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아씨들

가장 자연스러운 페미니즘 이야기

by easy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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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권인지 오십권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지만 어느 누군가에게 물려받은 계몽사의 명작시리즈가 방 한구석에 곱게 줄을 서있었고, 당시 8-9살이었던 나는 마땅히 할 일도 없어서 그 책을 순서대로 읽기 시작했다.




작은 아씨들은 아마 15번인가 꽤 앞쪽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선 다 읽은 후 바로 다시 한번 더 읽었고 저 몇십권의 시리즈를 완주하는 중간 중간에, 또 그 이후에도 여러번 나에게 반복되었다. 저 책이 왜 저렇게 좋았는지 설명하라고 하면 잘 모르겠다. 그냥 저 집에서 자매로 나도 살고 싶다는 생각 뿐. 조와 베스 그 중간 세째딸로 들어가서 같이 연극도 하고 벽난로 앞에서 노래도 하고 뭐 그렇게 즐겁게 지내고 싶었다.




계몽사 시리즈도 폐품으로 사라지고 나도 대학에 진학하며 몇년을 잊고 있었던 나의 작은 아씨들이 어느날 돌아왔다. 그것도 영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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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다 아는 내용이다.


백번도 훨씬 넘게 읽은 내용이고 특별히 빠지거나 더해진 것도 없다. 단순히 영화라서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었을까. 책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던 메그-존, 로리와 조(그리고 에이미)의 사랑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고 베스가 죽는것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눈물이 흘렀으며 저 시절의 마치 패밀리의 딸이면 행복하긴 하겠으나 사는게 편하진 않겠구나라는 생각은 들었다. 너덜너덜 거렸던 책을 대신하여 이 4명의 자매는 영화로 다시 내 인생으로 들어왔고 일년에 몇번은 가끔씩 자세히, 어떤 날은 배경음악처럼 플레이하는 리스트에 자리잡았다.




그리고 25년정도 흐른 후 다시 한번 우리에게 돌아온 작은 아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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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다양한 형태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익숙해진 컨텐츠로 갑자기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가 되긴 참 쉽지 않았을텐데 얼마나 잘만들었길래. 감독부터 그레타거윅에 이름만 들어도 후덜덜한 우리 시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출연을 하고 (+티모시 샬라메!!!) 작은 아씨들이 이 시대에 던지는 메세지가 어떤 것일지 기대는 물론 되었지만 사실 좀 뻔할것 같기도 했다.




분명 다 아는 내용이다.


책과 영화를 수백번 돌려본 나는 베스가 죽었을 때 또 울었고 이번에는 추가적으로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돌아왔을때도 울었다. 그리고 4자매 외에 다른 아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엄마와 고모.




가장 강한 아씨, 엄마


1994 엄마 수잔서랜던







2019년 엄마 로라 던




사실 작은 아씨들에서 가장 강한 여성은 엄마, 바로 Marmee.


잘살던 집안이 가난해지면 가장 괴로운 사람은 엄마일 수도 있는데 우리 마미는 그런 티가 안난다 .


남북전쟁 중 남편은 전쟁터에서 편지로 가끔 소식을 알릴 뿐이고, 똑똑하고 착하지만 어쨌던 개성강한 사춘기 딸 4명을 양육하며 함께 성장한다. 전쟁 중 국가 지원품을 나눠주는 봉사도 하고 가난한 이웃도 돌보면서 본인의 사회적 역할에 충실하다. 아빠가 다쳤다는 소식에 바로 짐싸서 가고 베스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바로 집에 돌아와 모든 것을 해결한다.


항상 현명한 판단을 내리고 딸들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한다. 기쁘고 행복한 감정 외에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컨트롤할 줄 안다.




1994년 버전과 달라진 점, 아니 달라졌다기 보다 이번 2019년 버전에서는 엄마를 설명해준 장면들이 있다.




에이미가 조의 원고를 불태우고 싸웠다가 스케이트 사고로 다시 화해하고 난 후 잠들어 있는 에이미를 보며 감정적인 자신을 자책하는 조에게 나를 닮았다며 작은 고백을 한다.


“ 나도 거의 매일 화가 나는걸. 나도 40년째 노력하고 있어. 분노에 내 좋은 면이 잠식되지 않게.”




베스의 장례식 이후 몇년 전 로리를 거절했던 조와 대화하며 외로워하는 조에게 물어보는 장면


“그 애를 사랑하니?”


“ 다시 물어보면 받아줄거에요. 근데 다시 물어볼까요?”


“근데 네가 사랑해?”


“사랑 받고 싶어요”


“그건 사랑하는 것과 다른거야.”


여자에게는 야망도 능력도 있는데 사랑이 전부라고 하는 세상이 지긋지긋하지만 너무나도 외롭다는 딸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엄마.




결혼이야기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지만 작은아씨들로 수상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로라던 엄마. 딸들에게는 최고의 supporting role인것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듯.




가장 똑똑한 아씨, 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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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릴스트립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엄마로 나오나 했는데 이 대배우가 상대적으로 많이 작은 역할을 하는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거라 생각했다. 여성 감독이 만든 여성들의 이야기인 만큼 현 영화계에 가장 큰 여성 피규어가 참여하는 것 만으로도 참 존경스럽다.


책이나 예전 영화, 수많은 컨텐츠 안에서 고모는 그냥 심술맞고 돈많고 늙은 고모다.




여전히 같은 점은 있다.


여자가 잘 살려면 결혼을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본인 조카들에게 끊임없는 훈계를 하고 올케 엄마에게도 니가 그러니 애들이 그모냥이다라는 태도를 보이긴 하지만. 오히려 (자기 기준에는)능력없는 자기 남동생을 꼬집는 장면이 여러번 나온다. 가난한 미스터브룩을 선택한 메그의 결혼식에서 니 엄마처럼 모자른 남자한테 시집가서 잘사나보자며 퍼부어댄다. (그러면서 결혼식 비용은 본인이 다 부담) 삶의 방향이 분명히 다른 조와 에이미에게 든든한 발판을 마련해 준 사람도 바로 고모다. 에이미를 유럽으로 데려가 더 넓은 세상을 보게 하였고 부자한테 시집가라고 매일 잔소리를 하지만 부자 약혼자의 청혼을 에이미가 거절했을때 별 말을 하지 않는다. 로리를 덜떨어진 놈 정도로 평가하는 장면도 있지만 정작 미국에 돌아올때 조카사위로 같이 돌아온 걸 보면 에이미의 선택을 조용하게 지지한 것으로 보인다. 조에게 그 집을 남긴 이유는? 조는 그 유산을 더 큰 가치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고모의 말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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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난 결혼 안해도 돼. 난 돈이 많잖니. 니 아버지랑은 다르게.




당시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현실적으로 파악하면서 부자집에 시집가야 팔자핀다라고 조카들이 뭐라고 하던 끊임없이 강조하지만, 정작 본인은 결혼을 안했다. 네 자매의 아버지와 남매 지간이었을텐데 남동생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지만 스마트하게 자산관리를 잘했다. 당시 상황을 유추해보면 돈이 있는 집안 아가씨들도 결국 더 좋은 집안으로 시집가는 것이 당연한 절차라고 생각했을텐데 더 나이많은 고모는 본인 스스로를 지켜나갈 힘이 있다면 좋은 집안으로 시집가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몸소 실천한 여성인듯 하다.




작은아씨들의 오래된 팬으로 사실 또다른 컨텐츠로 재탄생한다는 것에 기대와 함께 우려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대놓고 페미니즘을 외쳤다면 너무나도 촌스러운 영화가 되었을 법한테 그레타 거윅은 너무나도 현명하게 잘 그려내었다. 음악과 의상이 좋았던 것은 말하기 입이 아프고 과거와 현재를 교차한 과정은 어쩌면 너무나도 유명해서 진부할 수 있는 이 고전의 새로운 해석으로 완벽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페미니스트 엠마왓슨이 메그로 출연한다고 해서 좀 의아하긴 했지만 가끔은 철없는 아름다운 아가씨에서 강한 엄마로 성장하는 과정을 너무나도 훌륭히 소화했으며 시얼샤로넌은 조가 책에서, 또 어릴때 부터 그려온 나의 상상속에서 튀어나온 느낌이었고 사실 베스는 이렇게 여리고 어린 모습이었을거야 라는 걸 다시 일깨워준 엘리자 스캔런은 매우 훌륭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이미 플로런스 퓨는 늘 어리고 이기적이고 허영심덩어리로 늘 그려졌던 에이미를 본인이 원하는 것을 현명하게 싸워 이겨가는 야심 가득한 진취적인 여성으로 재탄생시켰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테디, 티모시 샬라메는 1994년의 크리스찬베일보다 더욱 더 유약하고 상처받은 소년같은 느낌으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주변 어딘가에 있을 법한 로리가 되었다.




200년에 가까운 긴 시간동안 수많은 방식으로 재해석된 작은 아씨들, 어린 시절 나에게는 상상속에 함께 살아보고 싶은 재미있는 가족이야기였고, 20대에는 가족 과 남녀간의 따뜻한 사랑이야기였으며 오늘 이 시점에는 전에 보이지 않았던 사건과 캐릭터들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게 하며 나와 함께 성장한 스토리다. 앞으로 또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탄생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또 내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을 전해줄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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