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함의 천재가 되는 법> 14화
한동안 나에게 영어는 트라우마와 같은 뜻이었다. 내가 다녔던 대학교는 신입생이라면 필수로 원어민에게 영어 수업을 들어야 했다. 고등학교에서 듣기와 독해만 했던 터라 내 영어 말하기 실력은 엉망이었다. 원어민 선생님의 간단한 질문에도 어순이 뒤죽박죽이 된 말도 안 되는 영어로 답변했다. 마침 그날 수업은 데스크톱 컴퓨터가 있는 강의실에서 이뤄졌다. 내 옆자리 앉은 친구가 메모장을 띄워놓고 키보드로 타이핑을 했다.
“이지안 너 우리 학교 어떻게 들어왔냐. 영어 졸라 못해 ㅋㅋㅋ “
메시지를 본 뒷자리 친구들은 폭소했다. 영어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진땀을 빼던 나는 처음에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미 머릿속은 하얗게 멈춰 있었으니까. 나중에서야 친구들이 웃는 이유를 파악하고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머릿속에는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인생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 중 하나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1시간 동안 영어로 수다를 떤다. 일주일에 1번 원어민 선생님에게 대면 수업을 받는다. 그 시간 동안 한국어 없이 오직 영어로 이야기를 나눈다. 물론 적당한 영어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 수업 중간에 어색한 침묵이 찾아올 때도 있다. 문법에 맞지 않는 엉터리 문장을 써서 교정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어떻게든 영어로 떠든다. 그것도 무려 1시간 동안이나. 주제도 다양하다. 회사 업무 이야기, SNS중독, 인플레이션 등등 다양한 주제로 선생님과 소통한다. 무엇보다 요즘은 영어 공부가 재밌다.
영어 수업 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던 신입생 시절의 나는 이런 미래를 상상이나 했을까? 모든 변화는 1년간 지속한 영어 공부 덕분이다. 영어 공부를 시작한 계기는 분명하다. 더 이상 영어 공부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회사에서 직원들의 어학 능력을 강조했다. 당장은 아니지만 가까운 미래에 해외 법인 현지 직원들과 영어로 소통할 일이 생길 확률이 높았다. 어차피 맞을 매라면 차라리 미리 맞자는 심정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영어 공부를 시작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지치지 않고 꾸준히 공부하는 것이다. 여러 번의 실패 경험을 통해 영어실력은 단숨에 늘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단번에 많은 학습량을 소화하려다 몇 주만에 포기한 적이 많다. 차라리 하루에 부담 없이 소화할 수 있는 적은 양을 길게 공부하는 편이 더 나았다. 문제는 어떻게 오랫동안 공부를 지속할 것인가였다. 그것도 전혀 관심도 없고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공부를 말이다.
“습관은 늘 똑같은 신호에 반응한다. 습관은 예측할 수 없고 제멋대로 부는 비바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익숙하지 않은 장소, 자연스럽지 않은 동선, 반복적이지 않은 일과와 같은 다양성은 우리 삶에 자리 잡고 있는 습관의 지배력을 희석시킨다.”¹
웬디 우드 박사의 책 <해빗>에 따르면 습관을 만들려면 그 행동을 유도하는 동일한 신호를 계속해서 받아야 한다. 신호의 종류는 시간, 장소 등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특정 행동을 유도하는 신호에 동일한 조건에서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일이다. 이런 원리를 적용하면 영어 공부를 자극하는 신호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핵심이 된다.
먼저 ‘평일에는 눈을 뜨면 즉시 영어공부를 한다’는 원칙을 정했다. 매일 반복하는 아침 기상이 영어공부의 트리거가 되도록 했다. 이걸 위해 기존보다 30분씩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도록 수면과 기상 시간을 바꾸었다(기존 11시 취침, 아침 7시 기상에서 10시 반 취침, 6시 반 기상으로) 공부 양은 부담되지 않도록 30분 분량으로 정했다. 몇 달이 지나자 아침 공부에 꽤 익숙해졌다. 이제는 아침에 눈을 뜨고 침대에 멀뚱히 누워있으면 어색하고 허전하다. 눈을 뜬 직후라는 상황 자체가 영어공부를 자극하는 신호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상에 적용한 또 다른 원칙은 ‘자기 전 책상에 교재와 이어폰, 펜을 올려두기’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다. 첫 번째는 방해물을 없애고 아무런 생각 없이 하는 영어공부로 이어지는 자동조종 모드를 만들기 위해서다. 만약 눈을 떠서 책상에 앉았는데 교재나 이어폰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럴 경우 무의식적으로 책을 펴고 영어 방송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영역에서 생각을 한다. ‘책은 어디에 있지?’, ‘이어폰은 왜 또 없어’ 그렇게 되면 ‘오늘은 그냥 쉴까?’ 같은 다른 생각도 연달아 떠오를 수 있다. 아예 다른 생각 자체가 떠오를 틈이 없도록 해야 한다.
두 번째 의도는 나만의 신호를 의도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일단 눈을 떠서 책상으로 나가면 교재와 이어폰이 올려져 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영어공부를 해야 하다는 명령어가 입력된다. 보통 전날 저녁, 잠들기 전 책상에 교재와 이어폰을 올려 둔다. 어찌 보면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넌 아침에 눈뜨자마자 영어공부를 해야 돼!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셈이다.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이 기억을 잃기 전에 자신의 몸에 문신을 새겨 넣어서 다음날의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듯이 말이다.
사람은 생각보다 다양한 신호에 약하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면 처음 가는 식당이나 카페인데 메뉴판에 Best나 추천이라는 표시가 붙은 메뉴가 있다면 높은 확률로 그 메뉴를 시킨다. 실제로 그 메뉴가 맛있는지 그 식당의 최고 메뉴인지는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Best라는 작은 표시 하나가 나에게 선택을 유도하는 신호로 작동했고, 결국은 메뉴 선택이라는 행동까지 일으킨 셈이다. 비슷한 원리를 자신의 삶과 원하는 일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내가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하기 위해 다양한 신호를 설계했듯 말이다.
*참고자료
1. 웬디 우드. (2019). <해빗>. 다산북스. 17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