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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H Jul 25. 2019

'엄마랑 아빠랑', 맛있는 편지

NO.1 - 아빠, 퇴근하면 샌드위치랑 맥주 어때? [탬파]

에디터 - Brian

포토그래퍼 - 박현빈, Steve Tan


가까우면서도 먼, 아빠와의 밥 한 끼


어렸을 때부터 아빠와의 대화는 언감생심이었다. 일찍 나가시고 늦게 들어오시는 편이었던 데다가, 들어오시고 나서 곧바로 서재에 들어가 연구라고 부르던, 어린아이의 눈으로는 지극히 재미없는 두꺼운 책을 보거나 컴퓨터로 무언가를 계속 치는 생활패턴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 일상은 나만의 공간, 세계관 그리고 친구들을 가지기 시작한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어느 순간 집에 있는 두 남자는 두 개의 방에서 어색한 동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아빠와의 밥 한 끼는, 회사 행사만큼이나 지극히도 부담스럽고 불편한 자리였다. 매사에 진지한 아빠, 즐겁고 가벼운 얘기를 좋아하고 찾아다니는 아들의 만남은 드라마의 상견례처럼 어색했고, 서로의 애꿎은 수저만 달그락거리다가 말 한마디 없이 밥 한 끼가 마무리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우리 모두 아빠가 필요할 때가 있다


입사한 지 갓 1년, 잦은 회식과 막내로서의 눈치 놀이에 몸살을 앓고 있을 때였다. 

억울함의 아이콘으로서 스트레스가 절정에 이른 하루, 밖에 잠시 도망 나와 휴대전화를 보면서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다. (직장에서는 원래 내가 제일 억울하고, 잘못한 게 없는 법이다)

문득 누군가에게 전화해서 무심코 하소연하고 싶었다. 시간은 오후 1시 반, 직장인 친구들은 똑같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을 거고, 학생 친구들은 공강이 끝나 수업을 듣고 있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락처 목록을 넘기다 보니 보이는 이름, '아빠'. 

나도 모르게 그 날따라 희망을 가지고 손이 갔던 것 같다. 몇 초가 지났을까, 뜻밖에도 바로 받으신다.


"왜? 무슨 일이야?"


본인도 어지간히 놀라셨나 보다. 생전 전화 한번 없던 아들이 전화를 하다니, 병이라도 걸린 것일까, 그만둔다는 것일까 하는 수많은 걱정들이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 초간의 침묵이 흘렀을까, 하소연을 한 시간 동안 다 풀어야 될까 싶다가 지극히 아들다운 말 한마디로 정리했다.

"아, 별건 아니고 그냥 전화했어요. 저녁이나 한번 먹어요."
그리고 이어지는 삼계탕 같은 담백함이 가득하면서도, 안도의 한숨이 양념 쳐진 답변이 들려온다. 

"그래, 곧 한 번 먹자. 그럼 아빠 다시 들어간다."


뜻하지 않게 저녁 약속을 잡아놨으니, 어디로 가야 할까.

이번 편지는 아직까지도, 아빠와 어떤 저녁을 먹어야 될까 정하지 못하고 있던 고민거리에서 시작했다.  



아빠, 퇴근하고 샌드위치 먹을래요?


아빠, 안녕. 

30년 지기이자, 가끔은 미운 사람이자, 그래도 필요할 때는 가장 먼저 말해야 되는 아빠. 출퇴근 시간도 다르고, 아들은 글 쓴다고 퇴근하고도 촬영이다, 편집이다고 돌아다니니, 말 자체를 한지도 벌써 일주일이네요. 

돌아보면, 집에서 우리의 대화는 항상 오토톤처럼 똑같았어요. '회사 다녀올게', '잘 갔다온나', '밥은 먹고 일하냐'. 마치 모든 연인들의 공통된 고민, '식당-카페-영화' 또는 '영화-카페-식당'처럼 지루하게 반복되던 메트로놈 같았지요.

문득 아빠랑 한번 길게 얘기하고 싶었어요. 편안하고 밝은 곳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맛있는 곳에서 기분 좋게. 

그래서 생각난 곳이, 연남동의 '탬파'라는 곳이에요. 혼자 자주 가던 밝고, 편안한 나만의 아지트. 짭조름한 샌드위치와 느끼함을 덜어줄 시원한 맥주 한 병을 팔고, 심지어 아빠의 일터와도 가까운 곳이에요.


'탬파'는 미국 마이애미 주의 도시예요. 쿠바랑 가까워서 망명자들이 많이 넘어오던 동네 중 한 군데죠. 힘겹게 넘어온 이민자들이 고된 노동을 마치고, 샌드위치에 햄을 끼워서 구운 다음에, 맥주 한 병을 마시면서 하루를 즐겁게 마무리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도 오늘 각자 고생한 만큼, 시원하게 이 곳에서 상사 욕도 하고 시시콜콜한 얘기도 풀어보는 게 어때요?




고집 있는 아빠랑 그렇게 닮았어요


여기를 드나든 지도 벌써 1년은 넘은 거 같아요. 

눈 잠시 감고 있으면 모든 게 바뀌어 있는 요즘 세상에, 풍경이 1년 내내 안 바뀌는 곳이 더 드문 거 같아요. 온통 노랗게 칠한 따뜻한 벽, 시크하게 놓인 스톨 의자와 나무 테이블, 여행 욕구를 부르는 페인팅들과 자잘한 소품들, 맛있는 냄새가 은은하게 퍼지는 공기와 늘 샌드위치를 눌러 굽고 있는 플란챠 (위아래서 눌러서 샌드위치 등을 굽는 기계)까지.   

무뚝뚝하고, 자잘한 거 자주 사 와서 늘 엄마한테 혼나고, 먹는 거 좋아해서 맛있는 냄새랑 함께 들어오고 한결같은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아빠의 고집과 그렇게 닮았어요. 그래서 저도 변한 적이 없는 이 곳을 좋아하고 종종 들리는지도 모르겠어요.



모조포크, 고소한 치즈, 커다란 피클


재웠다가 얇게 저며서 구운 모조포크와 살라미, 고소한 치즈와 시원하게 끼워 넣은 통피클. 파니니 빵 속에 이 모든 걸 끼워서 플란챠 위에 올리면 바삭하게 구우면 '탬파'의 간판, 마이애미 쿠반 샌드위치가 탄생해요. 모조포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듣기만 해도 맛있겠죠?



오리지널하게 먹고 싶다고요? 그러면 가게 이름을 딴 '탬파 쿠반 샌드위치'가 정말 좋아요.

한국인이라서 안 맞다고요? 플란챠 위에서 구운 불고기를 듬뿍 넣은 서울 쿠반 샌드위치는 어때요?

느끼한 걸 찾으신다고요? 미국인들의 뱃살을 책임지는 맥&치즈가 듬뿍 들어간 맥엔치즈 샌드위치도 있어요.

얇게 저민 소고기에 피망이 대미를 장식하는 필리치즈스테이크까지, 아들로서 장담하는데 아빠를 위한 메뉴는 없을 수가 없어요.



밥을 먹고 나서도 과자를 밤중에 찾는 아빠에게, 샌드위치 하나는 장난이죠? 

그래서 감자튀김도 준비했어요. 기름이 넘치지도 않고, 두껍게 썰어서 먹을 때마다 전분이 넘쳐나는 '탬파' 특유의 감자튀김은 계속 먹어도 질리지가 않아요. 오늘은 아빠랑 얘기를 하는 날이니까, 트러플 오일이 듬뿍 뿌려진 트러플 감자튀김으로 준비해볼게요. 많이 드세요, 오늘은 제가 쏠 테니까. (아, 10시까지만 열긴 해요.)



맥주 한 병과, 혹은 위스키 한 잔과 하쿠나 마타타


맥주는 참 신기한 물건 같아요. 차갑게 담근 한 병을 꺼내서, 뚜껑을 따고 '짠!' 병끼리 혹은 잔끼리 부딪히면 그렇게 쾌감이 느껴지고, 얘기를 할 준비가 되어요. 대화의 신호탄이랄까? 여기 '탬파'에도 긴 얘기를 꺼내기 전에, 마음을 가볍게 해 줄 녀석들이 많아요. 

저는 보통 '코로나'를 마셔요. 히스패닉 문화권인 쿠바의 샌드위치와 잘 어울리는 멕시코산 코로나가 저한테는 그렇게 잘 맞더라고요. 신용카드 한도가 조금 여유 있는 날은 쿠바 리브레 칵테일을 요청하기도 해요. 럼이랑 콜라가 섞인, 달달하면서도 독한 맛이 온몸에 따뜻하게 퍼져 나가면 그렇게 세상의 모든 근심거리가 사라지는 거 같거든요.

사실 어떤 거든 마시면 어때요, 우리 함께 하쿠나 마타타!



고마워요, 볼링 한 게임치고 가요


오랜만에 많은 얘기를 했네요. 사회 초년생으로의 고민 이야기, 결혼 이야기, 미래에 펼쳐가고 싶은 꿈 이야기. 가장 가까운 곳에 이 모든 얘기들을 들어줄 사람이 있었는데, 그걸 잊은 지가 너무 오래되었었나 봐요. 

하지만 뭐든지 첫출발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잖아요. 이제는 그 첫발을 떼었으니, 우리 앞으로 남자들끼리 좀 더 얘기해봐요. 고마워요, 아빠.


참, 나가기 전에 볼링 한 게임치고 갈래요? 진 사람이 집에 가서 2차 쏘기! 


 


 

※ 위의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매거진 랑', 그리고 산하 에디터에게 전적으로 있음을 안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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