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월에 걸친 긴 여정의 시작
2021년의 어느 날, 회사에서 인사 발령이 났다. 새로 발령이 난 부서는 승진이 잘 되기로 소문난 부서였다. 회사 주요 부서의 장들이 모두 그 부서를 거쳐갔다. 회사 게시판에 발령이 뜨자 동료들에게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쏟아졌다. 남들이 보기에는 잘 된 일이었다. 회사에서 서열 높은 임원 눈에 들어서 그가 가장 아끼는 부서로 발령이 났으니까 말이다. 이제 로열로드를 걷는 거냐고, 누군가는 농담을 했다.
인사 발령이 있고 나서 내가 느꼈던 감정은 기쁨이 아니라 분노였다. 화가 났던 이유 첫 번째는 이번 인사에 내 의지는 조금도 반영되지 않았다. 오직 '그분'이 나를 찍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문자 그대로 하루아침에 발령이 났다. 두 번째는 내가 쌓아왔던 커리어와 전혀 상관없는 부서로 발령이 났다. 하고 싶은 직무가 명확히 있는데 관심도 없는 일을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커리어 향상이 아니라 커리어 단절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이 모든 과정에서 나에 대한 존중은 찾을 수 없었다. 그 누구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커리어를 만들고 싶은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창고에 있는 물건을 옮기듯이 A부서에서 B부서로 툭 옮겨 놓았다.
맷집이 좋은 편이라 웬만한 일에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데 이번만은 달랐다. 이 모든 상황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새로 바뀐 부서에 적응해보려 했지만 몸과 마음이 거부했다. 가벼운 우울증 증상까지 나타났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이직 준비를 시작했다.
회사의 인사 시스템을 알기에 언젠가는 내 의지와 상관없는 부서 이동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이직 준비를 조금씩 해왔다. ('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는 뜻의 유비무환이라는 사자성어를 좋아한다.) 평소에 했던 이직 준비는 크게 3가지다.
1. 일 열심히 하기
최고의 이직 준비는 현재 속한 회사에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다. 이직 면접을 보게 되면 '당신은 이전 회사에서 어떤 일을 했고, 그 일은 회사에 어떤 기여를 했나요?'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받는다. 현재 소속된 회사에서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역설적이지만 현재 회사가 불만족스러워서 이직을 하고 싶을수록 소속된 회사에서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
다만 무작정 시키는 일만 해서는 곤란하다. 이왕이면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 업무 경험을 쌓아야 한다. 현재 어떤 업무 경험이 시장에서 수요가 많은지 확인하는 방법은 채용 공고를 검색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직문화 채용'이라는 검색어를 구글에 입력하면 최근에 회사들이 올린 채용 공고와 직무 기술서(Job description)를 볼 수 있다. 채용 공고를 보면 '이런 경험이 있는 분들을 찾아요', '입사 후에는 이런 일들을 하게 돼요'라고 친절히 안내되어 있다. 바로 그 일이 현재 속한 회사에서 이직 준비를 위해 해야 할 일들이다.
위에서 시킨 일은 당연히 했지만, 시키지 않은 일도 했다. 그것도 꽤 크게 벌려서 한 일이 많다. 남들 눈에는 회사를 위해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실은 다 나를 위해서 한 일이었다.
2. 블로그 운영
20년 4월 티스토리 블로그를 시작으로 2년 넘게 글을 쓰고 있다.(지금은 브런치에 주로 글을 쓴다) 처음에는 생각 정리 차원에서 시작했다가 점차 업무 회고 성격의 글도 작성하게 됐다.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블로그 자체가 업무 포트폴리오가 되었다. 업무를 하는 과정에서 어떤 고민을 했는지, 여러 문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 갔는지가 자연스럽게 블로그에 담겼다.
블로그 운영이 이직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블로그에 글을 쓴 지 1년이 지난 시점부터 체감했다. 블로그 글을 인상 깊게 봤다며 만나자는 회사들이 생겼다.(서류를 면제하고 바로 면접을 볼 수 있게 해 준 곳도 있었다.) 채용 플랫폼을 통해 헤드헌터한테 연락이 왔을 때도 어떤 이유로 제안을 주셨냐고 물어보면 '블로그를 통해 그동안 진행하신 프로젝트를 인상 깊게 봤다'는 답변이 많았다.
비단 이직 제안뿐만 아니라 블로그는 커리어와 관련해 다양한 기회(컨퍼런스 참여, 책 출간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앞으로도 블로그는 계속 운영할 예정이다. 무엇보다 블로그에 쌓이는 글은 회사가 아닌 나에게 속하는 자산이 된다.
3. 스스로를 시장에 노출시키기
업무 경험과 포트폴리오를 준비했다면 다음 단계는 이직시장에 실제로 나를 노출시키는 것이다. 채용 플랫폼(원티드, 리멤버 커리어 등)에 자신의 경력을 등록해서 헤드헌터나 리크루터들에게 나를 노출하자. 리멤버 커리어 서비스가 처음 출시됐을 때 호기심에 등록했는데, 실제로 여러 제안이 들어왔다.(물론 제안이 들어오는 것과 이직이 성사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리멤버 커리어 못지않게 효과를 본 건 링크드인이다. 링크드인에 경력을 등록하고 재미 삼아 글을 썼는데, 생각지도 않게 조회수가 터져서(첫 글이 조회수 3만 회가 넘었다....) 이후로 노출 효과가 커져서 링크드인을 통해서도 제안이 많이 들어왔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직 시도를 실제로 했던 회사 중 한 곳은 링크드인을 통해 리크루터에게 제안을 받았던 곳이다.
이직을 마음먹은 다음 부딪혔던 첫 번째 문제는 '어느 회사에 지원할 것인가?'였다. 배부른 고민일 수도 있겠지만 여러 제안을 받다 보니 오히려 어느 회사에 지원해야 할지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보다 더 나은 회사로 이직을 해야 할 텐데, 무엇이 더 나은 회사인지 기준을 잡을 수가 없었다. 본격적인 이직 준비 전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휴가를 갔었는데 거기서 읽었던 찰스 핸디의 책에 내 상황을 딱 대변하는 글이 있었다.
"우리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점점 많은 선택의 기회를 갖게 되리라는 사실이 내게는 너무나 명확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삶이 더욱 편안해지는 것은 아니다. 슈퍼마켓 진열대에 늘어선 시리얼 상자가 점점 늘어가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칼로리며 당분 등을 비교할 수 시간이 없어서 곧장 익숙한 것을 집어 든다. 어떻게 살고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해 선택의 폭이 넓어진 인생이라는 슈퍼마켓에서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올바른 방향을 모색하면 세상에 우리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한테 맞춰 돌아가게 할 수 있는 데도, 그저 안절부절못하고 헤매거나 익숙한 예전 방법과 습관을 따르고 많다. 좋고 나쁨을 가려내는 확실한 기준이 없으면 그 많은 시리얼 중에 하나를 고를 수가 없다. 인생의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특정 기준이 없으면 선택 가능성은 스트레스만 더할 뿐이다."
-찰스 핸디, <포트폴리오 인생>, p226-227
특정 기준이 없는 선택 가능성은 스트레스만 더한다. 내가 할 일은 이직할 회사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기준을 검토했지만 가장 중요하게 스스로에게 묻고 답했던 질문들은 아래와 같았다.
1. 자신의 리스크 감수 성향은 어떠한가?
자신에게 맞는 회사를 찾으려면 우선 자신의 성향을 알아야 한다. 연봉, 워라밸, 조직문화, 성장 기회 등 다양한 항목에 대한 나만의 우선순위를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이직과 관련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자신의 성향은 '얼마 정도의 리스크를 감수할 수 있는가?'였다. 이직은 더 나은 커리어를 위한 일종의 투자이다. 투자는 상품별로 리스크가 다르고 그에 따라 얻을 수 있는 보상의 정도가 다르다. 투자 상품을 분류하듯 회사를 크게 3가지 기준으로 나눴다.
고위험 고수익 : 스타트업(성장 가능성은 높으나 당장의 매출은 불안정)
중위험 중수익 : 성장하는 대기업(성장 가능성은 중간이나 당장의 매출은 안정적)
저위험 저수익 : 성장이 멈춘 대기업(성장 가능성은 낮으나 당장의 매출은 안정적)
현재 속한 회사는 저위험 저수익에 해당해서 다음 이직 희망 기업에서 저위험 저수익 기업은 가장 먼저 제외했다. 동일한 상황의 기업이라면 이직을 하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개인 성향을 봤을 때 고위험 고수익은 맞지 않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안정'은 나에게 중요한 가치다. 누울 자리 보고 발을 뻗고, 최악의 상황에 처할 수 있는 가능성은 최대한 배제하고, 과감한 시도를 해도 항상 플랜 B를 함께 준비한다. 불안정과 불확실성을 잘 견디지 못하는 성향상 스타트업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 성향에 맞는 선택은 중위험 중수익이었다. 실제로 주식 투자를 했을 때도 중위험 중수익에 해당하는 ETF 투자가 가장 잘 맞았다. '최근 매출, 영업이익, 주가 등이 상승하고 있는 대기업'을 첫 번째 기준으로 삼았다.
2.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어떤 성격의 일을 잘할 수 있는가'도 고민했던 지점이다. 크게 보면 두 가지 성격의 일을 고민했다.
0에서 1을 만드는 일
99에서 100을 만드는 일
0에서 1을 만드는 일은 아직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는 회사에 들어가 스스로 하나부터 열까지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집에 비유하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땅을 다지고, 기둥을 세우고, 창문을 달아서 집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해야 하기 때문에 힘들지만 대신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성취감과 만족감도 크다.
99에서 100을 만드는 일은 일정한 시스템이 갖춰진 회사에서 기존에 있는 시스템을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걸 뜻한다. 집으로 치면 일단 다 지어진 집에 들어가서 도배를 새로 하거나 가구 배치를 바꾸면서 더 좋은 집이 되도록 하는 것과 같다. 기초적인 형태가 상당 부분 완성된 상태에서 뭔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달라도 100% 바꿀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대신 이미 많은 부분이 완성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가 아닌 일부분만 바꾸면 된다는 점, 그 일을 먼저 해본 사람에게 도움을 받거나 과거 히스토리를 참고해서 일을 풀어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0에서 1을 만드는 일과 99에서 100을 만드는 일은 모두 성향에 맞는 일이었다. 어느 성격의 일이든 모두 잘할 자신이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내가 처했던 환경을 살펴봤을 때 익숙한 방식은 99에서 100을 만드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일정하게 갖춰진 시스템 위에서 새로운 것들을 더해가는 방식으로 일해왔고, 동일한 환경으로 이직했을 때 적응이 더 수월하겠다고 생각했다.
3. 이직 한 다음의 Next step은 무엇인가?
이직도 결국은 목표를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먼저 생각해 볼 주제는 최종적인 커리어 목표(Goal)를 무엇으로 가져갈 것인가이다. 목표가 확실해야 맞는 방향의 징검다리를 선택할 수 있다.
여기서는 약간의 딜레마가 존재했다. 지금까지 교육, 조직문화 커리어를 이어왔다. 크게 보면 HR 내에서 HRD에 속하는 일들이다.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HRD를 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교육, 조직문화 업무를 하면서 느꼈던 한계 때문이다. 조직문화를 바꾸려면 제도도 함께 바뀌어야 하는데 통상적인 HRD 부서에는 제도를 바꿀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제도를 바꿀 수 있는 부서로 가서 직접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궁극적인 커리어 목표(Goal)를 떠올렸을 때 HRD 전문가, 조직문화 전문가가 최종적인 목적지는 아니었다. 추상적이지만 궁극적인 커리어 목표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면 'HR 잘하는 사람이었다' 산업의 종류, 조직의 규모(작은 조직/큰 조직), HR의 영역(HRD/조직문화/HRM) 가리지 않고 그냥 다 잘하고 싶었다. 어떤 상황의 기업에 떨어트려도 그냥 '쟤는 HR 잘하는 애'라는 소리를 듣는 게 최종적인 목표라면 목표였다.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좁고 깊게' 가는 방향보다는 '넓고 크게' 가는 방향이 성격에도 맞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직은 과거의 업무 경험을 토대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HRD 직무를 살려서 이직한다면 앞으로도 교육, 조직문화 쪽 업무를 계속하게 될 확률이 높았다. 궁극적인 커리어 목표와 이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경험의 미스매치가 존재했다. 바로 이 점이 나중에 또 다른 선택을 하는 원인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