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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eah Jan 22. 2023

결혼 두달전 파혼했습니다_5

결국 인생에서 내가 이룬것은 없었다


파혼 이주 후, 월급날 점심 대뜸없이 문자가 왔다. 당장 현금이 없어서 위약금 반을 월급 들어온날 준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986,000원”

“스드메 위약금 반 제외하고 보내도 되지?”

“그렇게 해”

“짐은 언제 가져갈거야”

“연휴나 다음주에 가져갈게, 집 비는날 알려줘도 되고”

“언제 빌지 모르니 올 때 연락줘”


이 대화를 마지막으로 위약금 정리도 전부 끝났다. 이제 그는 내가 없을때를 빌어 우리집에 와서 조용히 짐을 가져갈 것이다. 그럼 정말 우리 둘 사이에 남은건 하나도 없어지겠지.

잘 정리된 후련함과 동시에 섭섭함이 겹친다. 헤어짐도 만남처럼 서로 예의를 지켰더라면 어땠을까.

어쩌면 같이 아이를 낳고 평생 함께할 수도 있었던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가볍게 정리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이런 생각도 어쩌면 미련이고, 헤어짐에는 이런 미련 따위도 쥐약일까.


만났을때 그는 시작에 머뭇거리는 나를 설득하기 위해 몇일에 한번씩 서울에 찾아와 끈질기게 사귀자고 말했다.

무슨 이런 남자가 있을 정도로 만날때마다 사귀자고 하길래 이사람은 자존심도 없나 싶다가도, 서른다섯살에 고등학생처럼 고백하고 따라다니는 남자가 처음이라 신선했다.

그런데 헤어질때 우리는 얼굴도 보지 못하고 전화로 헤어졌다. 그리고 문자로 남은 미련들을 정리한다.


그가 날 이해해주지 않더라도, 내가 그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서로가 원하는 방식대로 사랑해주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조금 외롭고 지칠지라도,

그가 날 열렬히 원하면 못이기는척 눈감고 결혼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도 누군가에게 열렬히 사랑받고 이해받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내 부족한 사랑과 이해가 참 보잘것 없어 마음의 한 구석이 시리다.




설 연휴에는 면목이 없어서 집에 가질 못했다. 엄마아빠 얼굴을 보면 울것만 같았고, 친척들 앞에서는 이러쿵 저러쿵 내 사정을 설명할만큼 내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탓이다.

집은 또한 나에게 ‘쉼과 위로’의 장소가 아니기도 했다.

나이가 하나씩 들면서 집은 내가 무언가를 가져다주고, 잘 된 일을 공유하기 위해 가는곳이지, 내 아픔을 치유받거나 상처를 나누거나, 위로받으러 가는 공간이 아니었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넘어져 무릎이 다 까지면 집에가서 약바르고, 엄마 품에 안겨서 한참 울다가, 따뜻한 저녁밥을 먹고 그렇게 안정을 찾아서 잘 수 있는 그런 곳은, 이미 내가 사춘기가 지나면서 사라진지 오래다.


실패없이 잘 해왔던 인생에서 가장 큰 오점이 생긴것 같다. 내가 이룬 모든것들이 이 파혼 하나로 모두 무너져 내린 느낌이다. 여자의 인생이 결혼 하나로 가치가 있다 없다 나뉘는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이 사회에서는 결혼 안한 여자를 보는 시선이 가혹하다. 거기다 서른 다섯이라는 나이까지 더해지면 결혼 시장에서는 상품가치가 없는 폐급이라느니, 15년탄 중고 아반떼 사갈사람이 누가 있겠냐느니, 40 넘은 돌싱밖에 만날 사람은 없을거라느니 라는 말로 존재 가치 자체를 훼손시킨다.


나는 참 열심히 살아왔다. 회사에 9년 이상 다니면서 성실히 일해서 고과 잘받아 승진했고, 회사 다니면서 대학원도 졸업하고, 졸업한 이후에도 이래저래 공부해서 자격증도 몇개 땄다. 차도 사고, 탄탄한 독립의 기반도 마련하고, 돈도 많이 모았다. 일이년씩 좋은 추억으로 남을 연애도 계속 했고, 운동이나 미술, 피아노 등 여러가지 배워 취미도 만들었다.

무언가 열심히 달려왔던 취직 이후 9년여간의 내 꼬깃꼬깃한 인생이 파혼 하나로 아무것도 아닌게 되어 쓰레기통에 처박힌 느낌이다.




회사 입사 동기들은 총 40 명이었다. 공공기관 특성상 한번 동기는 퇴직할때까지 쭈욱 삶을 공유하며 동기도 되었다 육아동지도 되었다가 같은반 학부모가 되었다가 같은팀 죽마고우가 되었다가 하게된다. 동기 중 여자가 21명. 비혼주의 남자 몇명을 제외하곤 거진 다 결혼을 했고, 여자는 나랑 한 언니 딱 두명 빼고 전부 결혼을 했다. 그중의 또 절반이상은 아이가 있다. 한창 결혼을 다들 하는 시기에, 나는 만나던 사람과 헤어져서 시기를 놓쳤고, 이번에는 드디어 나도 가려나보다 하다가 결국 이렇게 되었다.


헤벌레하며 동기들이며 회사 사람들 결혼식은 다 쫒아다니고 축의금을 펑펑 내며 축하를 해주면서, 나도 내 인생에도 많은 사람들이이 이렇게 축하받고 싶었다.

내심 누군가를 만나고 은밀히 결혼 준비를 하며 드디어 나도 사람들에게 청첩장을 돌리며 남편될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만났는지부터 시작하는 달달한 내 연애 스토리부터 내 인생 계획까지 수줍게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생기겠구나, 나도 드디어 네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앉아 동기들이 시시콜콜 남편이든 시댁이든 얘기할때 대화에 낄수 있겠구나. 드디어 이 집단의 주류이자 다수가 되겠구나, 남들이 갖고 이룬 것을 나도 드디어 가질수 있겠구나, 더이상은 남들이 결혼에 대해서 말할때 눈치보고 주눅들지 않을 수 있겠구나, 드디어 후배들에게 ‘결혼 늦게 해도돼, 안해도 괜찮아. 미혼일 때가 제일 좋지뭐, 즐겨! 나도 돌아가면 결혼 늦게할란다’ 라고 여유부릴 선택권이 생기겠구나! 라는 생각에 설레고 기뻤다.


설렘과 행복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인연이 아니었다는 말이 가혹하게 들릴 정도로 파혼 이후의 나의 회사 생활은 잿빛이다. 누군가가 결혼에 대해 주제를 꺼내기만 해도 금새 마음 한구석이 저리고 회사에서 애써 숨겨왔던 내 마음속 그늘이 다시금 깊게 드리워진다. 한없이 작아진다. 아무도 말을 걸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하는 어딘가의 곳으로 숨고 싶다. 한때는 내 동기고 희노애락을 공유했던 친구들이 저도모르게 마음속에 생채기를 입힌다.


이 세상에서 유일한 실패자가 된 것만 같다.


결혼을 하고 육아휴직을 하고, 지점에 갔다 오며 몇년씩 자리를 비운 동기들이 하나씩 내가 있는 본점으로 돌아온다.

“우리 애는 이번에 다섯살이 됐어, 시간 참 빠르지, 그니저나 너는 언제 결혼하니? “

생각해본다. 정말 많은 것을 했지만 난 결국 그들에게 아무것도 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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