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의 라이벌
역사를 기반으로 하는 영화는 흥미롭다. 특히 막강 권력의 중심인 왕궁의 이야기들과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는 몇번이나 반복되며 화면을 물들여왔다. 선왕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교훈을 줄 수 있지만 여러번 반복하다보면 다큐멘터리에 그칠 수도 있다. 권력의 싸움, 치정, 배신, 용서 등 인생의 단면들을 일반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왕궁이라는 무대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매력적일 수 밖에 없다.
우리에게 숙종-인현왕후-희빈장씨의 삼각관계나 영조-사도세자-정조로 진행되는 비극만큼이나 익숙한 왕실 스토리로 헨리8세-메리1세-엘리자베스1세로 이어지는 영국 왕실 이야기가 있다. 매력적이었으나 (아무리 왕이라도) 엄청난 여성편력으로 영국의 국교까지 바꿔버린 헨리 8세와 다시 영국을 피로 물들인 블러디 메리 1세, 아마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 중 하나인 엘리자베스 1세의 스토리는 무시무시한 권력 다툼 안에서 치정과 물고 물리는 배신, 연민 등등 드라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1세 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작품으로 재탄생하고 있는 비운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의 얘기도 이 흐름과 함께 한다.
지난달 막을 내린 제 91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분장상 후보에 올랐던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가 상영 중이다. 많은 작품들이 그동안 헨리 8세와 그의 여인들이나 엘리자베스 1세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영화는 메리 스튜어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 고귀한 피를 타고 났지만 탄생부터 죽는 순간까지 역사의 희생양, 혹은 너무 곱게 큰 나머지 군주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다는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는 메리스튜어트는 본인의 왕권과 고귀함을 지키고자 운명과 맞서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녀는 총 3번의 결혼을 하게 되는데 모두 순탄치 않다. 첫번째 남편 프랑스와 2세는 어린 시절 같이 지낸 소꼽친구였고 어린 나이에 프랑스 왕비가 되었지만 1년만에 남편이 요절하였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매력적인 미망인으로 많은 정치적 야망을 가진 인물들이 그녀의 남편 자리를 노렸으나 첫눈에 반한 두번째 모지리 남편과 결혼한다. 콩깍지가 벗겨진 후 냉냉한 결혼 생활 중 아들을 얻기도 하지만(훗날 제임스 1세) 두번째 남편도 살해당하고 이 계략을 꾸민 세번째 남편과 결혼하게 된다. (여기서는 이미 불륜 사이었다는 의견도 있고 강제로 당했다는 의견도 있다). 어쨌던 군주이자 여성으로서 체통을 지키지 못한 죄로 온갖 협박을 받다가 자신의 라이벌 엘리자베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결국 그녀에게 처형당한다.
연약할 지 모르지만 고귀하고 본인의 가치에 대해 한번의 의심도 없었던 강한 면모를 시얼사로넌이 너무나도 완벽하게 표현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는 이 영화에서 숙명의 라이벌 메리 때문에 내면의 갈등과 불안함, 연민 등 복잡한 심정이 가득한 인물이다. 아버지 헨리 8세와 앤 불린 사이에 태어난 서자 출신에다가 종교갈등이 극대화 된 시기에 극적으로 얻어낸 왕위, 출생이나 외모 등등 모든것이 자기 우위에 있는 메리가 왕위계승권을 틈틈히 노리고 있는 불안한 상황에서 느꼈던 열등감을 미묘하게 표현했다. 결국 잉글랜드로 망명온 메리를 처형해야 한다는 여론 속에 정치적 이유도 있었겠지만 연민 또한 그녀를 쉽게 처형하지 못하게 하였고 20여년간을 국빈 대접을 하며 가두어 놓는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처형해야 하는 상황이 오지만 그 날도 마음이 편치 않다.
엘리자베스 1세로 열언한 마고 로비. 할리퀸은 잊어라.
이 영화의 후반부부터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시킨 스토리까지 겹쳐지는 또 다른 영화는 2007년작 [엘리자베스; 골든에이지]이다. 이 영화는 엘리자베스 1세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기 때문에 메리 역을 맡았던 사만사 모튼은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엘리자베스에게 존재만으로도 위협적이었던 당시 상황을 표한하기에 충분하였다.
처형 당하기 전 순교자를 표현하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메리 역의 사만사 모튼
1998년 개봉한 [엘리자베스]의 후속편인 [골든에이지]는 풍파 속에 여왕이 된 엘리자베스 1세의 의 힘과 역량에 집중하였고, 사랑과 연민, 불안감 등 여러가지 사람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밖에 없는 감정을 억누르며 절대 군주로 자리를 확고히 하는 그녀의 모습에 집중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스페인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위대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유명한 발언이 있다. 진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짐은 국가와 결혼하였다'이다.
흔히 국가와 결혼한 처녀 여왕으로 잘 알려진 엘리자베스라고 해서 로맨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단 많은 유럽의 군주들이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위해 그녀에게 구혼했지만 어렵게 쟁취한 영국국교회 사회를 천주교 국가의 수장과 결혼하며 위태롭게 만들 수는 없었기에 매번 빠져나간다. 처음부터 난 절대 결혼안한다고 버텼던 것은 아니었다. 많은 혼담이 성사될 듯 안될듯 오고 갔으나 막판에 틀어버린것은 엘리자베스였다. 영화에서도 왕이 아닌 탐험가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자신의 가장 충실했던 하녀와 사랑에 빠진 상황에 괴로워했다. 역사적으로도 수많은 부하들과 염문설이 있었으며 평생의 친구이자 미묘한 관계였던 남자도 있었고(로버트 더들리경) 연인관계였으나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자기 손으로 처형한 남자도 있었으니 결혼만 안했지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연애사를 보유한 인물이다.
완벽했던 엘리자베스 1세, 케이트 블란쳇
16세기 영국 역사의 중심이자 숙명의 라이벌이었던 엘리자베스와 메리. 태생도 성향도 환경도 모두 달랐고 마지막 모습도, 역사 속에서의 평가도 매우 다르다. 극단적으로 메리는 범접할 수 없었던 본인이 타고난 배경을 사랑에 눈이 멀어 스스로 말아먹은 나약한 여자로, 엘리자베스는 국가와 왕권을 위해 사사로운 감정이나 남자 따위는 제껴버린 여장부이다. 영화에서 "어떤 남자가 부마의 자리에서 만족하겠나" 라는 대사가 나오는 환경이었고 여왕이라는 자리는 인정하기는 싫지만 조금만 삐끗해도 남자 왕보다 더 많은 질책을 받을 수 있는 시기였다.
태어났을때 부터 아쉬울 것이 없어서 스스로를 불행으로 몰아버렸다는 평가를 받는 메리를 영화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에서는 본인의 고귀함을 지키기 위한 영민한 모습의 메리가 있다. 반면 메리에 대한 열등감과 불안한 정세 등으로 히스테릭한 면모를 가진 엘리자베스가 등장한다. 반면 [골든에이지]에서는 감정의 동요를 이겨내고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침몰시킨 위대한 여전사와 등장을 많이 하진 않지만 어쨋던 여러 남자들에게 휘둘리며 비극의 운명을 맞은 인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역사와 영화의 차이는 물론 있겠지만 두 여왕 모두 감정이라는 요소들을 잘 조정했냐 안했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들로 그려지는 모습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히 있다.
지금과 많이 다를까?
지금 세상의 중심에 있는 많은 여성 리더들 중 싱글이 많이 없고 불과 몇년전 싱글 여자 대통령이 이끌었던 지난 정권을 비추어 보면 메리는 남자가 아니라도 복잡한 역사의 이해관계 속에 갈등했을것이고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했었어도 위대한 군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 인생에 사랑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권력을 얻는 일이나 남자에 눈이 멀어 처형당하는 일은 아마 안생기겠지만 혹시 내가 큰 성공이라도 하면 감정조절을 잘 해서 그런것은 아닐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