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문화 개선 과정을 통해 살펴본 변화관리 방법
조직문화 진단을 통해 여러 개선 필요사항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보고문화 개선'이었다. 보고는 '정보의 교환을 통한 의사결정 과정'으로 회사에서 많은 직원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이자, 업무시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중요한 행위다. 그런데 이 일상적인 업무행위에서 많은 비효율이 발견되었다. 다른 조직도 흔히 겪는 현상이지만 불필요한 보고서가 양산된다던지, 불필요하게 보고서를 꾸민다던지 하는 일들이었다. 보고는 거의 전 구성원이 하는 공통된 행동이기에 보고문화 하나만 효율화되어도 구성원들의 회사 만족도가 올라갈 것이라고 판단했다.
사실 보고문화 개선은 '그거 되겠어? 해봤는데 안 되더라'의 대명사 같은 일이었다. 이미 과거에도 여러 차례 보고문화 개선을 시도했던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매번 별다른 변화를 만들지 못하고 '원래 하던 대로'가 유지되었다. 실제로 보고문화 개선을 한다고 하자 '그거 전에도 했던 거야', '어차피 안 돼' 같은 이야기를 주변에서 들었다.
과거에 했던 보고문화 개선 활동이 실패했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구성원의 행동을 강제할 수 없는 활동(캠페인, 아이디어 공모전 같은)을 주로 실시했다. 또 하나는 개선활동을 실시할 때 처음부터 전 조직으로 활동범위를 잡아서 세밀한 관리를 하지 못했다. 범위가 넓다 보니 실제로 보고문화 개선 활동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기도 어려웠고, 중간에 관여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크고 불확실한 성공'이 아닌, '작지만 확실한 성공'으로 방향성을 바꾸었다. 작더라도 구성원이 체감할 수 있는 변화를 만드는 것이 이번 보고문화 개선활동의 목표였다.
우선은 '전사적인 보고문화 개선 실시'가 아닌 '선 파일럿 테스트 후 전사 확대'로 접근했다. 보고문화 개선을 준비하며 사전 인터뷰를 실시했는데 개선 포인트가 광범위하고 복잡했다. 쉽게 말해서 할 일이 많았다. 처음부터 전사 확대로 접근하면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워도 단번에 1,000명 넘는 사무직원들에게 정착시킬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범위를 좁혀서 4개 조직, 230명에게 먼저 실시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는 파일럿을 실시한 게 신의 한 수였다. 파일럿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계속 발생했는데 그나마 파일럿으로 범위를 좁혀 놓았기에 대응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실행하기 전에는 몰랐던 구체적인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다.
내부의 성공 사례를 만든 것도 큰 수확이었다. 처음에 세운 개선방안은 '이렇게 하면 보고문화가 개선될 것'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었다. 하지만 파일럿 테스트를 통해 가설을 수정·발전시켰고, '이렇게 하면 보고문화가 개선된다'는 구체적인 사례가 만들어졌다. 새롭게 만들어진 조직 내부의 성공사례는 이후 더 많은 구성원들을 설득할 때 요긴하게 쓰이게 될 터였다.
파일럿이 성공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던 건 파일럿 조직 리더들의 지원 덕분이었다. 파일럿 기관을 선발할 때부터 조직 내에서 개방적이고, 새로운 시도에 오픈되어 있다고 평가받는 리더들을 주로 선정했다. 실제로 파일럿 기관 섭외를 위해 방문하자 리더들은 흔쾌히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후에는 각 조직 별로 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사전 설문을 실시했다. 설문 결과를 통해 각 조직별로 구성원들이 느끼는 보고문화 개선의 우선순위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A 조직은 종이를 출력하는 보고문화에 대한 개선 필요성을 강하게 표현했고 B라는 조직은 보고 단계가 진행되면서 내용이 자주 바뀌는 현상을 바꾸기를 원했다. 다행히 처음에 계획했던 개선방안에 모두 포함되는 내용들이었지만 조직마다 우선순위가 다르게 나타나는 건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다.
설문 결과를 가지고 각 조직의 리더들과 사전 미팅을 진행했다. 이때 리더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결과를 회피하기도 하고, 핑곗거리를 찾기도 했다. 현실을 직시하는 건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다들 좋은 리더였기에 대체로 결과를 수용했다. 사전 미팅은 변화의 필요성을 함께 느끼는 시간이었다.
사전 미팅은 미국의 심리학자 커트 레빈이 정립한 3단계 변화관리 방법* 중 첫 단계 해빙(Unfreezing)에 해당했다. 네모난 얼음이 동그란 얼음으로 모양이 변하려면 우선 네모난 얼음이 한번 녹는 해빙(Unfreezing)이 필요하다. 사전 미팅 시간을 통해 리더들은 자신이 운영하는 조직의 현실을 직면했고, 우리 조직은 잘 되고 있을 거야 라는 무의식적인 믿음이 깨지는 경험을 했다. 다음 단계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차례였다.
*1940년대 미국의 심리학자 커트 레빈은 조직의 변화관리 방법을 얼음이 녹았다가 다른 모양의 얼음이 되는 것에 비유해 Unfreezing(해빙)-Moving(이동)-Refreezing(응고) 3단계로 정립했다.
보고문화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보고서를 작성할 필요가 없는 권한과 책임이 분산된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상급자에게 일일이 컨펌받을 필요 없이 실무자가 의사결정 권한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면 된다. 보고서 대신 다른 동료들에게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메일로 정리해서 공유하면 끝이다. 이렇게 되면 불필요한 보고서 작성할 시간에 진짜 일을 하게 된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알고 있지만 이걸 추진하자면 조직 내 권한과 책임 구조를 다시 손 봐야 하는 꽤 큰 작업이 된다. 그리고 이런 근본적 변화는 반발도 크기에 실패할 확률도 높아진다. 지금까지 보고문화 개선 작업이 실패했던 건 리더계층에게 집중되어 있는 권한과 책임 구조를 건들지 않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강제력이 없는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내가 접근한 방법은 '보고문화라는 하나의 큰 현상을 잘게 쪼개서 해결 가능한 것부터 바꾼다'였다. 구성원 인터뷰 중에 '보고의 중요도를 상중하로 나눴을 때 중요도 상은 기존 방식 그대로 한다고 치고, 중하라도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멘트를 들었는데 여기서 큰 힌트를 얻었다. 근본적인 권한과 책임 구조를 손보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을 먼저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실제로 설문을 통해 구성원들에게 평소에 하고 있는 보고의 유형을 3가지 타입으로 분류해봤는데 의사결정이 필요하고 논의가 필요한 내용은 기존 방식(정식 보고서를 지참한 대면보고)을 선호했다. 하지만 의사결정이나 별도 논의가 필요 없는 내용은 이메일이나 다른 수단을 통해 간편하게 보고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우선은 중요도 중하의 보고 건을 효율화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구성원이 생각하는 중요도 중하의 보고 건은 이런 것들이었다. 단순 회의 결과, 루틴하게 이뤄지는 정보공유(일일 실적), 각종 취합성 업무 등. 굳이 보고서의 형태로 만들 필요가 없는 것들도 일정한 형태를 갖춘 보고서로 작성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시간이 낭비되고 있었다.
이런 것들은 협업 툴이나 이메일을 통해 공유하자고 제안했다. 특히 IT부서에서만 사용하던 '컨플루언스(confluence)'라는 프로그램을 파일럿 실시 조직에 소개하고 사용하도록 유도했다. 컨플루언스는 위키 기반의 협업도구로 동시에 여러 사람이 한 공간에 작업할 수 있어 업무효율이 높아지는 장점이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특히 컨플루언스를 활용하면 각종 취합성 업무를 위해 워드 파일을 뿌리고 걷는 작업을 단번에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실제로 컨플루언스를 도입하자 '덕분에 일이 편해졌다' '일 다운 일을 한다' '회사에서 포상을 줘야 한다' 같은 구성원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왔다.
또 하나는 페이러리스 환경 조성이었다. 기존에는 보고, 회의 때마다 모든 보고서를 직접 출력해서 함께 읽으며 보는 방식이었다. 보고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출력해야 하는 보고서가 많아질 뿐만 아니라, 과도한 종이 출력으로 발생하는 자원낭비도 심각했다. 이 문제는 대형 TV를 설치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보고가 주로 이뤄지는 공간에 대형 TV를 설치함으로써 노트북을 연결해서 보고할 수 있도록 했다. 실제로 대형 TV를 설치한 이후 파일럿 기관들의 종이 출력이 줄어드는 효과가 나타났다.
둘의 공통점은 '환경'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단순히 '이렇게 바뀌어야 합니다'라고 말만 하는 것으로는 변화를 만들기 쉽지 않다. 인간의 의지에만 기대어 행동까지 변화하도록 만드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경을 바꾸면 다르다. 일종의 넛지 효과가 발생하여 부드럽게 사람들의 등을 떠밀게 된다. 각 개인이 변화하려고 큰 의지를 가지고 힘을 들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새로운 방향으로 따라가게 된다.
조직문화 담당자로 일하면서 '조직을 바꾸는 건 왜 이렇게 힘이 들까?' 고민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변화가 쉽지 않은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조직은 현재 상태가 항상 최적의 상태다. 효율·비효율을 따지기 이전에 어찌 됐든 균형점이 찾아진 상태가 현재이다. 변화를 만든다는 건 이 균형을 깨는 행위다. 기존 균형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반발이 생길 수밖에 없다.
특히 조직의 규모가 클수록 변화는 더욱 힘들다. 지렛대를 떠올리면 쉽다. 반대편에 크고 무거운 100kg짜리 돌이 올려져 있다고 생각해보자. 웬만큼 힘을 주어서는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큰 조직에 변화를 만드는 건 반대편에 거대한 돌덩이가 올려진 지렛대를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반대편에 100kg이 아니라 5kg짜리 돌이 올려져 있다면 어떨까? 상대적으로 지렛대를 움직이기 쉽다. 파일럿을 통해 변화 시도의 범위를 줄이고, 거대한 문제를 잘게 쪼개는 건 바로 한 번에 100kg짜리 돌을 드는 것이 아니라 우선 5kg짜리 돌부터 움직이는 방식이다. 이렇게 5kg짜리 돌을 여러 번 들면 요령도 생기고 근육도 붙어서 다음에는 더 큰 돌을 들 수 있게 된다.
변화를 만들려는 문제가 크고 복잡할수록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럴 때는 작지만 확실한 성공을 여러 번 반복하여 결국에는 큰 성공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추천한다. '천릿길도 한걸음부터' 몇 번의 시도 끝에 깨달은 나만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