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승주 May 09. 2021

할머니 안녕히 잘 가십시오.

할머니


봄 기운이 가시고 여름 내음이 풍기던 어느 새벽, 나의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할머니의 건강은 제법 오랫동안 좋지 않았다. 노환으로 인해 신장과 폐 기능은 매우 떨어져 있었고, 근육의 힘은 점차 줄어들어 언제부터인가 침상 생활을 지속하였다. 특별한 기저 질환이 있는 분이 아니었기에 대학병원에는 있을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집에서 생활하기에는 할머니의 몸은 이미 너무 연약해져있었다. 결국 할머니는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


의과대학 학생인 나는 우리나라 요양병원의 현실을 잘 알고 있다. 다인실 구조, 부족한 의료진, 의료 행위를 보조하는 간병인들, 그리고 턱없이 부실한 임종 관리. 그러한 구조로는 의과대학에서 입이 마르도록 이야기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다. 할머니가 계신 병원은 그래도 제법 관리가 잘 되는 편이었다. 병원의 규모도 큰 편이었고, 기본적으로 필요한 진료과들은 대부분 설치되어 있었으며, 병동의 위생 상태 또한 나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머무르신다는 사실이 불편하였다. 무언가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할머니가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은 포기하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들은 지킬 수 있도록 하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하지만 여러 자료들을 찾아가며 골똘히 생각해 보아도 별다른 방안이 없었다. 


한창 공부를 하고 있던 어느날, 집에서 연락이 왔다. 할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항생제 내성균이 발견되어 격리 병동으로 옮겨졌으며, 소변이 나오지 않아 투석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게다가 사타구니의 구조물이 약해져 장이 빠져나왔지만 수술을 할 수 있는 몸 상태는 아니었다. 이미 한 차례 의식이 떨어져 임종을 준비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나는 이제 정말 임종이 얼마나 남지 않았다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엄마는 투석을 할 수 있는 병원을 알아보고 계셨는데, 나는 그 상황에서 투석을 하는 게 할머니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겠나 하는 뜻을 넌지시 내비쳤다. 투석을 하는 과정 자체가 할머니께 추가적인 고통을 줄 것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던 중 세 번의 항생제 내성균 검사가 모두 음성이 나오고 소변도 나오기 시작하여 다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 소변이 나오니 기본적인 수치만 안정되면 계속 요양병원에 머무를 수 있겠구나.’

섣부른 기대였다. 그 소식을 듣고 삼 일이 지난 후 새벽, 할머니의 건강은 갑자기 악화되었고, 결국 가족 중 누구도 임종을 지키지 못한 채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할머니보다 15년 더 일찍 돌아가셨던 할아버지는 보다 차분하고 섬세한 성격이셨다. 어렸을 적 할머니댁에 놀러가면 할아버지는 종종 밖으로 나가 마당을 거니셨다. 어린 나는 ‘할아버지가 산책을 좋아하시구나’ 생각하였다. 이후 들은 이야기로는 할아버지는 산책을 좋아하시는 게 아니라 당신이 방에 계속 계시면 어린 우리들이 불편해 할까봐 밖에 나가 계신 것이라고 하였다. 할아버지는 바람에 고요히 흔들리는 호수 같은 분이셨다.


반면 할머니는 대장부였다. 아들을 다섯이나 둔 할머니는 어렸을 적부터 육아를 하랴, 아이들을 교육 하랴, 생계에 보탬이 되랴 전투적으로 살아오셨다. 격동의 시대에 고단히 삶을 헤쳐나갔던 할머니는 단단해질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할머니댁에 갔을 때였다. 엄마는 할머니와 제법 오래 이런 저런 대화를 하고 있었고, 옆에서 가만히 듣다가 조금 지루해진 나는 리모컨을 잡아 티비 채널을 돌렸다. 이후 한참 대화를 나누던 할머니는 엄마에게 '손주가 티비 채널을 마음대로 돌리는' 일에 대해 나무라셨다. 작은 바람에도 맹렬히 흔들리는 개울물이었던 나는 이후 할머니집에서 단 한 번도 리모컨을 잡은 적이 없다.


의과대학 과정의 특성상 삼 일씩 실습을 빠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할머니는 목요일에 돌아가셨고, 나는 금요일에 시험을 마치자마자 짐을 챙겨 부랴부랴 부산으로 내려갔다.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진행되어 장례식장에는 조문객이 거의 없었다. 할머니께 절을 한 후, 가족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나는 곧 졸음이 몰려와 방에 들어가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발인을 하는 날에는 비가 쏟아졌다. 나는 '후텁지근하여 곧 여름이 올 것만 같은 날씨였는데도 할머니 가시는 마지막 날에는 구슬프게 비가 오구나' 생각하였다. 발인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스님께서 오셔서 염불을 외기도 하셨고, 할머니께 절을 올린 술잔으로 술을 마시는 음복도 하였다. 장례를 도와주시는 분께서는 음복을 하면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고 하였다. 먼 길 편히 가시라고 숙모들이 고무신을 넣어주기도 하였고, 노잣돈을 올리기도 하였다. 발인을 마치고 다시 버스로 돌아갈 때에는 이승에 있는 가족들이 자꾸 뒤돌아보면 고인이 미련이 남아 편히 떠나지 못한다고 하여서 한사코 뒤돌아보지 않고 무심히 버스로 내빼기도 하였다.


자연과학과 의학을 전공한 나는 미신을 경계한다. 나에게 풍수지리나 사주팔자는 배척의 대상이었다. 언젠가 나는 제사와 장례식의 다양한 규칙들에 대해서도 회의를 가진 적이 있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고인을 기리고 회상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할머니의 장례에서 본 장례 문화는 미신이 아니라 애도의 과정이었다. ‘부처님과 하나님이 실재하는지’ 혹은 ‘귀신들이 제를 지낸 음식을 정말로 먹는가’와는 무관한 문제다. 그것은 우리 본성 깊숙히 새겨져 있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매개로 한 이별의 과정이고, 받아들임의 과정이며, 나아감의 과정이었다. 못다한 말들을 건네며 이별하고, 삽을 들고 묘에 흙을 채우며 받아들이고, 뒤돌아보지 않고 현실로 돌아가며 다시 나아간다. 그러한 과정들을 통해 할머니의 삶은 다시 우리들의 정신에 각인되고, 각인된 정신은 삶을 이끌어가며, 그렇게 할머니는 우리 안에서 다시 살아가시는 것이다. 버스에 올라타자 스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할머니가 생각나도 너무 울고 슬퍼하고 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하면 고인이 마음 아파 편히 떠나지 못하고 힘들어한다고. 우리의 전통 풍습은 미신이 아니라 성숙하고 완결성 있는 애도 과정이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한 저녁, 가족끼리 둘러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큰아버지가 나를 사촌누나의 배우자분들께 소개하면서 말했다.

   "얘가 공부뿐만 아니라 노래도 잘하고 기타도 치고 예술가적인 기질이 있어. 자기 누나 결혼식 때도 노래부르고"

그런 이야기를 하던 큰아버지는 갑자기 나에게 노래를 시키셨다. 할머니께 마지막으로 노래 한 곡 들려드리면 할머니가 좋아하실 것이라는 이유였다. 큰아버지의 말을 들은 내 머릿속에는 불현듯 한 노래가 떠올랐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노래를 들은 큰아버지는 눈시울이 조금 붉어져서는 이 노래를 들으니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고, 할머니도 이제 마음 편히 가실 거다며, 내 손을 잡곤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누군가는 가족들의 가슴 속에서 따스함과 원동력으로 꿋꿋이 살아남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슬픔으로 되풀이되며 후회와 아쉬움으로 아주 조금 더 연명하기도 한다. 나는 할머니와 별다른 깊은 대화를 해 본적이 없다. 하지만 후회하진 않겠다. 할머니는 내 삶 속에서 대장부 같은 추진력의 원천으로 오랫동안 살아계실 테니.


할머니 안녕히 잘 가십시오.

매거진의 이전글 할머니에 대한 나의 적개심은 어디에서 왔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