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은 종교를 왜 믿는것일까?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일주일이 되었다. 장례를 치르고 화장을 끝낸지 불과 사일째, 할아버지의 부고를 받았다. 코로나19에 걸리신 후 후유증으로 아무것도 못 드신지 열흘 째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늘 독립적이고 독불장군같은 성품에 자식들에게 혹시 짐이 될까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성당과 노인 보호소에 홀로 걸어 다니셨던 할아버지는, 몸이 아프시자 마자 더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반복하시더니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나셨다. 일주일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사실도 모르신채..
사실 따져보면 실질적인 사인은 코로나19 이지만, 격리해제가 된 이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코로나19 사망 지원금도 받지 못했다는게 억울했다.
할머니와 동일하게 장례미사를 치뤘다. 한 평생을 부인과 함께 다니시던 그 똑같은 성당에서, 똑같은 신부님이 미사를 주관해주셨다. 일주일 전 미사는 마치 매뉴얼대로 진행되는 느낌이었다면, 이번 미사에서는 신부님이 마음이 많이 안좋으셨는지 따로 준비해오신 말들을 해주셨다.
요한복음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할아버지께서는 분명 지금 하나님의 곁으로 가셔서, 하나님의 거처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 부인을 보셨을 것입니다. 가서 말씀 하시겠죠. 여보, 아니 내가 먼저 온 줄로만 알았는데 당신이 먼저 와 있었소? 라고. 그리고는 하나님이 할아버지를 위하여 또 아늑하고 편안한 거할 곳을 마련하러 오시니, 그 거처에서 할머님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듣는 내내 쉴새 없는 눈물이 흘러 내리며, 황망하고 텅 빈 마음을 누군가가 부드럽게 만져주는 느낌이 들었다. 힘들었던 세상을 떠나 훨씬 더 편안하고 안락한 곳에 가셨을 거라고. 그 곳에서는 이승에서 평생을 괴롭히던 돈에 대한 걱정도, 아픈 몸에 대한 고통도 없이,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계실거라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 세계에서는 소멸되었지만, 다른 궁극의 세계로 가셔서 계속 숨쉬고 계시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자 그들을 떠나 보내는 과정이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았다.
나는 천주교도가 아니다. 평소에 종교를 믿어본 적도 없고, 오히려 따지자면 과학의 신봉자다. 내가 평소에 믿고 있던 죽음에 대한 가치관은 '영원한 소멸'이었다. 불교에서의 '환생' 철학도, 기독교나 천주교에서의 '천국과 지옥' 교리도 나에겐 전혀 와닿지 않았다. '뇌'의 작동을 인간은 영혼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며, 몸과 뇌가 기능을 멈추면 그냥 우리는 원소로 분해되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라고 믿었다. 천재 과학자 스티브 호킹이 했던 '뇌는 작동을 멈추는 컴퓨터' 라는 말은 오랫동안 내 죽음에 대한 믿음을 관통하는 비유였다.
천국은 실재하지 않는다. 천국이나 사후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동화일 뿐이다. 마지막 순간 뇌가 깜빡거림을 멈추면 그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 뇌는 부속품이 고장나면 작동을 멈추는 컴퓨터다. 고장 난 컴퓨터를 위해 마련된 천국이나 사후세계는 없다.
그런데 만약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누군가가 저 말을 나에게 했다면 절망과 허무함에 몸부림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픔을 겪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아픔을 쉽게 말한다. 타인의 아픔에 대해 쉽게 생각하고 그들의 믿음을 유치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만다. 혹시 나 또한 그랬을까?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이 도저히 감당이 안되어, 혹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인생이 너무 허무한 나머지, 행복한 믿음으로 그 고통을 극복하고 치유받고자 하는 노력을 내가 그동안 동화같은 이야기라고 무시하며, 오만방자하게 살아온걸까?
죽음과 끝.. 인간은 하루하루 죽어간다. 어찌보면 인간의 삶은 죽음을 향한 달리기이자 여정이다. 이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이다 숙명이며, 생즉고의 근본적인 이유도 아마 어찌할 수 없는 생의 유한함이라는 한계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종교는 이런 인간의 한계를 따뜻하게 어루만져준다.
할머니의 유골과 할아버지의 유골을 나란히 묻어드렸다. 노년에는 두붐의 금슬이 꽤 좋았다고 들었는데, 평생을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었던 대로, 천국에 가셔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할아버지를 묻어드리고 내려오는데 유난히 햇살이 따스하고 날이 좋았다. 마찬가지로 내 발밑으로 끝없이 펼쳐진 코발트 블루의 동해 바다, 그리고 그 물 위에서 산산조각나서 발광하는 낮 두시의 햇빛, 따뜻한 기온에 어쩔수 없어 팝콘처럼 터져버린 벚꽃나무, 그렇게 숨막히게 아름다운 경치와 함께 할아버지를 보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