래 우리 팀은 이벤트, 조직 활성화를 주로 했다. 하지만 진단 이후 일하는 방식 개선, 비전 내재화가 업무의 중심이 되었다. 혼자서 속만 끓이던 각종 프로젝트들을 조직문화 진단을 계기로 공식적으로 직접 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건 데이터가 갖는 '설득의 힘' 덕분이다. 조직문화 담당자의 업무 특성상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는 일이 많은데, 이때 데이터를 잘만 활용하면 상대방의 동의를 쉽게 얻어낼 수 있다. 데이터를 활용하면 '근거 없는 담당자의 개인 의견'이 '데이터에 근거한 합리적인 주장'으로 바뀌고,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우선순위가 생긴다. 데이터를 보면 내부 구성원이 느끼는 문제점이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3,900명의 설문 데이터를 모아서 가져가자 경영진도 함부로 설문 결과를 무시할 수 없었다.
진단은 조직문화 팀이 갖는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업무이기도 하다. 조직문화 팀의 약점이라면 업무 결과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데이터를 활용하면 보이지 않는 문화를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특히 경영의 언어인 '숫자'로 보여줌으로써 경영진에게 전달력을 높일 수 있다. 조직문화 팀이 각종 설문과 진단을 주기적을 실시하는 배경에는 이런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고 본다.
고작 한 번 조직문화 진단을 실시한 주제에 진단에 있어 전문가인 양 행세할 생각은 없다. 다만 문항 개발부터 설문 실시, 후속 활동 계획까지 직접 해본 경험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나와 비슷하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새롭게 진단을 실시해야 하는 분들에게는 내 경험이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데이터를 활용해 본격적으로 업무에 적용하는 방법은 다른 서적을 참고하면 좋다. 플랜비 디자인에서 나온 <데이터로 보는 인사 이야기>를 읽으며 저렇게도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구나 많이 배웠다)
1) 문항 개발은 어떻게 해야 할까
문헌조사와 벤치마킹
진단을 실시하려면 먼저 진단 문항을 개발해야 한다. 진단 문항을 정하는 건 '조직문화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 중 무엇을 측정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사실 이 '기준'을 정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렵다. 가장 먼저 '도대체 무슨 근거로 기준을 정할 것인가'의 문제에 봉착한다.
이럴 때 쓸 수 있는 방법은 우선 기존에 개발된 진단도구, 진단 문항을 살펴보는 것이다. 기존 진단 도구들은 어떤 기준을 고려해서 프레임을 구성했고, 왜 이런 기준들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살펴보는 것 자체가 진단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다. 관련해서는 국민대 김성준 교수님이 쓴 <조직문화 통찰> 2부의 '설문조사를 해야 할까?' 챕터를 살펴보면 큰 도움이 된다. 진단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 대표적인 진단모델에 대한 소개, 문항 개발 시 유의사항을 알 수 있다.
보다 구체적인 문항에 대해 알고 싶다면 논문 검색을 하면 좋다. 논문 검색사이트(구글 학술 검색, RISS 등)에 조직문화 진단, 7S모델 등을 검색어로 넣으면 관련된 논문들이 나온다. 논문의 특성상 앞부분에 관련된 선행연구를 요약해두는데, 이 부분만 읽어도 진단 모델과 관련해서 핵심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 몇몇 논문은 부록으로 자신이 연구에 사용한 설문 문항을 첨부해 두었다. 이런 문항을 참고하면 대략 어떤 문항들이 사용되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현실적으로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건 이미 진단을 오랜 기간 수행했던 기업들을 직접 방문해서 벤치마킹한 것이다. 조직문화 진단을 실시하고 있는 국내 대기업 4곳을 방문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벤치마킹을 성사시킨 특별한 요령은 없었다. 사돈의 팔촌 인맥을 모두 동원해 관심 있는 기업의 담당자 연락처를 찾아냈다. 몇 년 전에 다른 업무로 벤치마킹을 갔던 기업 담당자에게 뻔뻔하게 연락해 인사부서 연락처를 물어보기도 하고, 아내 친구 남편이 벤치마킹 가려는 회사에 근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내를 통해 연락처를 확보하기도 했다.
벤치마킹을 통해서는 각 회사별로 어떤 진단 프레임을 활용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자세한 문항까지는 대외비라 볼 수 없었지만 진단 프레임까지는 대체로 알려주었다. 그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그 외에도 설문 실시할 때 유의사항, 설문 결과 활용방법, 진단에 대한 조직 내 반응 같은 실무 관점에서 궁금했던 내용들을 들을 수 있었다.
실무자의 절박함은 같은 실무자가 제일 잘 아는 법이다. 거절을 두려워하지 말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들이대면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친절하게 도와준다.
내부 구성원 인터뷰와 문항 수정
벤치마킹이 끝난 다음 '와 다른 회사는 진단 프레임이 체계적으로 잘 짜여 있다'라고 생각했다. 진단을 실시한 역사가 길고, 컨설팅을 받거나 외부 전문가와 협업했기 때문에 진단도구의 완성도는 높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전문가도 아닌데 개발할 수 있을까?' 살짝 기가 죽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도 남았다. '진단 프레임은 멋있게 짜여 있지만 과연 이대로 진단을 실시하면 정말 조직문화가 좋아지는 걸까?' '보고서는 예쁘게 나올 것 같기는 한데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 처음부터 진단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진단 이후의 개선활동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우리 회사 상황에 맞는 진단 문항 개발에 대한 고민이 커졌다.
그러려면 우리 회사에 맞는 문항을 완전히 새로 만들어야 했다. 진짜 우리 회사에 맞는 문항을 만들기 위해 임원부터 신입사원까지 40명의 직원을 팀원들과 함께 인터뷰했다. 인터뷰할 때의 핵심 질문은 '우리 회사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데 저해요소가 무엇인가?'였다. 글로벌 사업이 최근 회사의 가장 중요한 이슈였기 때문에 선택한 질문이었다. 한 달 정도 팀원들과 나눠서 직원들을 인터뷰했다. 상황에 따라 1:1, 그룹 인터뷰 등 다양하게 실시했다.
인터뷰 실시 후에는 부서 워크숍을 거쳐 핵심적인 키워드를 추출했다. 그다음이 가장 어려웠다. 키워드는 나와있는데 이걸 어떻게 문항으로 만들어야 할지 막막했다. 여기서부터는 앞서 조사해두었던 기존 문항들의 설문 문항을 많이 참고했다. 인터뷰에서 나온 키워드를 측정할 수 있는 기존 문항이 있다면 그걸 참고하고, 없다면 직접 문항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초안을 팀원들과 회의하며 다르게 해석될 여지는 없는지, 원래 묻고 싶었던 내용을 제대로 묻고 있는지 검토하며 계속 수정했다. 그렇게 지옥의 무한 수정을 거친 다음에서야 진단 문항이 완성되었다.
2) 설문 실시와 진단 결과 분석 수립
인적정보 수집 범위 정하기
설문을 실시하기 전에는 우선 인적정보를 얼마나 수집할지 정해야 한다. 분석하는 담당자 입장에서는 최대한 자세하게 인적정보를 수집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다. 소속 부서, 직급, 연차, 나이, 성별 등등. 한번밖에 실시할 수 없으니까 '혹시 모르니까 일단은 최대한 자세히 수집하자'라는 심리가 작동한다. 그런데 이렇게 자세하게 수집하면 설문을 응답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신의 신상이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마케팅 부서-대리-5년 차'로 응답하면 누가 응답했는지 정보 범위가 좁아진다. 이런 신분 노출의 두려움 때문에 솔직하게 응답하지 않을 확률이 높아진다. 따라서 최소한의 정보만 수집하기로 했다.
특히 소속 기관을 어느 정도로 자세하게 수집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마케팅파트, 경영지원 파트처럼 기관별 데이터를 수집하면 각 기관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기관을 나눠서 정보를 수집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각 기관별로 점수를 비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점수가 낮게 나온 기관의 리더는 나쁜 피드백을 듣게 되고, 부정적 피드백을 받은 기관의 리더는 진단 결과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진단 자체에 대해 선입견부터 가진다. 다음 진단부터는 과거의 부정적 경험 때문에 조직원들에게 무언의 압박을 넣는다. 그러면 진단 점수는 올라가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바뀐 게 없는 현상이 발생한다. 실제로 벤치마킹한 회사들에서 발생한 일들이다.
고민 끝에 이런 줄 세우기를 피하고자 구체적인 기관 정보를 수집하지 않았다. 대신 인원 비중과 업무 특성의 차이가 두드러지는 사무/영업/제조로만 분리를 했다. 이 방법도 단점이 존재하지만 줄 세우기로 인한 부정적 영향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진단 이후에 각 조직별 비교 데이터가 없냐는 문의를 위에서 여러 차례 받았다. 그때는 실제로 데이터가 없었기 때문에 당당히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설문 실시와 진단 리포트 작성
설문은 회사 사내 시스템을 활용해 강제적으로 직원들이 참여하게 했다. 그랬더니 응답률 90%라는 어마 무시한 데이터가 나왔다. 참여인원은 약 3,900명. 이 정도면 거의 전 직원이 참여했다고 봐야 했다. 열심히 한 땀 한 땀 엑셀을 통해 피벗을 돌리며 기초 데이터를 정리했다. 5점 만점 척도를 활용했고 점수 분석 지표는 긍정 응답률을 활용하기로 했다.
진단 결과를 작성하는 데 있어 나는 처음에 시각화된 리포트를 생각했다. 하지만 팀장님의 의견은 달랐다. 평소에 작성하는 보고서 형태를 원했다. 팀장님은 핵심 메시지를 중시했고, 분석 결과는 핵심 메시지를 위한 근거자료일 뿐이었다. 텍스트로 된 메시지가 중요했기에 결과 값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래프는 자리만 잡아먹어서 보고서의 양만 늘린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팀장님의 의견에 따라 텍스트가 중심이 된 보고서가 만들어졌다.
만약 다음에 작성한다면 대한상공회의소에서 20년 4월에 나온 <직장 내 세대갈등과 기업문화 종합진단> 리포트를 많이 참고할 것 같다. 데이터와 FGI 결과를 모두 담아서 숫자와 스토리를 한 번에 볼 수 있다. 관심 있는 분은 구글에서 검색하면 쉽게 자료를 찾을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란다.
① 진단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진단 이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조직문화 진단은 잘못 활용하면 오히려 안 하니만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유는 크게 2가지다. 첫 번째는 잘못된 기본 가정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단을 하면 우리 조직의 문제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이걸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그럴 줄 알았어. 우리 회사가 바뀌겠어'라는 부정적 기본 가정이 더 강화되게 된다.
두 번째 이유는 있던 희망마저 꺾을 수 있어서다. 진단을 실시한다고 하면 직원들에게는 조직이 변화하겠다는 사인으로 받아들여진다. 몇몇 직원들은 '회사가 바뀌려나?' 하고 기대하고 희망을 갖게 된다. 하지만 막상 진단 이후에 바뀐 게 없다면 그 희망까지 꺾이게 된다.
진단을 마음먹었다면 도출되는 과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각오도 있어야 한다. 진단은 조직문화 진단-과제 도출-후속 활동을 통한 문제 해결이 한 싸이클로 돌아갈 때 의미가 있음을 명심하자.
② 감당 가능한 수준의 문제만 수면 위로 드러내자
진단 이후에 뭘 할지가 더 중요하기에 문항별로 결과가 나왔을 때 어떤 활동을 할지 정해놓고 진단을 실시해야 한다. 특히 조직문화 팀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질문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진단 문항 중에 승진, 보상, 평가 같은 인사제도에 관한 문항을 넣었다고 하자. 만약 이 문항들이 낮게 나왔을 때 조직문화팀에서 제도를 바꾸자고 할 수 있는가?
만약 경영진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회사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관여할 수 있는 조직문화팀이라면 있는 그대로 문제를 드러내도 상관없다. 하지만 만약 권한이 충분하지 않은 조직문화팀이라면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문제만 드러내는 걸 추천한다. 만약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 조직문화 팀의 입장이 애매해질 수 있다. '이럴 거면 진단 왜 했냐'는 반응이 나올 수 있다. 그럴 바에는 진단 준비 단계부터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 정도만 발굴할 수 있게 문항을 세팅하는 게 낫다.
'그럼 뻔히 있는 문제를 모른 척하라는 이야기입니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한 내 생각은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다.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려고 욕심부리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것보다 단계적으로 감당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하나씩 해결해가는 게 낫지 않을까?
③ 조직의 약점 못지않게 강점도 중요하다
조직문화 진단을 준비하다 보면 의사-환자 모델로 접근하기 쉽다. 의사가 환자를 진단해서 아픈 곳을 찾은 다음, 이에 맞는 처방을 실시하는 것처럼 우선 아픈 곳부터 찾는 접근방식이다. 문제는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면 진단 결과에 조직의 단점, 개선할 점, 고쳐야 할 점만 수두룩하게 담긴다. 이렇게 되면 조직이 마치 산소호흡기를 붙이고 있는 중환자처럼 느껴진다.
이 부분은 스스로 반성할 지점이다. 내가 실시했던 진단도 전형적인 의사-환자 모델에서 시작했다. 문제점을 찾아내고 그걸 해결해서 더 건강한 조직을 만들겠다는 접근이었다. 특히 일하는 방식과 관련해서 내가 생각한 문제점과 관련한 문항들을 세팅했고, 여기서 문제점들이 다수 발견됐다. 이 문제들에 대한 해결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믿지만, 강점과 약점을 균형 있게 고려하지 못한 점은 뼈 아프게 느껴졌다. 다음에 진단한다면 문제점 못지않게 우리 조직 고유의 강점도 발견하여 이를 강화할 수 있는 방안까지 세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