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이를 갖고 싶지 않은 이유
파혼한 전남친과 소개팅 이후 애프터를 한 날이었다.술을 마시고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나에게 있어 여러가지 남친 자격 심사(?) 중 가장 통과하기 어렵지만,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을 만족스럽게 통과해야만 누구든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어쩌면 통과의례같은 거였다.
“만약에 지금 사랑해서 만난 누군가가 아이를 못가지거나 아니면 아이를 갖기 싫어하면 어떻게 할거야, 그래도 계속 만나서 결혼할거야?”
그랬더니 그는 난생 처음 그런 질문을 들어본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더니, 몇 초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생각을 마쳤는지 꽤 진지하고 확신에 찬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더이상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고 후회하고 싶지 않아. 함께 있을때 행복한 것이 가장 중요한거니까, 난 그런 사람이어도 결혼할거야”
그 사람이 빈말이나 누구를 꼬시기 위해 입바른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듣고 싶었던 대답이 그의 입에서 나오자 아 됐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오빠 우리 악수 한번 하자”
기쁘다고 갑자기 안을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술김에 악수를 청했고, 그는 손을 잡으면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웃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나에게 맞춰준 수많은 것들이 있지만 내가 가장 고마웠던 부분이었다.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사춘기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마는 38살쯤, 그러니까 내가 11살에, 내 동생을 낳았다. 임신을 해서 입덧을 할 때부터 출산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엄마의 건강했던 몸이 하루하루 점점 망가지는 것을, 한 몸에서 젊음과 생명이 조금씩 사그라들어 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엄마는 산후조리원은 커녕-그 시대 모든 여자가 그랬듯- 퇴원을 하자마자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아픈 몸으로 혼자 아이를 키웠다. 정말 홀로, 그 큰 짐을 떠앉았다.
자연분만을 하고 회음부 절개를 한 후 회복기간의 그 고통, 출산후 아예 제기능을 못하던 양 손목과 허리, 임신을 하고부터 소화가 되지 않아 늘 입에 달고살던 사이다, 급격히 늙어버린 엄마의 몸과 얼굴, 휑하게 빠져버린 머리..
그때 나는 자식은 모체를 갉아먹으면서 자라나고, 번식이라는 것은 모체의 건강과 안녕과는 전혀 무관한 일임을 깨달았다. 유전자는 이기적이라 개체수를 늘리는 목적 하나로만 행동하고, 결국 세상에 나와 번식이 완료되기만 하면 끝이다.
반면 그 아이의 아빠의 삶은 단 하나도 변한게 없었다. 언제나처럼 술마시고 늦게 들어오고, 아침이 되면 일하러 나갔다. 병원은 6시에 끝나는데 왜 매일 술에 취해 가누지 못하는 몸을 이끌고 새벽에 들어와야 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가진 않지만 어쨌든 아빠의 삶은 나와 내 동생이 없었어도 굉장히 흡사했을 것이다.
똑같은 돈을 벌고, 똑같이 망나니처럼 살았겠지. 다만 그 돈을 몇명이 나눠쓰냐 혼자쓰냐의 차이일 것이다. 내가 아빠만큼 돈을 벌어보니 알겠다. 나는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가정을 위해서 내 몸을 갈아넣는 것보다, 내가 벌어온 돈을 나눠쓰는 방법을 택할 것이다.
가정이라는 것은 - 그리고 그 가정의 생물학적인 목적인 - 임신과 출산과 누군가를 양육하는 것이라는 것은 여자의 희생이 없으면 이루어 질 수 없구나, 라고 어린 나이에 뼈저리게 느끼며 나는 절대로 저런 삶을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나는 ‘희생’이라는 말을 들으면 두드러기가 난다. 한 사람의 온전한 망가짐을 숭고한 모성애로 포장해버리는 세상.
아프고 늙고 힘없고, 더이상 아무 취향도, 기호도 없어져버린 우리 엄마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직도 자나깨나 본인의 안위보다 자식들의 행복이 삶의 낙인 우리 엄마, 자식들의 삶의 목적이자 세상인 엄마, 하지만 너무 슬프게도 그녀의 자식들의 목적과 세상은 엄마가 아니다.
생각이 점점 확고해진 것은 아마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을 거치면서였다. 사는게 너무 힘들었다. 외롭고, 미치도록 외롭고, 외로워 숨이 막힐것 같았다. 한참 세상에서 외로움과 고통을 견디다 집에 가면 더 외롭고, 끔찍했다.
내가 지은 업보로 인해 세상에 태어나고, 그 생즉고의 윤회의 고리를 끊기 위해 수행을 하는 불교를 생각해보면, 결국 고통의 세상에 또 한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일까 생각했다. 아이를 낳는 것 자체가 업을 짓는것이 아닐까. 인간은 너무 잔인하고 이기적이고 -성악설을 굳게 믿는 입장에서- , 못지않게 인간을 위협하는 삶의 터전도 점점 잔인해져만 가는데 그 무엇이 되었든 어느방향으로 생각해봐도 나에게는 낳지 않는 쪽이 맞았다.
어렸을 적 만났던 한 남자친구는 이런 내 말을 듣더니 이기적이라고 했다. 아이를 낳으면 얼마나 행복하겠냐면서, 결국 너가 희생하기 싫어서 그런거 아니냐고 물었다.
그니까 왜 아이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낳아야 하는거고, 왜 ‘네가’ 아니라 준비도 안된 내가 자식을 위해서 희생을 해야 하냐고,
‘왜’라는 질문에 대하여 단 하나도 이해시켜 주지 못한채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사회가, 이 구성원들 모두가 단체로 세뇌당한게 아닌가 싶었다. 아니면 유전자에 복종 당하거나-
내가 아이를 낳지 않는것이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감정만을 위하여 아이를 낳는 것이 이기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태어나기를 선택한 적이 없다. 나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태어나지 않기를 선택했을 지도 모른다. 태어날 아이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런 동의도 선택권도 받지 않은채 내가 세상에 만들어 놓음으로써 태어남을 당해진 것이다. 그러면, 그 아이의 인생은 분명 태어나지 않기를 선택했을 때보다 태어났을때가 행복한 상태여야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 선택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그렇지 않다. 사회는 충실한 일꾼을 생산하기만 하면 그만이고 유전자는 번식만 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한 사람의 삶과 마음에 대한 고려는 하지 않는다.
아이를 왜 낳았냐는 질문에, 대부분 아이를 낳는 것이 내 인생에서 차원이 다른 행복감과 충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라고 대답을 한다.
아니면, 결혼을 했으니 아이가 없으면 심심하고 갈라설 확률도 높아져서라거나, 아니면 노후에 아프면 돌봐줄 사람도 없고 적적할까봐 라고들 대답한다.
한참 잘못된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내 충족을 위하여 낳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희생할 준비도, 그 당위성에 대해서도 모르는 사람이 감히 가져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