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rianH Jul 25. 2019

'살랑', 멀리 떨어진 식탁

NO.3 - 김치말이 국수, 겁 많고, 이기적이며, 행복한

에디터 & 포토그래퍼 - 안휘수


누군가를 찾아갈 때면 그 사람이 특히 잘해주던 음식이 떠오른다

그래서 가끔은 음식이 그리워 그와의 약속을 잡기도 한다. 한 식당을 같이 좋아하게 된 이가 있으면 그와 주기적으로 약속을 잡아 그 식당을 찾아가기도 했다. 동시에 누군가 찾아오면,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번거로워도 장을 보러 나간다. 필자가 그렇듯, 그가 필자를 보며 떠오를 음식을 대접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고른다. 두 달에 한 번, 멀리 떨어진 이곳을 찾아오는 미안한 친구에게는 삼겹살을 간장과 같이 볶은 안주를 만들어주어 소주와 함께 먹는다. 지금은 아예 얼굴도 보기도 힘들어진 이와 가끔 통화하면, 그는 여전히 김치찜을 찾는다. 또 다른 이는 오믈렛을, 또 누군가는 된장찌개를 찾는다. 그래서 가끔은 반대로 어떤 음식을 하면 그 음식을 찾던 이가 떠오르기도 한다.



찬장에서 소면을 꺼냈다. 소면으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은 수십 가지다. 혹자는 파스타 면을 대신해 알리올리오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주당에게는 골뱅이 소면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오늘 필자가 떠오른 음식은 김치말이 국수다. 몇 년 전 사랑했던 연인이 자주 부탁했었고 맛있게 먹어주었던 음식이다. 그리고 이젠 누군가가 기다려주지도, 찾아주지도 않는 음식이 되었다. 단순하게 ‘내가 먹고 싶어서 먹는’ 음식이 되었다.



제일 먼저 양파를 썰어 그릇에 둔다. 따로 조리하지 않을 것이라 매운맛을 약간 날려주기 위함이다. 물에 소금을 넣어 끓여주고 소면을 둥그렇게 펼쳐서 넣어준다. 그 사이에 김치를 꺼내 잘게 썰어준다. 그래도 아직 면이 다 익지 않았으니 달걀을 꺼낸다. 달걀을 깨 노른자만 남겨 그릇에 따로 놔둔다.



시골로 내려와 산지 반년이 지났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그만큼 희박해졌다. 처음엔 식탁이라고 부르기도 모호한 조그만 식탁이 걱정이었지만, 곧 혼자 먹기에는 충분한 크기라는 것을 알았다. 찬거리 몇 개와 밥을 올리고 반찬 통 뚜껑까지 옆에 두면 딱 알맞게 가득 채워진다. 건너편에 다른 이의 밥그릇까지 얹을 자리는 전혀 없다. 

누구도 아닌 혼자만을 위한 식탁이다.


음식을 하면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라면, 대접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식탁은 그런 기쁨을 누리기에는 너무 작다. 누군가 즐겨 먹던 음식을 하더라도 그 음식은 하나의 그릇에 모두 담기고 수저도 한 쌍만 올라가면 식탁이 가득 찬다. 덕분에 이 식탁은 다른 누구를 위할 필요가 없는 식탁이다. 오직 조그마한 의자에 앉은 한 사람만을 위한 식탁이다.

다른 사람의 행복까지 챙기며 살아가자고 다짐했었다. 누구 하나 아픔을 가지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그렇기에 많은 것들을 보고자 노력했고 한쪽의 이야기만 듣지 않았다. 가지고 있던 편견들은 모두 버렸고 시대가 변해가는 것을 수용했다.


하지만 수많은 가치관이 존재하는 만큼, 고집도 존재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 노력하는 이들이 서로 의견이 달라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문제는 거창한 이념이 아니더라도 사람과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도 나타났다. 각자 더 좋은 관계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 결국 반대편에 선 이를 상처받게 만들기도 했다.

결국 도망쳐왔다. 반년째 도망쳤다. 오직 스스로 행복하기 위해 도망쳤다. 여전히 사람을 좋아하고 그 사람이 행복했으면 하고 바라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행복이라고 스스로 상기시켰다. 스스로가 제일 우선순위가 되었다. 그 결과 누군가 맛있게 먹어주어 행복했던 식탁은, 오직 내가 맛있어서 행복한 식탁이 되었다.



다 삶아진 면을 채에 담고 찬물에 씻어준다. 면을 씻으며 삶아질 동안 머금고 있던 물을 빼준다. 그리고 또 씻어준다. 방금 씻은 물과 아직 남아있는 뜨거운 물을 빼준다. 계속 씻어준다. 면이 탱글탱글해지도록 계속 씻어준다.



면을 그릇에 담고 잘게 썬 김치를 얹어준다. 썰어놓은 양파는 설탕에 버무려 준 다음 올려준다. 노른자를 터지지 않게 올려놓은 것들 중앙에 예쁘게 올려준다. 냉동에서 적당히 얼려진 육수를 조심스럽게 부어준다. 고추냉이도 살짝 곁들여준다. 마지막으로 깨를 으깨서 뿌려준다. 고소한 냄새가 그릇을 얼른 식탁에 올리게 만든다.



식탁에 앉아 면과 고명들이 육수에 풀리도록 저어준다. 육수가 김치 때문에 붉은빛을 띨 때 그릇을 통째로 들어 마셔준다. 달짝지근한 육수가 목구멍에서부터 시원하게 훑으며 내려간다. 그릇을 내려놓고 양파와 김치가 같이 집히도록 면을 집는다. 부드러운 면 사이에서 양파와 김치가 아삭하게 씹힌다.


이제 김치말이 국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주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분명 다시 소면을 삶아 똑같이 해 먹을 것이다. 언제일지 모르는 그때, 시원하고 달짝지근한 육수가 그리울 때 면을 다시 삶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찬장에 소면을 채워놓지 않을 것을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 다른 이가 아닌, 오직 나를 위한 국수를 먹을 수 없기에.




※ 위의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매거진 랑', 그리고 산하 에디터에게 전적으로 있음을 안내드립니다.

작가의 이전글 '동네랑', 공간이 함께 써가는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