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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eah May 29. 2023

외로움과 쌍둥이가 되어 태어난 운명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 Where the Crawdads sing>

어떤 외로움은 평생을 걸쳐 누군가를 괴롭힌다.

가족들이 다 떠난 후 혼자 습지의 낡은 집에 남아 홍합을 캐며 살아가는 Marsh Girl 카야.

그녀에게 외로움이란 평생을 걸쳐 함께 해야할 분신이자 숙명같은 것 이었다.


엄마가 떠나고, 남매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마지막 남은 아버지까지 떠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게 되었을때

세상과 단절된 외진 나무집에 누워 온전히 혼자가 된 카야는 이렇게 독백한다.

“완전히 혼자가 되자, 모든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들렸다(Being completely alone was a feeling so vast, it echoed)”


평생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탯줄을 자를때 아마 외로움이라는 것을 같이 잘라낼 수 있었던, 그런 운명을 가진 사람들일것이다.

그렇게 가위로 외로움을 도려낸 사람들에겐, 혼자라는 것이 얼마나 광활하고 숨막히는 감정인지,

혼자 내동댕이 쳐진것이 얼마나 사람을 무력하고 약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그 속에선 작은 생명이 하찮게 날아가는 소리 조차도 얼마나 큰 의미가 되어 들리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녀에게처럼, 누군가에게 외로움은 너무 공허하고 광활하여 손도 쓸새 없이 매분 매초간 온몸을 잠식하고 영혼을 갉아먹는 쓰나미이다.


매번 생각했다.

사람들의 운명은 모두 정해져 있는 것이고, 외로움과 쌍둥이가 되어 태어난 사람들이 있는걸까?

그래서 카야가 나와 같았다. 철저한 고립되어 섬처럼 살아가는 그녀가,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둥그러니 혼자 남겨서 고립되어 버린 나와 같아서.

외로움을 이겨내고자 오고 가는 관계들에게 의지했지만 결국 결론은 모두 떠난 그 빈자리에 혼자 남겨졌기에,

삼키다 결국 터트리고 만 그 비릿하고 짠내나는 눈물의 맛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첫번째로 마음을 열었던 남자친구 테이트가 떠나고,

단순 호기심에 그녀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 두번째 남자친구 체이스의 진실을 알게 된 후,

어쩌면 평생 그 속에서 몸담고 의지하며 살았던 자연조차도 위로해 줄 수가 없는 마음의 빈 공간은 아슬아슬하게 살아오던 카야를 완전히 무너지게 만든다.


그녀에게 사람들이란 두가지 부류였다. 나를 적대시하여 인간처럼 취급하지도 않는 사람들 혹은 호의를 베풀며 다가왔지만 결국 떠나버린 사람들.

남아있던 인연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갯벌 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버려진 조개껍질처럼 느껴질때,

함께 인줄 알았던 포근함이 갑자기 사라지고 섬광처럼 혼자라는 것을 깨달았을때 그것을 똑바로 마주하는 순간에 그녀는 이런 말을 한다.


”혼자 살아야 했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실낱같은 기대의 끈을 미처 놓지 못하다가, 그 끈이 기어코 끊어진 것을 마주했을때 느끼는 박탈감이 어떤지 잘 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잔잔한 위로는 나와 비슷한 그녀의 삶과 감정에의 공감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결국에 그녀의 삶의 언뜻언뜻 비치는 하나의 희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희망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지만 그래도 인간에게 주어진 희망과 행복의 양은 정해져 있기 때문일까.

모진 세상의 파고를 살아오면서도, 죽지 않고 살수 있었던 것은, 이 모든것을 결국 진정 사랑한 단 한사람과 나눌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덕분이었음을.


결국 쌍둥이 같던 외로움을 몰아내고, 짙은 그리움을 물리치고, 뿌리깊게 박힌 좌절감을 베어내고 그녀의 곁에 문득 들어온 것은 어느 누구의 삶이나 있는 볕이었기에,

행복하고 평온하게 노후를 보내다, 아름답게 생을 마감한 그녀의 삶이 마음을 쓰다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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