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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eah Feb 10. 2023

결혼 두달전 파혼했습니다_9

“근데 나는 시발 얘랑도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연애빠진 로맨스>의 전종서의 담담한 술주정이 마음에 깊게 들어와 박힌다.


“근데 나는 시발 얘랑도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얘랑도..이렇게 될줄 알았다고


극중 전종서는 고작 서른에 함께 술마셔줄 세명의 친구들이 있었지만 나는 서른 다섯에 저렇게 술마셔줄 친구도, 내 속마음을 다 비쳐낼 사람도 없다는게 더 문제였지만.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는 항상 이런생각이 있었다. 그 끝이 언제일까.

과연 이남자와 이혼을 하지 않고 잘 살수 있을까?

아니면 이 남자와 결혼자체는 할 수 있는것일까?

항상 만나는 모든 남자와 추하고 지저분하게 끝을 맞이했는데, 이 남자와는 예외일까?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 결혼 못할거라는거. 얘랑도 이렇게 비참하게 끝낼 날이 올거라는거.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피할수 없는 힘든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게 되면 그 상황을 피할수 있는 상황이 와도 극복하려는 시도조차 없이 자포자기하는 현상.

계속되서 반복되는 아픔들에 무뎌지고자, 그냥 그 아픔을 타개하고 피하는 노력이 아니라 그냥 담담히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버렸다.

내 인생의 운명은 이런거겠지 하며.


어쩌면 마지막을 생각하고 만났기에 마음을 다 못열었을지도 모른다. 언젠간 이사람과도 이렇게 될 줄 무의식적으로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당장 내일 헤어지더라도 내 삶에는 타격이 없을만큼 마음의 문을 꼭 닫고 그가 원한만큼 사랑을 주지 못했던 것이 지금와서 보 니 많이 후회가 된다. 하지만 내가 과연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일까?


항상 방어적으로만 만나왔다.


그가 떠나가도 난 회사를 가서 아무렇지 않은척 바쁘게 일을 해야하고, 돈을 벌어야하고, 친구들을 만나 평소처럼 얘기하며 웃어야 하고, 혼자 있는 집에서 죽지않고 밥을 먹으며 어떻게든 살아내야했다.

내 내밀한 모든것을 드러내고, 상대방에게 내 모든것을 의지하고 맡기는 순간, 그는 내 세상 전부가 되고

그렇게 언젠가 올 이별의 순간에 대처하지 않고 누군가를 거리감없이 사랑하게 되면 결국 망가지는건 내 자신이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얘랑도 이렇게 될줄 알았다고 생각하며 쿨병 걸린척 툴툴 털어내는게 오히려 내가 상처를 덜받는 길이었을 지도 모른다.




파혼을 알리고 아무 친구들도 만나지 않았다. 부서 이동을 해서 바쁜탓도 있겟지만, 사실 누굴 만나서 아무렇지 않은척 웃을 용기가 없었다.

한달이 지난 지금 점점 더 괜찮아 져야 할 것만 같은데, 오히려 마음은 더 복잡해지는게 점점 더 깊은 늪으로 빠지는 느낌이다.


함께 있을때 그 따뜻함이 그리워서 미치게 보고싶은 날이 있는가 하면,

헤어진 이유를 생각하다 보면 여기서 그만둔게 다행이라고 가슴쓸어내리는 날도 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가 나에게 줬던 안정감이나 사랑이 그리워 지는 날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그 사람들이 나에게 해주는 무수한 배려들을 내가 그동안 받지 못하고 살았구나 싶어 억울한 날도 있다.


오늘같은 날은 유난히 보고싶은 날이다. 너무 힘들고 지겨웠던 일주일이 지나고, 누군가를 만나는 설렘과 행복으로 주말을 맞이해야 하는데

뭔가 텅 비고 공허한 느낌으로 금요일 밤을 맞이했다. 집에 혼자 돌아와 맥주를 마시며 넷플릭스를 넘겨보는데 모든 영화들이 다 같이 본 작품들이었다.

아, 우리 그때 이 영화를 보고 이런말을 했었지, 이런 농담을 하면서 웃었지

유난히 그의 크고 가느다란 손이 그리웠다. 그 손을 만지면서 주말 저녁마다 집에서 영화를 봤었는데.


회사에서 정말 가기싫은 해외출장을 가라고 한 것도 한 몫했다. 돌아오는 날이 원래 결혼하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한국에 있으면서 질질 짜는것보다 오히려 몸도 피곤하고 좋아, 그 날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거야 라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혹시 결혼을 했더라면..’ 이라는 생각이 드는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취소되지 않은 호텔들은 끊임없이 알람과 메일을 보내온다. 볼때마다 가지못한 - 어쩌면 평생 갈수 있을지 의문인- 신혼여행을 떠올리게 한다. 마찬가지로 일상의 모든 것들이 아직은 결혼과 그 날과 그 이후의 계획들에 모두 연관되어 있다.


또 한달, 그리고 또 한달이 지나면

아무렇지 않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내 인생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고 자신있게 글을 올릴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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