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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H Aug 01. 2019

'살랑', 멀리 떨어진 식탁

NO.4 - 식혜, The show must go on

에디터 & 포토그래퍼 - 안휘수



점심을 먹고 엿기름을 망에 넣어 물에 불려준다. 그대로 두고 주방을 나와서 하루에 복귀한다. 하루를 보내던 중 문득 생각날 때 다시 주방으로 돌아간다. 엿기름이 부스러질 때까지 꽉 짜준다. 엿기름 물을 뚜껑이 있는 통에 옮겨 담고 덮는다. 다시 하루에 복귀한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아 더울 때 세수를 하기 위해 화장실에 간다. 겸사겸사 자리에서 일어난 김에 주방에서 통을 들여다본다. 침전물이 많이 가라앉았다. 통이 흔들리지 않게 뚜껑을 열어 윗물을 덜어내 옮긴다. 통에 남은 침전물은 모두 버리고 통을 씻어준다. 번거롭지만 큰 통이 하나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다.



씻은 통에 방금 지은 찹쌀밥을 한 공기만큼 덜어서 그 안에 넣는다. 윗물을 밥알이 잘 풀리게 저어주고 신문지로 감싸 따뜻한 곳에 둔다. 그사이에 다시 땀이 흐른다. 이번에 머리를 감고 하루에 복귀한다.



바쁘다. 정신이 없다. 시간이 없다.

요즘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실제로도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필이면 요즘 같이 덥고 습한 날씨에 바쁘고, 십 년 가까이 된 선풍기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넘쳐흘러서 아무리 할 일이 많아도 절대로 바쁘지 않게 지내는 것이 맨 처음 기대했던 시골에서의 삶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많다는 이유는 시간이 부족했다는 핑계가 전혀 통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런 말은 자신을 더 게을러 보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옷을 껴입었던 겨울과 달리 하나라도 더 벗어가며 하루를 지내고 있다. 원했던 것은 여유가 있는 삶이었지 절대로 게으른 삶이 아니었기에 스스로 더 채찍질할 수밖에 없었다.

기왕이면 긍정적으로 사는 게 좋다고 말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부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다. 정작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며 살아도 그것이 순간 위로는 될지언정 직접적인 도움이 될 가능성은 적다. 결국, 이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도시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피 튀기게 토력을 하며 사는 방법 말고는 없다.



정기결제를 해놓고 보는 드라마도 안 보고 있다. 잡아놨던 약속도 거의 취소했다. 잠을 줄여가며 일을 하고, 해가 떠 있는 시간과는 상관없이 눈을 뜨고 있는 순간은 모두 글을 쓰는데 투자했다. 물론 스스로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일은 일이다. 여전히 노는 게 제일 좋다. 소소한 삶의 재미도 느끼지 못하는 요즘은 습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예민해졌다.

이런 순간에서도 유일하게 휴식을 취하는 순간이 있다면 요리를 하고 밥을 먹는 시간이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먹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흔한 말이지만 정말로 좋아하는 말이다. 최근 들어 전과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많이 달라졌지만, 식탁에 앉아 식사하는 시간만큼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어찌 됐든 막은 오르고, 쇼는 계속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삶도 계속된다. 상황이 한탄스러워도 숨은 쉬어가면 욕을 한다. 행복한 삶을 산다고 해서 숨 쉬는 횟수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더워진 주방에서 땀에 범벅이 되어 짜증을 내며 괜히 냉장고를 열어 얼굴을 집어넣기도 한다. 불이 싫어서 최대한 볶음 요리는 피해서 먹는다. 그래도 언제나처럼 배가 고파지면 불을 켜서 밥을 하고 더워진 주방 구석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그리고 밥을 다 먹으면 언제나처럼 삶에 복귀한다.



밥알이 뜨기 시작했다. 통을 가지고 주방으로 돌아와 식혜를 냄비에 옮긴다. 설탕을 넣어 저어주고 불에 올린다. 식혜가 금방 끓어 거품이 올라온다. 국자를 꺼내 거품을 걷어낸다. 거품이 더 올라오지 않을 때 불을 줄여 조금만 더 끓여준다. 간이 적당해지면 불을 끄고 냄비 뚜껑을 덮어 식기를 기다려 준다. 주방에서 나오니 해가 완전히 졌다. 하루에 복귀해 서서히 마무리해준다. 그러다 잠이 들기 직전 주방으로 가서 식은 식혜를 냄비에서 통으로 옮겨 담아 냉장고에 넣는다. 내일이면 식혜가 완전히 시원해질 것이다. 온종일 습해서 짜증만 늘어나는 요즘 같은 날에 냉장고를 열면 식혜가 기다릴 것이다. 


파는 것만큼 엄청 맛있지는 않아도, 더위를 완전히 날려 보낼 수는 없어도 식혜를 밥그릇에 덜어서 남은 밥알까지 기분 좋게 긁어먹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하루에 복귀할 것이다. 어쨌든 숨을 쉬는 한 삶은 계속되니까.




※ 위의 콘텐츠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매거진 랑', 그리고 산하 에디터에게 전적으로 있음을 안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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