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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승주 Oct 19. 2021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 남자도, 여자도.

김지영


가끔은 좋은 의도의 일들이 불필요한 논쟁에 의해 훼손되기도 한다. 특히 논쟁에 남녀갈등이 조금이라도 가미되면 그때부터는 비생산적인 비방만 난무하는 경우도 많다. 한때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이 인기를 끌었을 때가 있었다. 동시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남녀갈등 때문이었다. 결국 소설이 성공한 것에 비해 '여성의 사회참여'에 대한 생산적인 토론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흐지부지 마무리되고 말았다.


여성의 사회참여는 분명 중요한 사회 문제이다. 잘 교육받은 사람들이 출산 이후 사회에서 본인의 역량을 잘 발휘하지 못한다면 이는 사회적으로도 분명히 중대한 손실임에 틀림없다. 내게는 이러한 문제를 의식하게 된 개인적인 동기가 있다. 우리 엄마는 셋째인 나를 출산함과 동시에 교사직을 그만두셨다. 사회 생활을 포기하신 엄마 덕에 다니던 유치원이 재미가 없다고 자퇴를 하였던 나는 어릴 적 엄마와 행복한 시간들을 실컷 보낼 수 있었다. 시대가 지나도 쉽게 바꾸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인지, 나의 누나 또한 아이를 낳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큰 대기업에서 조기 승진을 하며 한창 회사에서 잘 나가던 누나였지만 첫째 아이 출산 후 잠깐 복직하였다가 결국에는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이러한 문제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여성들이야 본인들과 밀접한 문제이니 말할 것도 없고, 남성들에게도 엄마가 있고, 누나가 있고, 여동생이 있고, 딸이 있을 터이니 그들을 생각한다면 이는 본인들의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사안일 것이다. 하지만 이 보편적이고 중요한 사회문제는 차라리 같이 다뤄지지 않으면 더 좋았을 다른 이념적인 문제들과 결부되어 당위성을 잃어가고만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여성의 사회참여'와 같은 단어만 보아도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의학과 2학년 시기에 이 주제와 관련된 정말 간단한 연구를 하나 진행한 적이 있다. 당시 한창 『82년생 김지영』이 인기를 끌던 시절이라 우리나라에서 '김지영'과 비슷한 조건인 여성은 정말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우울한지 알아보기 위한 연구였다. 연구는 정말 간단했다. 지역사회 건강조사 자료에서 30대 기혼에 자녀가 있는 무직 여성의 우울감은 다른 조건의 사람들에 비해 어떠한가를 비교하는 게 연구의 끝이었다. 간단한 연구인만큼 궁금증도 간단했다. '82년생 김지영은 정말로 우울할까?' 내 소논문의 제목이었다.


연구 결과, 김지영에 해당하는 30대 기혼에 자녀가 있는 무직 여성은 같은 조건의 직장인 여성에 비해 우울을 경험할 위험이 1.16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30대 기혼에 자녀가 있는 직장인 남성과 비교하였을 때, 30대 기혼에 자녀가 있는 무직 여성은 우울을 경험할 위험이 2.21배, 30대 기혼에 자녀가 있는 직장인 여성은 우울을 경험할 위함이 1.91배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위 결과는 통계적인 결과만 정리하여 보여줄 수 있을 뿐 그 어떠한 결론도 도출할 수가 없다. 비록 소득이나 연령에 의한 효과를 보정하기는 했지만 우울감이라는 지표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조사하여 반영하지는 못 했기 때문이다. 큰 의미를 두고 한 연구는 아니었기에 나는 그러한 연구의 한계들을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 충분히 설명하고는 연구를 끝냈다.


그런데 역시나 또 제목만 보고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닌가.

   '저런 게 연구야?'

실제 내가 같은 학교 학생으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국가가 시행한 역학 조사 자료를 이용하였고, 검증된 통계 프로그램을 사용하였으며, 주장의 논리적 한계에 대해 저자가 충분히 설명을 하고 있는데 뭐가 문제였던 걸까.


나는 '원인을 설명하는 그 모든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고' 결과적으로만 보아서 김지영과 같은 조건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우울감이 높은지 알고자 했을 뿐이다. 내가 했던 연구는 그 자체로 그 어한 이념적 지향을 가지고 실시된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가 근거에 기반되어야 하는 것이지, 근거가 이데올로기에 기반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실제로 나는 생물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다윈주의에 기반한 사회생물학적 세계관을 지지하고 스티븐 핑커, 에드워드 윌슨, 매트 리들리와 같은 학자들을 존경한다. 그러한 내가 '빈서판 위, 환경에 의해 새겨진 성(sex)'을 지향하는 특정 이념을 지지할리도 만무하다. 그럼에도 나는 위 연구 결과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자녀가 있고 직장이 없는 여성은 자녀가 있고 직장이 있는 여성에 비해 조금 더 우울한 측면이 있다."


가끔 비생산적인 남녀갈등이 없었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더 좋은 정책들을 만들며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상한 논리로 소모적으로 싸우지말고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 남자도, 여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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