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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승주 May 09. 2021

각자의 목적을 자유롭게 추구할 권리에 대한 믿음

고지기

나의 외할머니가 서른 즈음이던 1960년대, 경상도의 한 시골 마을에는 고지기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고직’은 본디 관아의 창고를 보살피고 지키던 사람을 뜻하는 말인데, 이것이 점차 다른 의미로 사용되다가 나중에는 묘지기, 산지기, 정자지기 등으로 사용되며 ‘고지기’로 자리잡게 되었다. 할머니의 마을에서는 마을의 온갖 잡일들을 해 주면서 논 한두 마지기를 얻어 경작을 하고 생계를 이어나가던 사람을 ‘고지기’라 불렀다.


갑오개혁 이후 우리나라의 신분 제도는 완전히 폐지되었으나 ‘천한 사람’과 ‘귀한 사람’의 구분은 그 이후로도 한참이나 지속되었고, 경상도 깊은 시골에 있는 할머니의 마을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유달리 오래 지속되었다. 고지기는 예로부터 신분상 노비에 속하였는데, 이로 인해 할머니의 마을에서 고지기는 그저 천한 심부름꾼에 불과하였다. 이미 나이로는 할머니보다 한참 위였지만 어른이고 어린 아이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고지기에게는 반말을 사용하였고, 천한 출신과 가난으로 그저 비루한 일이나 하는 사람으로 하대하기 일쑤였다.


할머니 집안 어른의 탈상날* 할머니네 가족은 마을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마을의 행사이니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이니 많은 음식이 필요하였으며, 많은 음식이 필요하니 으레 고지기의 손과 발은 바빠졌다. 고지기는 잔치 준비에 필요한 온갖 잡일들을 도맡아 하였고, 아이를 임신하여 배가 이미 동산만큼 커진 고지기의 아내는 뜨거운 불길 앞에서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하였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먹을 음식이니 많은 손이 필요하였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모든 음식과 설거지는 고지기의 아내가 혼자 도맡아서 하고 있었고, 집안의 다른 여성들은 그 어떠한 일도 하지 않고 마루에 앉아 시답잖은 이야기만 주고 받고 있었다**. 당시 집안의 여성 중 가장 맏이였던 할머니는 임신한 여자가 혼자서 그 많은 일들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 불편하였고, 이에 할머니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엌으로 들어가 일을 하였다. 그러자 집안의 다른 여성들이 따라 들어와 "형님, 왜 이러십니까"라고 하며 안절부절하며 일을 거들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자네들은 임신을 해 보지 않았느냐고, 어찌 배가 저렇게 부른 여자 혼자 이 일을 다 시키느냐고 나무랐고, 이에 여성들은 멋쩍어하며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한창 일을 하던 중, 굴뚝 쪽에서 웬 아이들이 할머니의 눈에 띄었다. 아직은 한창 앳되어 보이는 아이들 두 명이 검은 연기 속에서 콜록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고지기의 아이들이었다. 천한 것의 자손들이니 마당과 뜰에서는 자유롭게 나다니지 못하고, 굴뚝의 검은 연기 뒷 편에서 주린 배를 잡으며 뭐라도 먹을 것이 없나 눈치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어찌하여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 물었고, 아이들은 무어러 답하지 못하고 검은 눈을 꿈뻑거리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집안 사람들이 먹기에도 부족한 음식이었지만, 할머니는 부엌으로 가 음식을 조금씩 떼어 ‘내게도 큰 손님이 왔다’며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고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추운데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라고, 집에 가서 어머니를 기다리라고, 곧 가실 거라고 말하며 잘 타일러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렇게 잔치가 끝나고, 집안의 어른인 큰오빠를 만난 자리에서 할머니는 ‘오빠가 집안 관리를 잘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어찌하여 모두가 고지기에게는 너도 나도 반말을 하고, 어찌하여 아이들은 한참 어른인 고지기를 하대하는 것이며, 어찌하여 탈상날 집안의 부엌일은 임신한 고지기의 아내가 도맡아 하는 것인지. 할머니의 말을 들은 큰오빠는 ‘네 말에 일리가 있다’며 멋쩍게 웃어 넘겼고,  ‘그래, 요즘 어찌 지내는지’ 물었다. 평소 그 놈의 양반, 양반하던 것에 진절머리가 났던 할머니는 오기가 생겨 나는 백정일을 한다고, 우리집에 오면 소다리고 돼지다리고 주렁주렁 매달려있다고 말했고, 이 말을 들은 큰오빠는 무슨 그런 농담이 있느냐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 할머니는 문득 고지기의 아이들이 생각나 집안의 사람에게 그때 그 아이들은 어찌 되었는지 물었고, 아이들은 이후 서울로 올라가 일을 하였는데 크게 성공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할머니는 내게 이 이야기를 전해주며 그 아이들이 대통령이 될 수도 있고, 판사가 될 수도 있고, 국회의원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사람들이 고지기의 아이들까지도 천하게 여기는 모습이 꼴보기 싫었다고 말했다.


인류는 지독한 우월주의에 빠져있었다. 수천년을 계승해온 신분제도와 계급사회. 오늘날에도 우월주의는 민족주의와 인종차별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관련하여서는 이중적인 태도를 지닌다. 유럽에서 차별을 당하면 불같이 분개하면서도 비행기를 타고 동남아의 한 나라에 도착하여 땅에 발을 디딜 때에는 묘하게 으스대는 마음이 꿈틀거린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수천년간 우월이라는 굴레에 빠져있었던 인간을 계몽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각자의 목적을 자유롭게 추구할 권리에 대한 믿음. 종교와 사상과 경제 및 사회 활동의 자유로운 추구.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는 제한 없이 존중되어야 할 보편적 권리로서의 자유.


나의 외할머니는 여자라는 이유로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글을 읽고 쓰는 법 또한 노년이 다 되어서야 배우셨다. 그럼에도 1960년대의 나의 할머니는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명확히 인지한 근대 시민이었다.



* 탈상이란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전통적인 상례의 마지막 단계로 삼년상이 모두 끝나 상복을 벗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 가정의 일은 남성과 여성 모두가 도맡아 하는 것이어야 하나 당시에 부엌의 일은 오롯이 여성의 몫이었다. 단지 시대상을 고려한 말이지 여성을 폄하고 하고 싶은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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