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고 큰 애들은 내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거라는"
흔한 소재인 못난(?)여자와 잘난 남자의 사랑스토리를 그린 듯 싶은 드라마 <또 오해영>을, 흔하디 흔한 드라마가 아니라 누군가의 인생드라마로 만들어 주는 데에는 오분 남짓이 안되는 한개의 씬이면 충분했다.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쁘고 모든 면에서 잘난 ‘오해영’이, 못생기고 공부도 못하고, 여기저기서 무시당하고, 맘대로 되는것 하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른바 조금 쳐지는 ‘오해영’을 바라보면서 하는 독백 씬이다.
"그때 그런 예감이 들었어, 평생 너한텐 질거같다는.
사랑받고 큰 애들은 내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거라는"
구중궁궐에 사는 멋진 그녀는 매번 1~2등 하던 성적표 대신 다른 오해영의 처참한 성적표를 우연히 손에 쥔다. 버스를 타고가는 그녀에게 ‘이거라면’ 혼이라도 나겠지 하는 잠깐의 기대감이 눈빛에 서린다.
“나 이번엔 공부 안하고 그냥 다 찍었어, 그래서 그래" 라며 성적표를 내밀고, 받아든 엄마는 딸이 2등을 하든 250등을 하든 전혀 관심이 없는 눈치다. 대충 서명을 한뒤 엄마는 말한다.
"나 이번에도 니 아빠랑 이혼할것 같다"
성적표를 되돌려주던 날, 다른 오해영은 엄마 손을 잡고 그녀에게 와서 처참한 그녀의 성적표를 가져간다. 성적에, 외모도 그저 그런 그녀를, 그녀의 엄마는 손을 꼭 잡아끌며 말씀하신다.
“기죽지 말아 성적이 대수야?”
잘나든, 못나든 엄마에게는 세상 1순위인 딸이니까.
저 장면을 보고 마음이 무너지도록 아팠던 것은, 마치 그녀의 허탈함과 한계를 심장이 서늘하도록 똑같이 느낄수 있어서 였을 것이다.
엄마의 따뜻한 손은 어느정도의 온도일까 생각했다.
자신없는 외모와, 보잘것 없는 성적표의 숫자와, 세상을 살아가며 넘어져 다친 상처들까지 모두 잊게해주는 뜨거움이겠지.
항상 부러웠던 애들은 그런애들 이었다. 티없이 밝고 행복한 애들. 어디서나 재잘재잘 엄마아빠, 가족얘기를 하면서 웃는애들. 세상을 꼬인눈으로 보지 않고, 사랑이 가득하고, 그래서 ‘나중에 좋은 사람 만나서 아이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싶다’고 순수하게 웃는애들.
엄마랑 수학여행 기념으로 함께 옷을 쇼핑하러 가서 산 옷을 자랑하거나, 간만에 날씨가 좋아 가족여행을 갔다거나, 성적이 안나와서 엄마한테 혼났는데 한참 울다가 방에서 나와보니 테이블위에 불고기가 잔뜩 올려져있어 정신없이 먹다가 구박당했다는 일화들, 주말에 아빠랑 자전거를 타러 갔다가 집에오는 길에 사먹은 붕어빵 같은 이야기들을 들을면, 전교 1등의 성적으로는 살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 가슴속 어딘가부터 뭔가 뒤틀렸다.
가장 기억이 나는 친구는 고등학교 1학년때 같은 반이 되어 종종 같이 점심을 먹고 함께 공부를 하던 친구였는데, 이 친구는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고 좁은 집에 다섯 식구가 같이 살던 친구였는데 이 아이는 세상을 보는 눈이 참 맑고 예뻤다.
친구의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어서 국내외 출장을 많이 다녔는데, 장기 출장을 가실 때마다 가족들을 위해서 편지를 써서 보내 온다고 하셨다. 내 친구는 어서 집에가서 아버지의 편지를 읽고 싶다고, 자기네 가족들은 아버지 편지가 오면 엄마, 언니, 자신, 그리고 동생 이렇게 넷이 모여서 함께 읽고 대화를 나누며 울고 웃고 한다고 했다. 그 아이의 일상같은 말이 나한테는 너무나도 자랑같이 느껴졌었다.
내가 집에서 울었던 기억은 고통스러운 기억들밖에 없었기 때문에, 가족 중 누군가의 편지를 읽고 운다는 것이 쉬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나는 한번도 그런 친구들을 이겨본 적이 없다. 늘 밝고 사랑에 가득찬 아이들.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마음속에 받은 사랑이 너무 단단해서, 타인에게도 그런 사랑을 마음껏 나눠줄 수 있는 아이들.
'사랑받고 자란애', '사랑받고 자란 사람들의 특징' 따위가 유행이 되어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 정작 사랑을 받고 자란 애들은 별 관심이 없을 테지만, 어딘가에 결핍과 아픔이 있는 사람들이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 대서 권태감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닐까.
하지만, 지겹고 피곤해도 어쩌랴. 유년기의 넘치는 사랑과 인정이 한 사람에게 주는 묵직함과 단단함은 누군가가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큰 자산인걸.
요즘들어 갈망이 든다. 사랑을 주고싶다는. 최선을 다해 사랑을 주고, 그 누군가가 나로부터 사랑받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욕구. 사랑을 받은적이 없다는 핑계로 누군가에게 상처만을 주고, 받는 것만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임을 깨달은지 오래되지 않았고, 과거는 과거로 묻어버린 탓이다.
언젠가 우연처럼, 기적처럼, 내가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맘이 드는 사람이 내게 온다면, 나에게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당연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내 있는 힘껏 바닥까지 긁어서 사랑을 주고 싶다. 비록 나는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자랐지만, 그래서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그걸 주기가 힘들었지만, 이제는 달라져보자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