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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eah Dec 07. 2021

인간의 본능과 자유의지

- 영화 <Devil's Advocate>를 보고

신을 욕하는 악마의 이야기에 공감이 더 많이 간것은, 이 세상이 너무 본능적인 선택의 힘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일까?

알 파치노가 영화 클라이막스에서 열연을 하며 내뱉은 아래의 대사를 들으면,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가 몸서리치게 느껴진다.

영화 <데블스 애디버킷> 의 한 장면

He gives man instincts. He gives you this extraordinary gift and then what does he do? 
I swear, for his own amusement, his own private cosmic gag reel, he sets the rules in opposition.


Look, but don’t touch.
Touch, but don’t taste.
Taste, don’t swallow.


I’m here on the ground with my nose in it since the whole thing began!

I’ve nurtured every sensation man has been inspired to have!

I cared about what he wanted and I never judged him.

Why? Because I never rejected him, in spite of all his imperfections!

I’m a fan of man. I’m a humanist. Maybe the last humanist. 




마치 며칠 굶은 사람 앞에 먹음직한 식사를 차려놓는, '보되, 건들이지 마라. 건들이되, 맛보진 마라. 맛보되, 삼키지는 마라.' 라는 규칙을 정해놓고 그 앞에서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인간을 보며 신은 하늘에서 낄낄거리며 웃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악마는 '괜찮아, 먹어도돼, 넌 먹을 자격이 있는 존재야' 라는 본능을 자극하는 말로 그를 회유하고, 달콤하게 속삭인다. 모든게 다 괜찮다고.


'신은 인간을 만들고, 본능을 주시고는, 그 본능과 반대되는 룰을 만들었다.'

인간의 어쩌면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나오는 본능이라는 게 질투, 탐욕, 허영, 이기심, 배신과 같은, 영화에서 악마가 숭배하고 기꺼이 내줄수 있는 것들일지도 모른다. 나보다 잘나가는 친구를 보면 문득 질투심이 끓어오르고, 좋은차를 타고 좋은집에 살고, 그럴듯한 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서 내가 너희들보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식의 우월감을 느끼고 싶고,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그것에 의해 희생되는 것들에 대해선 곁눈질 한번 주지 않은채 달려들어 버린다. 악마는 그런 인간의 본능을 이해했고, 그것을 추구하고 탐닉하는 인간을 규정하거나 판단하지 않았고, 그들이 이떤 결점이 있든 악마의 품에 입성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난 인간의 팬이자, 휴머니스트야!'라고 소리지르는 사탄의 모습은 참으로 그럴싸해 보인다.

그리고, 신이 인간들의 고군분투를 보고 하늘에서 낄낄거리고 있다는 비유 조차 꽤 그럴듯하다.


영화를 보면서 인간의 존재와 본능에 대한 끝도없는 의문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왜 세상은 이런구조여야만 했을까? 왜 인간은 시도때도 없이 불쑥 나타나는 본능을 이성으로 절제하고 그 반대의 길을 택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일까?

인간이 본능을 추구한 대가는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그것을 '지옥'으로 규정한다. 영화의 대사중 'wide is the road and broad is the way that lead to the temptation'이라는 성경구절처럼, 유혹(지옥)으로 가는 길은 넓고 광활한데, 선(천국)으로 가는 길은 좁고 험난하다. 

나와 같은 비기독교인들에게 이것은 왜 옳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과도 연결된다. '인간은 금수가 아니기때문에, 인간의 사회는 법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라는 답은 어딘가 맥락이 빗겨가있다. 왜 '내스스로' 옳게 된 선택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답이 아니라, 결과론적인 선택에 대한 보편적인 책임과 혹은 부끄러움을 말하고 있는 점에서 그 특별함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탐욕과 허영과 같이 악마의 선악과를 쫒으며 사는것은 너무나도 쉬워보인다. 그러나 그 반대의 가치인 선(善), 절제, 긍정의 가치를 쫒으며 사는것은 그 몇배의 에너지가 든다. 본능의 길로 들어서는 발걸음을 애써 돌려서 그 반대의 방향으로 걸어가려고 할때 인간에겐 강력한 에너지, 신앙, 믿음이 필요하다. 


한국 영화에서도 이런 장면은 종종 나온다. 장애인을 성폭행 한 범죄자가 재계 몇순위 그룹의 아들 혹은 이해관계인이라서, 그를 벌하게 되면 자신의 법조인로서의 커리어가 몽땅 날아가게 되는 검사의 내적 갈등. 꽤 흔하고 친숙한 누와르 영화의 소재이다. 과연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자유의지로써 정의의 선택을 할 수 있는것인가? 이 경우에는 선택에 대한 책임이 본인에게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과연 자유의지일까? 그리고 설사, 자유의지에 반하는 선택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를 비난할 자격이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는 운명 결정론에 대립되는 자유의지에 대해 강조한다. 영화의 대부분은 운명 결정론에 의해 범죄가 막아지는 장면과 그걸 신봉하는 미래 사회를 그리지만, 결국 주제는 '인간의 삶은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자유의지로 다른 선택을 함으로서 미래를 바꾸어 놓을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존주의 철학과 맥을 같이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해 '선택'하며 사는 삶을 강조한다. 즉 선택으로 인한 삶의 실존을 찾음으로서 피투적 인간이 기투적 존재로서 변모하고, 이렇게 인간은 본질의 무목적성을 넘어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과연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며, 과연 실존주의 철학에서 말한 '선택'이라는 것에 인간이 능동성을 가지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 속에서 그는 죽음을 택한다. 그의 자유의지로 악을 거부하고 결국 옳은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한 찰나, 그는 다시 과거로 돌아왔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것을 욕구했다. 스타가 될 수 있는 독점기사를 내게 해준다는 기자의 말을 듣고 그를 집으로 초청하는 그의 대답에 다시금 그 얼굴을 내민 인간의 허영, 악마의 덫.


영화의 큰 맥을 관통하는 주제인 'Vanity is my favorite sin'이라고 말하며 씨익 웃는 마지막 악마의 얼굴에서, '역시 날 이길순 없지'라는 기세등등함이 엿보인다.

자신이 미처 알수도 없는 사이, 어쩔수 없이 본능적인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인간에게, 또한 그렇게 만들수 밖에 없는 사회안에서, 그게 미처 '악'인지도 모른채 선택하며 사는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있을까? 설사 자유의지가 있다고 해도 인간이 제대로 쓸수도 없는 자유의지는 과연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선택한 자유의지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 인간의 삶으로 진다는 것이 다소 부당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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