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랑', 멀리 떨어진 식탁

NO.3 - 김치말이 국수, 겁 많고, 이기적이며, 행복한

by BrianH

에디터 & 포토그래퍼 - 안휘수


누군가를 찾아갈 때면 그 사람이 특히 잘해주던 음식이 떠오른다.

그래서 가끔은 음식이 그리워 그와의 약속을 잡기도 한다. 한 식당을 같이 좋아하게 된 이가 있으면 그와 주기적으로 약속을 잡아 그 식당을 찾아가기도 했다. 동시에 누군가 찾아오면,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번거로워도 장을 보러 나간다. 필자가 그렇듯, 그가 필자를 보며 떠오를 음식을 대접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고른다. 두 달에 한 번, 멀리 떨어진 이곳을 찾아오는 미안한 친구에게는 삼겹살을 간장과 같이 볶은 안주를 만들어주어 소주와 함께 먹는다. 지금은 아예 얼굴도 보기도 힘들어진 이와 가끔 통화하면, 그는 여전히 김치찜을 찾는다. 또 다른 이는 오믈렛을, 또 누군가는 된장찌개를 찾는다. 그래서 가끔은 반대로 어떤 음식을 하면 그 음식을 찾던 이가 떠오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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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장에서 소면을 꺼냈다. 소면으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은 수십 가지다. 혹자는 파스타 면을 대신해 알리올리오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주당에게는 골뱅이 소면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오늘 필자가 떠오른 음식은 김치말이 국수다. 몇 년 전 사랑했던 연인이 자주 부탁했었고 맛있게 먹어주었던 음식이다. 그리고 이젠 누군가가 기다려주지도, 찾아주지도 않는 음식이 되었다. 단순하게 ‘내가 먹고 싶어서 먹는’ 음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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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양파를 썰어 그릇에 둔다. 따로 조리하지 않을 것이라 매운맛을 약간 날려주기 위함이다. 물에 소금을 넣어 끓여주고 소면을 둥그렇게 펼쳐서 넣어준다. 그 사이에 김치를 꺼내 잘게 썰어준다. 그래도 아직 면이 다 익지 않았으니 달걀을 꺼낸다. 달걀을 깨 노른자만 남겨 그릇에 따로 놔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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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로 내려와 산지 반년이 지났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그만큼 희박해졌다. 처음엔 식탁이라고 부르기도 모호한 조그만 식탁이 걱정이었지만, 곧 혼자 먹기에는 충분한 크기라는 것을 알았다. 찬거리 몇 개와 밥을 올리고 반찬 통 뚜껑까지 옆에 두면 딱 알맞게 가득 채워진다. 건너편에 다른 이의 밥그릇까지 얹을 자리는 전혀 없다.

누구도 아닌 혼자만을 위한 식탁이다.


음식을 하면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라면, 대접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식탁은 그런 기쁨을 누리기에는 너무 작다. 누군가 즐겨 먹던 음식을 하더라도 그 음식은 하나의 그릇에 모두 담기고 수저도 한 쌍만 올라가면 식탁이 가득 찬다. 덕분에 이 식탁은 다른 누구를 위할 필요가 없는 식탁이다. 오직 조그마한 의자에 앉은 한 사람만을 위한 식탁이다.

다른 사람의 행복까지 챙기며 살아가자고 다짐했었다. 누구 하나 아픔을 가지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그렇기에 많은 것들을 보고자 노력했고 한쪽의 이야기만 듣지 않았다. 가지고 있던 편견들은 모두 버렸고 시대가 변해가는 것을 수용했다.


하지만 수많은 가치관이 존재하는 만큼, 고집도 존재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 노력하는 이들이 서로 의견이 달라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문제는 거창한 이념이 아니더라도 사람과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도 나타났다. 각자 더 좋은 관계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 결국 반대편에 선 이를 상처받게 만들기도 했다.

결국 도망쳐왔다. 반년째 도망쳤다. 오직 스스로 행복하기 위해 도망쳤다. 여전히 사람을 좋아하고 그 사람이 행복했으면 하고 바라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행복이라고 스스로 상기시켰다. 스스로가 제일 우선순위가 되었다. 그 결과 누군가 맛있게 먹어주어 행복했던 식탁은, 오직 내가 맛있어서 행복한 식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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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삶아진 면을 채에 담고 찬물에 씻어준다. 면을 씻으며 삶아질 동안 머금고 있던 물을 빼준다. 그리고 또 씻어준다. 방금 씻은 물과 아직 남아있는 뜨거운 물을 빼준다. 계속 씻어준다. 면이 탱글탱글해지도록 계속 씻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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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을 그릇에 담고 잘게 썬 김치를 얹어준다. 썰어놓은 양파는 설탕에 버무려 준 다음 올려준다. 노른자를 터지지 않게 올려놓은 것들 중앙에 예쁘게 올려준다. 냉동에서 적당히 얼려진 육수를 조심스럽게 부어준다. 고추냉이도 살짝 곁들여준다. 마지막으로 깨를 으깨서 뿌려준다. 고소한 냄새가 그릇을 얼른 식탁에 올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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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에 앉아 면과 고명들이 육수에 풀리도록 저어준다. 육수가 김치 때문에 붉은빛을 띨 때 그릇을 통째로 들어 마셔준다. 달짝지근한 육수가 목구멍에서부터 시원하게 훑으며 내려간다. 그릇을 내려놓고 양파와 김치가 같이 집히도록 면을 집는다. 부드러운 면 사이에서 양파와 김치가 아삭하게 씹힌다.


이제 김치말이 국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주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분명 다시 소면을 삶아 똑같이 해 먹을 것이다. 언제일지 모르는 그때, 시원하고 달짝지근한 육수가 그리울 때 면을 다시 삶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찬장에 소면을 채워놓지 않을 것을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 다른 이가 아닌, 오직 나를 위한 국수를 먹을 수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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